현대목회와 신약신학
부산횃불회 2006년 10월 16일
현대목회와 신약신학
소기천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신학)
현대목회의 상황은 다양한 것이 그 특징이다. 그만큼 시대의 변화가 빠르기 때문에, 목회자가 그 때 그 때 제대로 대처해 나가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도 성경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대적인 상황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성경의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이 변화무쌍한 현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의 말씀을 올바르게 증거할 수 있느냐 하는데 달려있다.
이번 강연을 통해서 부산지역의 목회자들이 현대목회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다시금 새기는 기회가 될 줄로 믿는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약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소기천 교수는 미국에서 10년 공부하는 동안에 7년 반을 담임목회자로 교회를 섬기다가 귀국하여 만 8년을 지냈다. 귀국 후에도 3년 동안 충북 송면교회를 담임하면서 한국교회를 새롭게 경험한 적이 있으므로, 이번 강연이 목회현장과 신학을 연결하는 좋은 기회가 될 줄로 확신한다. 현재 소기천 교수는 예수말씀 연구소의 부소장으로 섬기기도 하는데, 그동안 학문의 장에서 정립된 성서신학적 결과물을 교회와 선교 현장에 나누어 주려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강연은 현대 신약학의 흐름과 현대목회적 관심을 함께 다루고자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다빈치 코드와 유다복음서 문제를 집어 보면서 해석학의 문제, 역사적 예수 문제, 외경 문제 등을 부산지역의 목회자들이 전문가와 더불어 그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볼 수 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제 옛 말이다. 청소년들이 기성세대를 가리켜서 세대차이 난다고 비판을 가하는데, 이제는 1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조지 바나(George Barna)가 1990년에 출간한 책, 「냄비 속의 개구리」(The Frog in the Kettle)를 보면 1년까지 갈 것도 없이 “급변” 하는 것이 현대사회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발간되기가 무섭게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그 책제목 그대로, 냄비 안의 개구리가 냄비 물이 갑자기 뜨거워지면 깜짝 놀라 튀어나와 목숨을 건지지만, 냄비 물이 서서히 데워지면 물 온도의 변화를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따뜻하다. 살기 좋구나. 아늑하구나” 하다가 오뉴월 논바닥인줄 알고 유유히 놀다가 서서히 삶아 죽게 된다고 한다. 바나에 의하면, 오늘 현대인이 냄비 속의 개구리 같다.
바나가 지적하고 있는 교회 안의 변화를 생각해보자. 그는 지금까지 돈을 중시하던 가치관이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조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교인들이 어느 한 교회에 매여 충성하고 헌신하기보다는 여러 군데 적을 두고 필요한대로 골라가며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즉 언제든지 피신할 교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인들이 교회 안의 봉사 등과 같은 일속에서 보람이나 만족 혹은 성취감을 느끼기보다는, 교회 밖에서 취미생활이나 오락, 혹은 운동과 같은 여가 선용에서 성취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에 모여서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얼마나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보람된 일을 했느냐는 화제보다는, 얼마나 여행을 멋지게 다녀왔고 남들이 하지 못한 여가 선용을 즐겼느냐는 화제가 더 관심을 끌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앞으로의 교회는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등 이런 교단적인 배경이 필요 없고, 단순히 취미와 여가 선용을 위한 교인들의 관심에만 발맞추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즉, 교인들의 취미에 따라서 꽃꽂이 교회, 비디오 교회, 골프 교회, 낚시 교회 등이 생겨나고, 담당 목사도 그 분야의 전문가 내지는 사범들로 대치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나의 예측대로 2000년대를 향한 교회가 이렇게 급속도로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과연 태권도 사범이 목사직을 겸직할 것 같은가? 과연 꽃꽂이 사범이 여성 목회자를 대신할 것인가?
결코 변하지 않는 본질
물론 교회는 냄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더구나 성도들이 냄비 속의 개구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예수가 교회의 머리가 되고 주인이 되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해치지 못할 것을 굳게 믿는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 있을지라도, 교회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이 있다. 아무리 시대 풍조가 급변한다 할지라도, 교회는 변해서는 안 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시대에도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고, 시들어 가는 영혼을 소생시켜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일하고 봉사하게 해야 한다”
우리 모두, 이 사실에 이의가 없으리라 믿는다. 이것이 죠지 바나가 말하고 있는 요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 교회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가 서서히 데워지는 냄비 물 안에서 서서히 삶겨 죽어지는 개구리가 안되려면, 주안에서 형제 자매된 성도들이 배우고 확신한 일에 분명히 거해야 한다. 교회의 교회다운 본질은 오직 성서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상호본문성(Intertextuality)
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본문에서 구약성경의 본문을 연구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하여 적용해 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상호본문성’이라고 부른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였던 신약성경의 기자들의 방법을 가리켜서 정경비평 학자들(예를 들면, Bernard S. Childs와 James A. Sanders)은 ‘상호본문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한다.
여기서 언급할 수 있는 ‘상호본문성’의 방법들로는
(1) 직접 혹은 간접 인용구- 구약이 신약에 인용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 방법
(2) 암시문(allusion)- 구약이 신약에 암시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 방법
(3) 반향(echoes)- 구약이 신약에 반영되어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 방법
(4) 석의(paraphrase)- 신약이 구약을 해석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 방법
(5) 짜깁기(weaving)- 신약이 구약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 방법
(6) 유사구조(structure)- 신약 이야기가 구약과 유사한 것에 관심을 갖는 방법
등을 가지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상호 연관성을 연구할 수 있다. 즉 ‘상호본문성’이란 주어진 본문을 생산하고 수용함에 있어서 기자들이 다른 본문의 지식에 의존하는 모든 방식들을 포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에 나타난 주제는 성경 전체와 연결되는데, 이를 통해서 성경 전체의 주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구원이나 창조, 언약, 예수 그리스도, 교회, 하나님의 나라, 종말 등등 수많은 주제들이 성경 전체 속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주제와 관련하여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누가복음 4장에 적용해 보라. 여기서 대략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다음의 4가지이다.
a. 성경전체와 연결되는 주제는 무엇인가?
