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방

[스크랩] 구원파 왜 이단인가?

열국의 어미 2008. 5. 22. 22:33
구원파 왜 이단인가?



<1> 같은 교리에 다른 세 개의 구원파(권신찬, 이요한, 박옥수)

구원파란 이름이 증명하듯이 구원을 강조하는 집단이라는 점과, 더욱이 기성교단의 이름을 가진 6개의 이단 중의 하나라는 점을 볼 때 이단 중의 이단이 구원파이다. 권신찬, 유병헌 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기독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박옥수 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예수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통 침례교가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이 점을 유의하여 정통교단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981년에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 편집위원회 이름으로 편저한 신아문화사 발행(발행인 송일동), <세칭 구원파란?>제목의 구원파를 옹호하는 책이 나온 일이 있었다. 그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들의 주장이 장로교나 감리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은 그들 자신도 잘 알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론적으로만 교리를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 뿐이다. 이 말에 의하면 구원파들의 교리와 기성교회 교리가 아무 차이가 없는데, 교리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로 자신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이단된 자보다, 이단을 규정한 자가 더 나쁠 것이다. 또한 같은 책 머리말에서는, "교리적인 것이라면 얼마든지 우리를 비판해도 상관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저들의 말댈 구원파 교리는 정통 기독교의 것과 같은가? 필자는 지금부터 정통기독교와 너무 유사하나, 다른 종교요 다른 복음이요 또한 반 하나님적이요, 반성경적인 구원파의 이단성을 교리적인 면에서 분석 비판하려고 한다. 본인은 수 차례 권신찬, 박옥수 씨에게 공개질의를 한 일이 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이 책은 이요한 씨를 포함하여 권신찬, 박옥수 씨에게 공도으로 드리는 공개질의서라고 볼 수 있다.

권신찬, 이요한, 박옥수, 이 세 사람이 이끄는 같은 교리의 다른 교단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 점에서 별관심이 없다. 단지 그들의 교리가 정통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이다. 이요한 씨는 권신찬 씨와 윤리적인 면에서는 물론, 교리적인 부분에서 다르다고 했다 한다. 필자는 다 같은 입장에서 비판하려 하는데, 이요한 씨나, 박옥수 씨는 권신찬 씨의 이론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밝혀 응답해 주기 바란다. 자신들의 교리가 기성 정통교회와 다르지 않다고 하든(권씨처럼), 아니면 정직하게 다르다고 하든, 정통교회의 교리와 분명히 다른 교리들을 밝히려 한다. 다르다고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고치고 회개하여 돌아올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 단지 성도를 미혹하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한 것이었음이 판명될 것이다.



<2> 구원파 교리 무엇이 다른가?

1. 구원관에 나타난 이단성

최근 들어와서 구원파 교인들 중에 10단계 질문서라는 것을 사용하는 자들을 본 일이 없다. 이 10단계 질문서를 비록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질문 속에 구원 문제에 대해 저들이 주장하고 싶은 모든 내용과 기성교인들을 미혹할 수 있는 함정의 핵심이 다 숨어 있다. 그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첫번째 질문: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믿습니까?
두번째 질문: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세번째 질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하십니까?
네번째 질문: 성령님이 마음 속에 계심을 믿습니까?
다섯번째 질문: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여섯번째 질문: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일곱번째 질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이 아닙니까?
여덟번째 질문: 구원받은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아홉번째 질문: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열번째 질문: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한 구원파의 어떤 주장이 성경과 다른가?

(1) 회개의 개념이 다르다.

모든 이단들이 정통교회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기성교인들의 체계나 확신을 뒤흔들어 자기들만의 구원을 주장하는 것처럼 구원파는 이 회개문제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즉 기성교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공격하기 위하여 새벼가다 울고불고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회개란 단어를 구원받은 후에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는 적용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이것이다. 회개란 '돌이킨다'는 말로써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 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회개란 오직 구원을 위해 도리키는 행위로써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현재, 미래,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한데 이미 죄를 또 다시 사해 달라고 울고불고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그런 점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요, 결국 울고불고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백 날을 울고불고 회개하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정죄해버리는 것이 구원파이다.

<비판해 보자>

1) 구원을 위해 필요한 회개란 구체적 죄의 고백이 없어도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실례가 누가복음 23장 강도의 구원이다. 물론 죄인이 되었기에 죄를 짓게된 것이요, 죄는 보고, 죄는 깨달으며, 죄는 고백하나 죄인임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하면 안 된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 그러나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것은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된 것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에 대한 참회하는 마음과 통회자복하는 마음없이 어떻게 죄인임을 알게 되는가? 죄에 대한 의식이 없이는 죄인에 대한 의식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죄를 범하지 않는 죄인도 있는가? 없다. 구원파의 주장은 죄와 죄인의 관계를 잘 모르고 행하는 오직 기성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2) 회개에는 지, 정, 의의 인격적인 요소가 다 포함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을 때 통회자복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이키게 되는 것이 아닌가? 구원파의 사람들은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라는 말만 할 뿐이며, 구체적인 회개의 행위가 무엇인지 대답하는 경우를 본 일이 없으며, 오직 기성교회의 회개의 자세를 부정하려는 데에만 일치점이 있었다. 물론 통회자복하고 눈물을 흘린 그 행위가 죄를 씻는 것은 결코 아니다. 회개를 하면 회개의 행위가 죄를 씻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죄를 씻고, 죄를 사하고, 죄인을 용서히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단지 회개란 죄 때문에 죽어버린 인간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법칙을 뿐이다.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행위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깨달음이 없는 자기 연민의식의 눈물과 슬픔을 회개 착각하는 교인들을 동정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뿐이다.

