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마더 테레사

열국의 어미 2010. 5. 19. 23:04

 

 

마더 테레사 (Madre Teresa)

 생애: 1910년 8월 27일 - 1997년 9월 5일

  • 수상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 경력2003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반열에 오름
      • 1997년 캘커타에서 사망
      • 1995년 워싱턴 입양센터 테레사의 집 설립
      • 1990년 대수녀원장직 공식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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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더 테레사 1.

       

      1910: 유럽 남동부에서 태어난 마더 데레사는 캘커자의 빈민굴에 버려진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수녀가 된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사업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의 한 사람이 된다. 노벨 평화상과 종교의 발전을 위한 템플턴상을 포함해 많은 상을 수상한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비천한 일을 하는데 결코 주저한 적이 없으며 자주 반복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겸손의 필요성이다.

       

      길거리에 버려져 죽어가는 빈자(貧者)들을 보듬어 안고 눈물을 흘리는 것…. ‘살아 있는 성녀(聖女)’ ‘가난한 사람의 어머니’로 불렸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속세에서 펼친 첫사랑이다. 알바니아 혈통으로 1910년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난 그가 인도 콜카타 빈민촌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운 때는 1948년. 선교회는 최초의 사업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을 열었다.그들의 악취 나는 몸을 씻기고, 누더기를 정결한 의복으로 갈아 입혔다. 목숨을 소생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1931년5월24일에 테레사수녀는 가난하게 살고 순결하게 살겠다고 맹세하고 거대한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구릉에 있는 다르질링으로 파견되었다. 그 마을 한 곳에 자라잡은 로레토 수녀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러던 1937년5월14일 테레사 수녀는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종신서원을 했다. 이것으로 테레사 수녀는 수녀가 되겠다고 결심한지 10년 만에 비로소 진정한 수녀가 된것이다.

       

      그 동안 테레사 수녀는 수녀원 담장 안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살았다. 테레사 수녀가 수녀생활을 익히는 동안 인도는 변화되고 있었다. 종종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3년에는 벵골지방에 흉년이들어 수만명이 캘커타로 피난을 오고 일본이 버마를 점령해서 인도는 때때로 폭탄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럴때면 수녀원은 임시 피난처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테레사수녀는 계속해서 학생을 가르치고 다친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 1946년 인도가 파키스탄과 인도로 나누어 지기전에 아주 무시무시한 폭동이 일어났다.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가 거리 곳곳에서 싸움을하고 서로를 죽이기도 했다. 이 폭동으로 닷새동안 4천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사 수녀는 학생들에게 줄 양식을 구하러 거리로 나와 군인들이 길을 막아도 끝까지 양식을 구해갔다.

       

      1946년  12월달에 캘커다로 돌아와 빈민굴을 찾아가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테레사 수녀는 일단 좁은 마당에 학교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활동을 하는데 1949년 한소녀가 테레사 수녀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이름은 수바쉬니 다스였고 당시 고등학교3학년이었다. 상당히 잘사는 집안의 딸이었지만 좋은옷과 비싼보석을 다팔고 테레사 수녀를 도우면서 살기로 한것이었다.

       

      나중에 그소녀는 테레사 수녀를 존경한다는 표시로 아그네스 수녀로 바꾸고 몇주뒤에는 또다른 소녀가 찾아왔다. 그소녀의 이름은 막달레나 였다. 막달레나는 나중에 거트루드 수녀가 된다 그다음은 또다른 소녀가 찾아 오는데 그소녀는 후에 도로시수녀가되고 그다음봉사자는 마거릿 메리 수녀가 되었다. 다섯명의 수녀는 그 도시를 휩쓰는 위험과 질병과 고통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또다른 봉사자가 있었는데 그 봉사자 이름은 마이클 고메스와 그 가족들..마이클 고메스와 그의 가족들은 수녀들에게 좀더 넓은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집세를 한푼도 받지않고 자기들이 쓰는장소를 좁혀가며 남은 장소를 빌려주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는 프로티마 센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그학교의 선생님으로는 마이클이 되었다. 언젠가 테레사수녀가 아파서 누워 있을때, 한 힌두 교도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에는 테레사 하루빨리 회복되어 그녀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칼리여신에게 빌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그녀의 사랑은 이미 종교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1952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연다. 수도회에 회원이 30여 명이 된다. 빈민가에 버림받은 아이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한편 수도자 양성과 공부에 열중한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중심가에 있는 힌두교 사원인 칼리하트에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얻는다.