시험, 하나님의 아들, 광야, 가난한 자, 복음, 흉년, 과부, 질병
b. 당대 신앙 공동체의 전통은?
금식, 안식일 준수, 회당의 모임, 안수기도, 전도
c. 당대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영적인 관계, 육적인 관계, 은혜에 대한 응답, 말씀에 대한 응답
d. 우리의 삶과 당대 신앙 공동체의 연결성은?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본문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복음서 기자들의 신학적 재해석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보냈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무엇보다도 그는 사랑스런 제자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과 공생애 내내 함께 하면서 귀한 말씀들을 들려주었다. 그런 점에서 다음의 노래는 우리의 마음에 심금을 울려준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갈릴리 호수가 없었다면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주옥같이 아름다운 예수의 말씀은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서를 읽어 나가면서 역사적 예수와 관련해서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질문들이 많이 튀어나온다. 아무리 숨을 몰아쉬어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우리의 솔직한 질문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공생애와 교훈의 권위를 결코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인식해야 될 것은 예수에 관한 전승(傳乘)을 수집하고 기록하고 보전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던 전승의 담지자(擔持者)들이 먼저 있었고, 후에 복음서 기자들이 복음서를 기록하는데 그들의 자료가 복음서의 기본적인 자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전승의 보전(保全)과 해석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복음서 기자들의 독특한 신학적 관점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들이 전해 받은 전승 자료들을 토대로 복음서를 기록할 때, 기계적으로 자료들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독자들에게 예수의 참 모습을 신앙적으로 일깨워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예수에 관한 전승이 귀하고 소중했으면, 그것을 후대에 전해주려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눅 1:3 표준새번역) 보았겠는가? 이것이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수집하여 전해준 복음서 기자들의 열정이었다.
예수의 공생애는 몇 년인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지낸 공생애의 기간이 서로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는 예수의 공생애를 1년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은 3년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공관복음서만을 가지고 있다면 공생애 기간에 대해서 혼동할 필요가 없지만, 제4복음서는 예수가 유월절을 지킨 것을 세 번에 걸쳐서 묘사하고 있으므로(요 2:13; 6:4; 11:55), 우리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을 1년이 아니라 3년으로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 만일 요한복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의 공생애를 공관복음서에 의존하여 단지 1년으로 결론지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 연대기가 이처럼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복음서 기자들이 역사적 예수에 관한 전승 자료들을 서로 다르게 수집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관점이 서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이에 관해서 로버트 카이저(Robert Kysar)가 요한복음의 공생애 연대기에 대해서 제시한 견해를 좀더 살펴보자.
제4복음서의 연대기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한은 유월절을 예수의 사역과 관계된 것으로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의 사역 속에서 새로운 출애굽을 보고 있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유월절 축제의 잉태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의 결론을 자칫 잘못 생각하면, 카이저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사역을 유월절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에 대해서 ‘요한복음이 예수의 사역을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유월절 사건과 같은 유형의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데 우리의 관심이 모아진다.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물론 요한은 예수가 공생애 사역 동안에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세 번씩이나 올라가는 것으로 언급하였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예수의 사역을 형식적으로 유월절에 연결짓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요한이 해석한 신학적 관점은 내용적으로 예수를 통한 ‘새로운 출애굽’이고 ‘새로운 유월절’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요한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유대교를 비판하면서 예수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유대교의 유월절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신학적으로 도출해 내었다. 과거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내어 문설주와 문인방에 발랐지만, 예수는 자신이 직접 어린양 제물이 되었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었다(참고, 히 9:12) .
최후의 만찬
요한복음이 유대교를 비판하는 것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우리는 최후의 만찬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사역을 유월절 사건과 관련을 짓고 있는 신학적 해석을 찾을 수 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은 분명히 유월절을 기념한 식사였다. 바로 공관복음서는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이라는 문맥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과 관련을 짓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 전에”(요 13:1) 행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심문을 받은 것도 유월절 전이었고(요 18:28), 십자가에 달린 것과 장사를 지낸 것도 모두 유월절 전에 일어난 일로 묘사되고 있다(요 19:31, 42).
왜 요한은 예수의 사역을 유월절과 관련을 짓지 않으려고 하였는가? 요한은 예수가 유대교에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관점에서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과 상관없이 세례요한이 증언한 대로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임을 선언하고 있다.
성전정화(聖殿淨化) 사건도 공생애 초반인가 후반인가?
