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윤형주 장로

열국의 어미 2010. 5. 20. 00:35

 

 

출생: 1947년 11월 19일 (서울특별시)

학력: 경희대학교

데뷔: 1971년 DBS 라디오 0시의 다이얼

 

 

하나님 주시는 꿈 따라 살았죠

 

미국 뉴욕 카네기홀은 구스타프 말러, 레너드 번스타인 등의 마에스트로와 릴리 퐁스, 제시 노먼 등의 유명 성악가, 마우리치오 폴리니, 야샤 하이페츠, 이츠하크 펄먼 등 세계적 거장들이 연주했던 역사적 무대다. 2804석의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움은 카네기홀에서 가장 큰 규모와 완벽한 음향 설계를 자랑하는 세계적 뮤직홀로 건축가이자 첼리스트인 윌리엄 버넷 투틸이 설계하고 디자인한 이 연주회장은 홀 자체가 커다란 악기와 같다는 평을 듣는다. 때문에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카네기홀은 ‘꿈의 무대’로 불리고 한 번쯤은 이 무대에 서기를 꿈꾼다.

 

윤형주 장로 역시 그런 꿈을 품고 기도했다. “예전부터 카네기홀에 가족 모두가 서는 걸 막연한 꿈으로 삼고 있었죠. 제가 어렸을 적 해리 벨라폰테와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도 모두 카네기홀 라이브 음반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음악을 전공하거나 좋아하고 사위들도 그러니 ‘꿈이 이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꿈은 음악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일반인이 가늠해보아도 그저 꿈으로 그칠 뿐 도무지 이뤄질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품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꿈이 이뤄진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7년 전 어느 날 새벽기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확신 때문이었다. 기도하며 갖게된 소망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윤 장로는 2000년 가을 카네기홀에 대관 신청을 했다. 심사는 통과하지 못했다. ‘윤 장로야 국내는 물론 교포사회에서도 많이 알려진 대중가수이지만 가족들은 누구하나 음악실력을 검증 받은 사람이 없었기에 대관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윤 장로는 포기하지 않고 2002년 다시 대관신청을 했다. “우리 가족은 포크, 클래식, 크로스오버, 뮤지컬까지 두루 보여줄 수 있다. 한 가족이 이렇게 다양한 음악을 하는 건 매우 특별한 무대가 될 것”이라는 내용을 첨부해 다시 신청했고, 결국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지난해 7월 1, 2일 그들 가족은 미국 음악공연의 상징인 카네기홀의 2800석 짜리 극장을 이틀간 매진시키며 이민 100주년을 맞은 교포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을 다시 한번 보게 만들었다. 지난달 11일과 12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카네기홀에서 열었던 가족콘서트를 그대로 옮겨 의욕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했다. 이 공연 역시 매진사례를 보였다.

 

윤 장로의 가족콘서트가 화제가 되는 것은 공연이 담고 있는 풍성함이라든가 공연을 통해 얻게 되는 감동에 그치지 않는다. 윤 장로와 가족들은 앞서 열렸던 카네기홀 공연 수익금 5만여 달러를 한국사랑의 집짓기 운동연합회(해비타트)에 기증해 태풍 루사로 인해 집을 잃은 수재민들에게 집을 지어줬고,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통해 마련된 수익금 역시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를 통해 어린 생명들을 위한 사랑의 보금자리 마련에 사용했다. 굳이 빛으로 소금으로 역할을 다하는 크리스천을 말하지 않더라도 윤 장로와 가족들의 기부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날로 각박해져 가는 우리사회가 지금의 온기라도 잃지 않도록 하는 이유가 될 듯싶다.

 

윤 장로는 1966년 의대에 입학해 당시에도 소위 잘 나가는 직업이었던 의사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 과감히 자퇴서를 내고 자신이 원하는 음악인의 삶을 택했다. 당시 윤 장로의 아버지인 고 윤영춘 장로(당시 경희대 학장)는 주일 오후면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어느 날 조용기 목사를 찾아와 기도를 요청했다. ‘아들이 기타 치고 노래하는 것 그만두고 빨리 학업으로 돌아와 훌륭한 의사가 되게 해달라’고. 그때 조 목사는 아버지 윤영춘 장로에게 ‘기도해 보자’고 하고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아들의 변화를 간절히 원해 찾아 온 아버지에게 차마 ‘아드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윤영춘 장로님의 계획이 다른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아무도 윤형주 장로의 삶이 지금과 같을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나는 피동적인 삶이 싫었어요. 자꾸 벌리고 진취적으로 나가는 것을 하고 싶었죠”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따라 여기까지 왔고 그는 지금도 하고픈 일이 많다. 카네기홀의 공연을 마친데 이어 내친김에 가족들과의 유럽공연도 생각중이고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들과 음반을 만들 기획까지 하고 있으니 가히 ‘꿈의 사람’이라 할만하다. 그래서일까. 벌여놓은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작곡, 가수, 방송진행, 광고, 사업, 교회사역 등 몇 사람 몫의 일을 혼자 다한다. 그러다 보니 그는 다이어리를 5년 치를 하나로 묶어 사용한다. 별도로 제작해 만든 그의 다이어리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이 써놓은 30분 단위 스케줄이 가득했다. 인터뷰 시간 잡기가 힘들었던 이유가 분명해졌다.

 

앞서 언급한 일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힘드냐’ 물었더니 자신있게 대답하는 것이 ‘아버지’였다. “제일 귀하면서 힘들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버지라는 ‘직업(?)’이에요. 내가 아이를 낳았기에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가정의 중요한 리더십이고 경영자고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일이 바로 아버지의 일이에요”

 

윤 장로가 아버지로서 터득한 결론이자 교육방법은 ‘사랑’이었다. 훈계나 교육이나 책망이나 모든 것의 근본은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막내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있는 동안에는 ‘팩스 큐티’로 표현됐다.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와 함께 보낸 큐티는 이후 ‘QT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책으로 엮어져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심어주었다. 이 부분에서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요즘 우리 아버지들은 많이 힘들고 지친 시대에 살고 있어요. 소리내 울고 싶은 아버지들이 많은 이런 때야말로 아내와 자녀들의 기도가 절대 필요하죠”

 

윤 장로의 얘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그와 약속한 인터뷰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랜 세월 함께 알고 지내온 이웃집 아저씨와 같이 다정다감하게 미소짓는 그에게는 음악과 함께 살아온 음악인의 깊은 향취가 느껴졌다.

                                          - 굿뉴스 강남 박재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