       

      1953년: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창립된다. 끊임없는 기도 덕택에 하늘의 선물로 사랑의 선교회는 그들의 수도원을 위해 캘커타 54번가에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1955년 마더 데레사는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도 열었다. “단 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아이라도 데려와 달라”고 호소했다. 주위에선 이해하지 못했다. “귀중한 시간과 비용을 더 가치 있는 일에 쓸 수 있지 않느냐”는 말들이 쏟아졌다.

       

      1962년: 마더 테레사는 인도 정보가 수여하는 파드나 스리상을 받게 되며, 동남 아시아의 시토(SEATO) 국가들이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다.

       

      1965-71년: 전 세계에 새로운 분원이 문을 열게 된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분원이 마더 테레사의 첫번째 해외 분원이 된다. 그 다음해 지역 바톨릭 주교들의 초청으로 더 많은 분원이 아프리카에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과 애들레이드, 유럽의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문을 연다. 사랑의 선교회 로마 분원이 교황 바오로 6세가 로마의 주교 자격으로 일을 찬미하고 그녀의 후원자가 되며, 선교회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바타칸 시민권을 수여한다. 사랑의 선교회는 1971년에 50여 개의 분원를 갖게 된다.

       

      1969년 3월 26일: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된다. 마더 테레사의 협조자들은 국제적으로 일반 평신도인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단체인데, 이들이 영성의 실체이며 사랑의 선교회 일을 더 넓혀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학을 한다. 그 수는 매년 끊임없이 증가하기 때문에 확실한 숫자 파악조차 힘들 정도이다. 사랑의 선교회가 최초로 설립된 이래 협조자들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1970년:마더 테레사는 국제적인 중요한 상을 받는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맬컴 머거리지가 펜과 전파를 통해 마더 테레사를 서방 세계에 알림으로써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다. 그 결과 그녀는 미국에서 착한 사마리아상을 받았고, 영국에서는 종교의 진보상인 템플턴상을 받았다.

       

      1979년 10월 17일:마더 테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녀의 일상생활의 단순성이나 겸손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1979년 12월 10일: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삶을 모두 헌신한 가난한 사람의 이름으로 노르웨이 왕 올리프 5세로부터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1980-85년: 사랑의 선교회는 여러 곳에 새로운 분원을 열고, 많은 새로운 성소자의 축복을 받는다. 1980년에는 레바논, 서독, 유고슬라비아, 멕시코, 브라질 ,페루,케냐,아이티, 스페인,에티오피아, 벨기에, 뉴기니아,아르헨티나 등 14군데에 분원을 연다.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뒤로 사랑의 선교회는 놀라운 속도롤 뻗어 나간다. 1981년 한 새만도 8군데난 새로운 분원을 열고, 82년에는 12군데, 83년에는 14군데로 늘어난다.

       

      1991년 1월:마더 테레사는 걸프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두 정상에게 호소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지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죄없는 자들의 이름으로 정열적으로 호소하는 마더 테레사의 요청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1991-93년:마더 테레사의 건강이 또다시 약화되어 처음엔 멕시코의 티후주아나에서, 다음엔 인도 델리에서 쓰러진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무릅쓰고 1993년 10월에 베이징의 초청에 응한다.

       

      1996년 10월: 빌 클린턴 대통령이 마더 테레사를 미국의 명예시민으로 추대하는 헌장에 서명한다. 헌장에 서명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가 전세계 수백만 명의 고아와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생명과 사랑과 희망을 주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