공관복음서에서 성전정화 사건이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 사건으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에, 놀랍게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사역 초반에 나타나 있다. 만일 성전정화 사건이 공관복음서처럼 예수의 공생애 후반에 배치되었다면, 수난주간에 일어난 일로서 유월절 사건과 관련을 지어서 해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월절과 성전정화 사건을 서로 무관(無關)한 것으로 취급해 주었고, 성전정화 사건을 예수의 공생애 초반에 위치시킴으로써 “예수의 사역이 전체적으로 유대교를 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재해석해 주고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의 첫 절을 보면,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그 자체이다(요 1:1-4). 여기서 사용된 ‘태초에’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엔 아르케’인데,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나 있는 ‘태초에’라는 단어도 70인역(LXX)은 똑같은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는 모두 존재와 현상의 한 근원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신적인 현존을 가리키는 신학적 의미를 가진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마지막 절을 보면, 예수는 천상적(天上的)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을 이 세상에 담아두기에 부족하다’(21:25)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 두 개의 구절이 요한복음의 처음과 마지막에 배치되고 있는 이유는 예수의 신적인 근원을 밝혀 주려는 의도라는 사실을 중시할 때, 우리는 요한복음서 기자가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성전정화 사건을 위치시킴으로써, 잘못된 율법과 형식적인 제의(祭儀)를 청산하고 율법에 담겨져 있는 참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역사적 사실과 해석된 역사
이제 우리는 예수의 공생애 연대기가 ‘1년인가, 아니면 3년인가?’하는 문제와 성전정화 사건도 ‘공생애 초반인가, 아니면 후반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공관복음서의 보고가 옳은가, 아니면 요한복음이 옳은가?’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차이가 왜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의 자료에 근거하여 예수의 사역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신학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우리는 ‘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이 예수의 사역을 제각기 다르게 해석하였는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각기 자신이 수집한 전승 자료에 충실하였으며 그것을 토대로 예수의 사역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신학적으로 새롭게 재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루돌프 불트만(Ridolf Bultmann)이 내린 ‘역사적 사실과 해석된 역사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는 결론을 방법론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물론 불트만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들(logia)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주의 말씀들”과 “지혜 문학” 사이의 유사성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우리는 그의 제자들(post-Bultmannians)이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서 분명한 일치점’을 찾아낸 것을 주목해야 한다. 불트만은 해석된 역사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철저한 단절과 또한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괴리(乖離)를 선언함으로써, 복음서 기자들의 선포가 지니고 있는 예수의 역사적 근거를 부인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는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사건과 해석은 있을 수 없고 또한 가능하지도 않다.
초기교회의 신앙 속에 있었던 선포의 내용들은, 역사적 예수의 선포 속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즉, 예수와 관련된 선포는, 오랜 구두전승과 문서전승의 수집과 편집과정을 통해서 복음서에 최종적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신앙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선포는 분명히 그 뿌리를 전승궤도(傳乘軌道 trajectory) 속에 내리고 있으며, 그 전승들은 예수에게 그 역사적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전승 자료에 근거하여 예수의 사역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준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를 전적으로 신뢰하여, 예수를 우리 신앙의 주님으로 또한 예수가 살았던 갈릴리를 우리 마음의 고향으로 받아들여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마침내 우리의 영혼이 예수로 인해서 평안을 누리는 축복과 은총 속에 거해야 할 것이다(요 14:27; 16:33).
나그 함마디 문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성서에 있는 4복음서인 마태ㆍ마가ㆍ누가ㆍ요한복음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1945년에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서 일시에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The Nag Hammadi Library)에 포함된 여러 개의 복음서가 판도라 상자와 같이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에 많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지주의 교단에서 만들어진 나그 함마디 문서가 영지주의 문서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고대 애굽어인 콥트어를 잘 알고 있는 필자는 다음과 같이 나그 함마디 문서의 여러 구절들을 검토하면서 <다빈치 코드>의 허구를 밝히려고 한다.
도마 복음서
과거에 학자들은 도마 복음서를 150년경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이제는 70년경에 기록된 문서로 간주하여 나그 함마디 문서 중에서 도마 복음서만은 영지주의적 문서가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다. 도마 복음서는 총 114개의 예수어록이 수집되어 있는데, 모두 예수의 말씀이 중시되고 있다. 그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되어 있는 구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로기온 12부터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나오다. 로기온 13에서 예수께서는 직접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을 들려주는데, 직접 제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중에 시몬 베드로와 마태와 도마가 나온다. 그들과의 대화는 계속 이어져서 로기온 21에서 드디어 마리아가 예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물론 여기서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킨다.
당신의 제자들은 무엇과 같습니까?
이 질문은 로기온 20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하늘나라는 무엇과 같은지 궁금해 할 때, 천국은 겨자씨 하나와 같다는 대답을 듣고서, 곧 이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 던진 질문이다. 아무도 예수께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무엇과 같은지 그 정체성에 관해 질문하지 않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당당히 예수의 제자 중의 한 일원으로써, 일련의 계속되는 대화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그가 예수의 마음 한구석에 중요한 제자로서 인식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이 같은 짐작은 로기온 114에서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에게 한 다음의 대화에서도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마리아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이는 여인들이 영생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가 남성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그를 인도할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너희 남성들과 만찬가지로 생령이 될 것이다.
이는 그 스스로 남성을 얻는 여인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의 대답에서 분명해지는 내용들이 있다. 우선 예수의 마음속에 막달라가 분명한 제자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남성을 취하기 위해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를 취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남성과 동등하게 그 인격과 지위를 인정해 주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있어서 남성을 취하는 여인의 역할을 분명하게 언급해 주었다. 특별히 로기온 114가 도마 복음서의 가장 마지막 구절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막달라 마리아의 위상뿐만 아니라, 초기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강화되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도마 복음서의 증언들은 <다빈치 코드>에서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라 그의 제자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뒷받침하고 있다.
빌립 복음서
그런데 한 가지를 더 설명할 것이 있다. 과연 도마 복음서에 예수의 제자 중의 하나로 인식된 마리아가 과연 막달라 마리아인가 하는 의구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빌립 복음서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이에 더하여서 한 가지를 겸하여 더 생각해야 할 것은 마가복음 14:3-9와 마태복음 26:6-13과 누가복음 7:36-50과 요한복음 12:1-8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전승은 과연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구절이 빌립 복음서에도 있다.
빌립 복음서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을 직접 거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서이다. 특히 빌립 복음서 59:7-10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과 항상 함께 동행하던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막달라였다. 그런데 막달라는 예수의 동역자로 불렸다. 예수의 자매와 어머니와 동역자는 각각 마리아라고 불렸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주위에 있던 세 여인의 이름이 모두 마리아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각각 예수에게 어머니로서, 자매로서 동역자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언급된 막달라 마리아에 관해서 <다빈치 코드>에서는 필자가 위의 번역에서 동역자로 소개한 콥트어 단어 코이노노스를 ‘짝’이란 단어로 소개하여 예수의 부인이라는 관점에서 소설을 전개시켜 나갔는데, 이는 다분히 반기독교적인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인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을 가능성을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가 과거에 창녀였다고 6세기 이후의 교회가 추정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많지만, 그가 귀신들렸을 때에 예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았기 때문에 후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의 동역자가 되었다고 충분히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동역자라고 평가한 빌립 복음서는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제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다빈치 코드>에서도 문제시하고 있는 빌립 복음서 63:34-35, 64:1-4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주님의 동역자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께서 모든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여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에게 물었다. 왜 당신을 그를 우리 모든 사람들보다 더 사랑합니까?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를 향해서 왜 막달라 마리아만을 더 사랑하는지 질투하는 모습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다빈치 코드>에서 댄 브라운이 주장하는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부인이라면, 어찌 제자들이 예수께서 그와 입을 맞추는 것과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끼겠는가? 이는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동역자인 막달라 마리아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시기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당시에 동료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시기심의 발로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였을 때, 다른 모든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을 갔지만 여인들은 먼발치에서 나마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가복음 15:40, 47과 16:1, 9는 그 누구보다도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처음에 거론하고 있다. 이는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초기 교회에서 아주 비중 있게 다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막달라 마리아 전승이 빌립 복음서에서 예수의 동역자로 두 번씩이나 언급되면서 그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묘사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리아 복음서
나그 함마디 문서에서 발견된 책들 중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제목이 붙여진 것은 마리아 복음서가 유일하다. 물론 마리아 복음서에 거명되고 있는 마리아는 다름 아닌 막달라 마리아이다. 마리아 복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마리아 복음서 7:1-9:24는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둘째, 마리아 복음서 10:1-23, 15:1-19:2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주신 특별계시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 두 번째 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베드로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자매여,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을 나머지 여인들보다 더 사랑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 복음서 10:1-3)
이 말을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다른 여인보다 더 사랑한 이유가 그가 예수의 부인이기 때문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리아 복음서의 문맥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댄 브라운의 주장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리아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그를 다른 여인들보다 더 사랑한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주님의 특별한 계시를 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의 발언 이후에 계속되는 내용에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들려주신 계시에 관해서 언급하였다. 불행스럽게도, 마리아 복음서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우리는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발굴을 통해서 전해진 마리아 복음서의 현재 내용들만 가지고서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제자로서 어느 제자 못지않게 주님의 특별계시를 직접 체험하여 간직하고 있었던 동역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리아 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곧 마리아 복음서 19:1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증언을 한 후에 제자들이 반응한 것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리아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제자들이 나가서 전파하고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막달라 미리아의 계시에 관한 증언을 통해서 제자들이 영적으로 힘을 얻고 복음전파에 더욱 더 힘을 쏟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막달라 마리아를 칭송하려는 차원이 아니라, 제자들이 주님의 복음전파를 이행함에 있어서 그를 동역자로 간주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빈치 코드>
베스트셀러 소설인 <다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은 마가렛 스타버드의 소설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를 보고 난 후 <다빈치 코드>를 썼다. 그만큼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는 댄 브라운이 <다빈치 코드>를 쓰기까지의 중요한 뼈대가 되었으며 실제로 <다빈치 코드>를 보면 이 책에서 많은 것을 빌려왔음을 알 수 있다. 픽션이라는 문학적 장르를 취하고 있는 <다빈치 코드>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내용은 예수의 혼인 사실여부와 그의 부인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것이다.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는 가톨릭 학자가 쓴 책이라 로마 천주교의 많은 의문점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마가렛 스타버드는 1983년 미국에서 출간된 <성혈, 성배>(예수께서 결혼했고 그의 후손이 서유럽으로 유입됐다고 주장하는 책)를 읽고 그 불경스런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애당초 잘못된 내용을 반박하기 위해서 시작된 연구는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를 출간하는 것으로 일단락 짓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하다. 마가렛은 예수의 후손을 임신한 채 이집트로 피신한 막달라 마리아가 로마 교회와 종교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성배(예수의 피를 담은 잔) 전설'의 실체라고 말한다. 결국 성배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결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최후의 만찬
<다빈치 코드>에서 여주인공 소피 느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깜짝 놀란다. 예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인물이 ‘흐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섬세하게 모아 쥔 손, 살짝 솟은 가슴’을 가진 영락없는 여자라고 본 것이다. <다빈치 코드>에 따르면 이 인물은 예수와 결혼한 막달라 마리아라고 한다. 수염이 없는 갸름한 얼굴, 흰 피부와 긴 머리가 여성으로 착각할 만하다고 한다. 더욱이 예수는 붉은 겉옷에 푸른 망토를 걸쳤고 막달라 마리아는 푸른 겉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바로 지금의 커플 티셔츠를 입고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옆자리에 그려 놓음으로써 기독교가 예수의 결혼을 숨기기 위해 여성성을 철저히 배제해 왔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외에도 최후의 만찬을 다룬 그림을 그린 화가는 많다. 예수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는 장면은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극적인 순간의 하나로 성화(聖畵)의 단골 소재였다. 논쟁의 핵심은 역시 예수 옆자리의 인물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여성처럼 보이는 이 인물은 다름 아닌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12명의 제자 가운데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미소년이었다. 요한은 예수의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은 제자로 알려져 있어서 최후의 만찬을 그린 다른 화가의 그림에서도 언제나 예수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것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예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슬퍼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다빈치 코드>가 억지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다.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에서 ‘이 책이 상당한 역사적 진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다빈치 코드>의 진실-해설편이라는 부록에서 그는 ‘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역사에 대한 주장이 사실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성배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소설을 미화하며 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중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예수의 오른쪽에 앉은 제자가 요한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정말 실소를 금하기 어렵다.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요한이 여성의 이미지로 보인다는 점이 곧 예수가 막달라 마리와와 결혼했다는 증거라는 댄 브라운의 주장은 절로 웃음이 나온다. 댄 브라운의 주장처럼 예수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요한이 아니라면,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과연 요한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예수께서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인 요한을 과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제외하였겠는가?
<다빈치 코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많은 의혹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영화 <다빈치 코드>는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를 영화화 한 것이다. 소설을 대본으로 영화를 만든 론 하워드는 “(이 영화로 인해서) 현재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역사가 철저하게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신앙이 걸려있는 전쟁입니다. 모든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에 전체 세계가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다분히 영화감독으로서 흥행만을 생각하고 영화를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의 전통적인 뿌리를 뒤흔들려고 시도하였던 영화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번에 상영된 <다빈치 코드>도 이와 유사한 양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영화 <다빈치 코드>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세계 최초로 법원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다빈치 코드>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서,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소설은 소설로서 충분하다. 소설인 <다빈치 코드>가 영화로 만들어 질 때, 당연히 흥행이 최우선의 관심사항이다. 이번에도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이 계속되어 오면서, 역으로 영화 <다빈치 코드>를 홍보해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도 많다. 논란이 많았던 만큼 다음의 몇 가지로 기독교의 기본교리에 정면도전하고 있는 <다빈치 코드>의 허와 실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신학적 분석을 통하여 오늘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고자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인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파급효과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다빈치 코드>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결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인이 아니다. 이미 언급한 나그 함마디 문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였다고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없다. 그러면 왜 <다빈치 코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부인이라고 오도하는가?
첫째, 댄 브라운은 나그 함마디 문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짝’이란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고대 애굽어인 콥트어에서 ‘그리스도의 짝’이란 표현은 부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꾼, 친구, 동역자, 제자, 혹은 사도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곧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계서 사망의 권세를 깨드리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증인으로서 충실한 제자도를 실천한 인물이다.
둘째, 댄 브라운이 인용하고 있는 나그 함마디 문서 중에 빌립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입맞춤을 하시는데, 이는 에로틱한 성애의 표현이 아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입을 맞추는 방법으로 친밀한 인사를 나누면서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바울도 성도들이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인사를 나눌 것을 권면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도 스승을 체포하는 신호로 예수에게 입을 맞추었다.
예수께서 어느 누구와 결혼하였다는 기록은 역사상의 문헌 속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성인이 되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서, 예수께서도 결혼을 하였다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당시의 전통에 따라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결혼을 하였다고 해서, 예수께서도 결혼을 하였다고 추측하는 것은 억지이다. 당시의 상황에서도 유대교의 랍비들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용납되어서 독신으로 지내는 랍비도 많았다. 이런 연유로 세례 요한도 독신으로 지냈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인가?
댄 브라운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경을 다시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의 인성을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빼고 신과 같이 보이도록 하는 복음서만 각색해서 새로운 성경을 만들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초기 복음서들은 법으로 금지되고 수집되어 불태워졌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서는 결코 각색 된 것이 없다. 더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복음서를 새로 만들도록 지원한 적도 없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왕위에 오르기 이미 200여 년 전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더구나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신성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댄 브라운이 예수의 인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다빈치 코드>를 썼다고 하는데, 이미 신약성경에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구절들이 많다. 예를 들면,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다양한 인성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곧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노하고(1:41, 43, 3:5; 10:140, 성급하며(7:18; 8:17-21), 놀라며(6:6), 화를 낸다(8:12). 또 제자들을 꾸짖고(8:33), 사람들을 비판하고(9:19), 모르는 것이 있으며(13:32), 고뇌와 번민에 사로잡힌다(14:33-34).
본질적으로 신약성경은 어떤 책인가? 신약성경은 예수의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다빈치 코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한 한 남성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신약성경은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신약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대로, 초기 교회는 최초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 기독론을 확립하게 된다. 이러한 신앙은 신약성경에 기초를 둔 것으로, 초기 교회 시대 때부터 각종 기독론적인 이단을 경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댄 브라운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를 ‘한 예언자’ 혹은 한 ‘인간’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다. 댄 브라운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신약성경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요 5:18; 20;28; 골 1:16-19; 히 1:8-12; 계 1:8).
막달라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나그 함마디 문서 중에 마리아 복음서가 있다. 거기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모든 제자들, 심지어는 베드로도 능가하는 예수의 수제자로 묘사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주님의 특별한 계시를 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여성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초기 교회에서 결코 여성의 리더십이 과소평가되지 않는다. 이미 복음서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일도 전파하라.’고 예수께서 부탁하신 것처럼, 초기 교회에서 여성은 예수의 동역자로 일컬어질 만큼 그 역할에 있어서 눈이 부실정도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전에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자신을 나타내신 사실(막 16:9)을 중시해야 한다. 이는 부활신앙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여성의 리더십을 세우려는 주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처럼, 오늘 예수께서는 여성을 자신의 당당한 제자로 부르고 계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불 때, 초기 교회에서 여성의 리더십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초월하고 있다. 초기 교회에서 결코 여성의 리더십이 과소평가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복음서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 ‘이 여인이 행한 일도 전파하라.’고 예수께서 부탁하신 것처럼, 초기 교회에서 여성은 예수의 동역자로 일컬어질 만큼 그 역할에 있어서 눈이 부실정도이다.
여성의 리더십
누가복음은 5장에서 남성 제자들이 부름을 받기 이전에, 이미 4장에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고침을 받자마자 제자도의 전형적인 행동인 섬김과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였다는 사실(눅 4:38-39)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은 6장에서 제자들의 명단을 소개하는 것과 버금가는 비중으로 8장에서 예수의 주위에 있던 여인들의 명단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섬겼다(눅 8:3)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구절에서 누가복음은 제자도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리키는 단어인 그리스어 동사 디아코네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명사로 디아코니아를 뜻하는 바, 초기 교회에서 제자들의 역할에 있어서 여성의 섬김과 봉사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하게 평가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와 같이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에게 스캔들이나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간주하려는 허구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한다. 왜 초기 교회는 줄기차게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훌륭한 제자로 간주하였는지 우리는 그 실체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전에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자신을 나타내신 사실(막 16:9)을 중시해야 한다. 이는 부활신앙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여성의 리더십을 세우려는 주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성을-남성과 동등하게 아니 남성보다 먼저-자신의 당당한 제자로 부르고 계시다.
성서 신학적 비판
첫째, 댄 브라운은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그의 소설인 <다빈치 코드>에서 성경에 관해 거침없이 폄하하는 발언을 일삼고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경이 많은 변형과 첨가와 개정 작업을 거치면서 진화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성경의 원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원문은 없다. 오늘 우리가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약성경은 초기 교회로부터 사본이 베껴지면서 전해져 내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거짓을 감추거나 진실을 호도하기 위한 관점에서 개정되거나 진화해 온 것이 아니다. 더구나 댄 브라운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약성경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억지로 변형되어 전해 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예수의 말씀과 생애를 있는 그대로 후대에 전하려고 노력했던 경건한 문서이다. 여러 다양한 지역에서 1500여 년 동안 신약성경의 사본이 베껴졌는데, 가장 초기와 후기의 사본을 비교해 보면 양자 사이에서 인위적인 변형과 개정 혹은 진화의 흔적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서, 신약성경은 1500여년의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사가의 무의식적인 오류가 있을 뿐이지, 고의적인 변경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댄 브라운은 80여종의 복음서가 있었는데, 그 중에 신약성경에 있는 4복음서만이 경전으로 채택되어 전해지게 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된 다른 복음서들을 거론하면서 예수의 결혼에 대해서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말하는 80여종의 복음서가 있다는 말은 거짓이며 과장이다. 불과 30여종의 복음서가 역사상에 존재하였는데, 그 중에서 안디옥에서 기록된 마태복음, 로마에서 기록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에베소에서 기록된 요한복음만이 신약성경에 경전으로 채택되었다. 그 이유는 이들 지역이 초기 교회에서 사도들이 구약성서와 유대교적 전통에 근거한 정통신앙을 계승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댄 브라운이 인용하고 있는 마리아 복음서와 빌립 복음서의 적절성이다. 이들 문서들은 1945년에 북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 중에 포함된 것으로서 150-230년경에 헬라어로 기록 되었다가 3-5세기 경에 고대 애굽어인 콥트어로 번역되어 전해진 문서이다. 이 문서들은 영지주의 교단에서 정통 신앙과는 다른 전통에 입각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던 수도사들이 남긴 문서들이다. 이들 문서들에 대해서 180년경에 오리게누스와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내우스는 이단논박이란 글을 통하여 그 이단성을 경고한 바가 있듯이, 이미 역사 속에서 그 문서들의 가치 판단이 내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신약성경에 속한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그 신뢰도가 심히 떨어지는 문서들이다.
셋째, 댄 브라운은 빌립 복음서와 마리아 복음서를 인용하면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콥트어에서 ‘짝’이라는 단어는 동역자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종, 일꾼, 친구, 제자, 혹은 사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더구나 댄 브라운이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입을 맞춘 것이 에로틱한 성애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당시의 인사 관습을 무시한 해석이다. 더 나아가서 댄 브라운은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한 이유가 부부관계를 입증하는 것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초기 교회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위상이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 지도력이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다시 말해서, 공간복음서에 의하면 부활의 첫 증인이며 또한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일하게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는 초기 교회에서 여성 제자로서 그 지도력이 인정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위상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 빌립 복음서와 마리아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기록이다.
넷째, 댄 브라운은 예수에 대해 ‘한 인간에 불과하고 역사적으로는 그의 추종자들이 예언자로 떠받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 예수에 관한 신약성경의 기록은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미 4세기에 신약성경을 토대로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라는 기독교 신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양성론 교리가 채택된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곧 예수의 인성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후에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신성이 확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신약성경에 예수께서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기에, 후대에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교리로 채택되어 논리 정연하게 역사상에 그 실체가 선언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신성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33년의 공생애를 사셨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보도하고 있다. 참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와 고통을 그 몸으로 체휼하신 분이시고, 또한 참 하나님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주신 분이시다.
유다 복음서와 영지주의 교단
앞에서 이미 언급한 나그 함마디 문서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문서이기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당시 영지주의의 총본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일강 하류 삼각지대의 알렉산드리아나 시리아의 에데사와 연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나그 함마디 문서를 대할 때, 이단적 문서라고 무조건 멀리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계기로 신약성서가 지니고 있는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중시하고, 왜 초기 교부들이 4복음서 이외의 다른 복음서들에 대해서 이단적 문서라고 결론을 지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그 함마디 문서가가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할지라도, 그 문서가 신약성서의 4복음서를 대신하거나 보충할 수는 없다. 아무리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교단처럼 다양하였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 시대에 정통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경전의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에 있었던 정통과 이단 논쟁에서 나그 함마디 문서는 영지주의 교단의 문서로 낙인찍혔다. 그러므로 이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도 동요할 필요가 없다. 나그 함마디 문서의 내용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다 복음서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하여,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고 하셨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가룟 유다는 언제나 그의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긴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혀서 오고 오는 세대에 부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 비극의 주인공인 가룟 유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유다 복음서”가 발견되었다. 2세기경에 원래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가 4세기 경에 이집트의 고대 언어인 콥트어로 번역된 “유다 복음서”가 1700년의 베일을 벗고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National Geographic Society)에 의하면, “유다 복음서”는 콥트어 고문서로 오늘 날의 책제본 형식과 유사한 코덱스 형태로 13장의 파피루스 앞뒷면에 기록된 26쪽의 분량이다. “유다 복음서”는 1980년경 이집트 중앙 엘 미냐(El Minya)근처에서 발견된 콥트어로 된 영지주의 파피루스 코덱스에 들어있는 세 번째 문서이다. 이 코덱스는 1945년에 북아프리카의 나일강 유역인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The Nag Hammadi Library)에 이미 들어있는 두 개의 문서 필사본을 포함하고 있다. 곧 베드로가 빌립에게 보낸 편지(VII, 2) 그리고 첫 번째 야고보의 묵시록(V,3)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이 영지주의 코덱스에는 모두 네 개의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즉, “베드로가 빌립에게 보낸 편지,” “첫 번째 야고보의 묵시록,” “유다 복음서,” 제목이 없는 이방인의 일부를 담은 문서 하나 등등이다.
결론부터 우선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유다 복음서”의 내용을 미루어 추측해 본다면, 이 문서는 그 당시에 정통 교회에 의해 제기된 신학적 논쟁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어떤 영지주의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유다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유월절 3일전에 일주일 동안 예수께서 가룟 유다와 대화하신 것을 폭로하는 비밀스런 말씀이다.” 이러한 표현은 유다 복음서가 영지주의의 전통과 연관되어 있는 이단적인 경향을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너는 그들보다 더 우수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옷을 입히려는 자를 네가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구절도 나타난다. 이는 예수께서 육체의 옷을 벗어날 수 있도록 유다가 도와준다는 뜻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유다 복음서는 유다가 다른 제자들에 의해 멸시 당할 것이나 그들보다 더 뛰어난 신분이 될 것이라 암시한다. 또한 예수께서는 “너는 세대에 걸쳐 저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보다 더 우수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유다를 다른 제자보다 뛰어나게 언급하는 유다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그들은 유다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여기서 무엇 하느냐? 너는 예수의 제자이다.’ 유다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돈을 받고 그를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유다가 예수의 뜻대로 스승을 팔아넘기는 일에 일조한다는 이야기를 유다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영지주의 이단 문서
이미 지난 5월 14-22일에 내한하여 여러 차례 강연회를 가진 바 있는 미국 클레어먼트 대학교의 명예 교수인 로빈슨(James M. Robinson)은 필자가 유학하던 시절에 7년 넘게 장학금을 주면서 논문을 지도해 준 은사이다. 그는 장로교인으로서 “유다 복음서와 관련하여 교회의 거룩한 절기인 부활절을 오도하면서 상업적 흥행만을 생각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와 골동품 중개상인 프리다 차코스(공식적으로 ”유다 복음서“는 ‘차코스 문서’라고 불린다)를 철저하게 비판한 책을 이미 지난 4월 21일에 「The Secrets of Judas」(2006)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유다 복음서”는 영지주의 셋 파에 속하는 문서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아담의 셋째 아들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홈페이지에 실린 “유다 복음서”를 보면 ‘불멸하는 셋의 [자손]’이라는 언급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라 불리는 셋’이라는 표현도 있다. 이러한 표현에 의하면 “유다 복음서”는 영지주의 셋 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그 함마디 문서들은 “유다 복음서”와 유사한 방식으로 ‘기독교 세계에 그리스도를 셋의 임재로 제시’하고 있는 문서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일찍이 초기 교부 중에서 로마의 리용에 살았던 역사가인 이레내우스(Irenaeus)는 180년경에 그 유명한 “이단논박”에서 이미 “유다 복음서”를 전적으로 거부한 적이 있다. 그러나 누가 이 문서를 기록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레내우스의 ‘이단논박’(I.31.1)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가인이 위에 있는 권능(power)으로부터 그의 존재가 기원했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에서, 고라, 소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배신자 유다가 이러한 것들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고, 그 홀로 다른 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했던 진리를 알고서 배반의 신비를 완성했다고 선포한다. 그에 의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렇게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이러한 효과를 위해 날조된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를 유다 복음서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이레내우스의 언급은 오고 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미 초기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문서이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이단적 문서에 동요되지 않았다. “유다 복음서”는 또한 4세기에 에피파니우스(Ephipanius)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데 거기서 에피파니우스는 “유다 복음서”가 셋 파의 관점을 알려주고 있다고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에피파니우스의 책 ‘파나리온’(Panarion)에 이 같은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37.3.4-5; 6.1-2; 38.1.5):
그리고 다른 이들은 말하기를, “아니오. 그는 그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천상의 지식 때문에 그를 배반하였소. 왜냐하면 [악한] 아르콘들은 알기 때문이오,” 그들이 말하기를 “만약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으로 넘겨지면, 더 약한 권능들이 쇠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유다가 이것을 알아냈을 때,” 그들은 말한다, “그는 염려했고, 그를 배반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좋은 일을 수행하였다. 우리는 그를 칭찬해야 하고, 그에게 신뢰를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구원은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왔고, 만물의 원인이 되는 계시를 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기를, “유다는 그들(보다 높은 권능들)에 대해 알아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친족이라고 주장했고, 그를 특별히 지식있는 자로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들은 짧은 문서를 그에게 돌렸는데, 그들은 유다 복음서라고 불렀다.
로빈슨에 의하면, 비록 이것들이 “유다 복음서”에서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존하는 문서에 근거하여 판단할 때, 그들은 동일한 영지주의 신화를 보여준다. 세상이 매우 끔찍한 장소이기에, 이를 창조한 하나님은 정통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예배를 받는 선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이 분명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강요하여 그 앞에서 비굴하게 절하게 하고 곤경에 빠뜨리는 악한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늘들(heavens) 위에 높은 곳에 감추어진 빛의 영역이 있는데, 여기에는 알지 못하는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린다. 종종 그는 그의 사자들을 지구로 보내어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신성한 불꽃을 일으켜 깨운다. 사자들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전해주고, 그들로 육체의 감옥을 떠나 위에 있는 빛의 영역으로 돌아가도록 부른다. 성경에 영감을 준 것은 악한 창조자 하나님이었기에, 성경은 그의 노예와 같은 숭배자들에게 거짓을 선전하고, 위에 있는 감추어진 빛의 영역에서 온 사자가 일깨운 사람들을 아래로 끌어 내리려 한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저주받는 사람들은 바로 진정으로 일깨움을 얻은 사람들이고, 영지주의자들의 선구자였다. 곧 가인, 에서, 고라, 소돔 사람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물론 배반자 유다가 이에 해당된다. 이로써 가인을 추종하며 성경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인물들을 영지주의 이단에 입각하여 거꾸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사람이 유다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분명해진다.
로빈슨은 “유다 복음서”를 바로 이런 영지주의의 틀 안에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감사기도를 비웃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정말 누구인지 모른 채 악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불멸하는 바벨로(Barbelo) 영역에서 내려온 감추어진 선한 하나님의 여성 파트너이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처럼 천상에 있는 감추어진 빛의 영역에서 유래했고, 그래서 유다를 비난하는 열두 제자 위에 있는 열세 번째로 지명된다. 그는 다른 세대로부터 또한 저주받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에게 그 길을 인도하는 별은 바로 너의 별이라는 것을 재확인해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다의 역할이 “나를 옷입히는 인간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따라서 예수의 참된 자아는 그를 감금시킨 육체로부터 탈출하여 천상의 빛의 영역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경 복음서들 안에 있는 유다의 모습은 기초적인 영지주의 신화의 관점에서 이용되는데, 여기서는 그를 영지주의 구원 계획을 촉진시키는데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유다 복음서”는 영지주의 이단과 분명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 문서이다. 에데사에서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자 영지주의자들은 급히 이 문서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 후에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성 마가를 중심한 정통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자, 다시 나일강 유역으로 이 문서를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유다 복음서”를 대할 때, 이단적 문서라고 무조건 멀리할 필요는 없다. 이미 필자는 지난 4월 7일에 ‘메트로’ 신문 특집 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서를 계기로 신약성경이 지니고 있는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중시하고, 왜 초기 교부들이 4복음서 이외의 다른 복음서들에 대해서 이단적 문서라고 결론을 지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유다 복음서”가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할지라도, 그 문서가 신약성경의 4복음서를 대신하거나 보충할 수는 없다. 아무리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교단처럼 다양하였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 시대에 정통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경전의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에 있었던 정통과 이단 논쟁에서 “유다 복음서”는 영지주의 교단의 문서로 낙인찍혔다. 그러므로 이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도 동요할 필요가 없다. “유다 복음서”의 내용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분명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약성경은 많은 외경들과 이단 사설들이 범람하는 역사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경전의 역할을 다하여 왔다. 이번에 발표된 <다빈치 코드>와 유다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는 오히려 신약성경의 가치를 드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빈치 코드>와 같은 영화와 유다 복음서와 같은 문서를 무조건 멀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러한 왜곡된 영화를 통해서 우리의 근본적인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시대의 풍조가 악하여 앞으로도 불경스러운 영화가 계속해서 개봉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각심을 가지고 오히려 신약성경에서 보여주는 예수의 참된 모습에 더욱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빈치 코드>와 유다 복음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보여주고 있는 여러 가지 공격 중에 하나이다. 교회는 이러한 공격의 실체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사실상 <다빈치 코드>와 유다 복음서가 주장하는 반기독교적인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2000년 교회 역사가 계속되어 오는 동안에 이미 역사상에 일어났던 일들이 다시 새삼스럽게 되풀이 되고 있다고 느긋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 발표된 <다빈치 코드>와 유다 복음서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 같은 입장을 가져야 한다. 진리는 결코 속일 수 없고 가려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실은 이미 성경이 낱낱이 확립해 주고 있고 또한 2000년 동안 계속된 정통교회의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