3) 회개는 한 번만 하는 것으로 회개를 거듭하는 것은 구원이 없는 증거로 보는 점이 비성경적이다.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에 대하여는 별개로 취급하겠다. 일단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의 면만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가 예수를 믿고, 구워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만큼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의 터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하기를 똑같이 바라고 계신다. 그런 점에서 성장을 촉구하며 회개의 터(구원을 위한)를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원리적으로 볼 때 틀림없이 구원의 터를 두 번 닦을 수 없고,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잘못은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여약한 믿음의 사람들이 여러 번 할 수 있다. 성도의 약점을 혼돈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의미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정죄한 곳이 있는가?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는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젖밖에 못먹는 어린 아이를 가르쳐 육신에 속한 자라고 했는데 구원파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도 지옥의 자녀가 되지 않겠는가?(고전 3:1)

4) 구원파는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혼돈하고 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단회적임을 밝혔다. 그러나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이다. 이 말은 성화를 위한 회개와 구원을 위한 회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회개 자체는 둘다 단회적이다. 용서를 받은 사건체는 단회적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회개하라는 말을 제1 단순과거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같은 죄를 계속 범한다는 점에서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성경이 구원파의 말처럼 한 번 사죄 받은 후에도 미래의 죄까지 사함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다면 필자도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상식적으로 보아도 무서운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구원받은 후에는 어떤 죄도 죄가 아니라는 논리가 가능해지고 결국 살인, 간음 등 어떤 죄도 지을 수 있다는 말이요. 실질적으로 그렇게 적용시키는 구원파 교인들이 있다는 점이다. 즉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지으나 그저 그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하늘과 땅처럼 멀지 않은가? 다음의 성구 다섯 개는 분명히 같은 회개란 단어의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임이 입증되는 결정적 성구들이다.

<다섯 개의 핵심 성구를 중심으로>

1) 시편 51편

박씨는 본 51편의 회개 또한 구원을 위한 회개로 보지 않는지 5절의 "내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말을 가지고 다윗이 원죄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어디에 다윗이 그 입으로 직접 자신의 죄를 열거하며 사해주기를 바랬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 물음에 저희는 오늘날 교회가 하나 하나의 죄를 들어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이고 회개는 한 번으로 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하나의 전제로부터 스스로 다음과 같은 모순을 낳게 합니다. 우선 다윗이 회개를 여러 번 했다는 말이 됩니다(본문, 삼하 24:10, 시편 32:5 등) 그러니 다윗은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는 말이요 고로 다윗은 지옥에 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한 내용잍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 소리인가?. 그가 "죄과""죄악" "죄"라고 한 말은 무슨 죄인가? 그리고 14절에서 "피흘린 죄"에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또한 17절에 그가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2) 사무엘 하 24:10

이곳에 나타난 다윗은 회개는 더욱 결정적입니다. 그가 직접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여 사해 주기를 구했습니다. "(인구조사 후에) 내가 이 일을 행함을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구원파의 말대로라면 이미 사함을 받았는데 무엇을 또 사해 달라는 말입니까? 다윗을 또 다시 지옥으로 보내시렵니까?

3) 주기도문 (마태복음 6장)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구원파들은 이 회개도 단회적인 회개로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문제에 봉착 되어 버립니다.

(ㄱ) 이 기도문 전체가 모두 반복되어야 할 기도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만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일용할 양식이 한번만 필요한 것도 아니며,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한번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사함이 기도만은 한번으로 족할 수 있겠습니까?

(ㄴ) 만일 이 회개가 성화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면 구원 또한 유동적일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후에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우리의 죄도 사함받지 못함이니 구원파의 말로하면 지옥에 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ㄷ) 본문은 원어에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죄는 복수로서 자범죄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주어가 복수일 때나, 구체적인 죄에 의해 나타내는 원죄를 말할 때를 제외하고 원죄를 나타날 때 복수로 사용된 경우가 있는가 제시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의 이 회개는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성화를 위한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4) 요한일서 1:8~9

먼저 본문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여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얼핏 보면 구원에 대한 회개를 말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렇게 볼 때 3가지 문제에 봉착됩니다.

(ㄱ) 이 편지의 수신자는 불신자가 아니고 성도들이었습니다. 이 서신에서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은 자들에게 "자녀들아"또는 "아이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지칭하는 호칭들입니다. 성도들에게 또 다시 구원을 위한 회개를 가르친다는 것은 모순된 일입니다.

(ㄴ) 본문에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는데 이 우리란 주어는 1인칭 복수로서 저자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한 번에 족한 회개기도를 또 하려 했고 또 성도들에게 가르쳤다면 사도요한은 지옥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ㄷ) 여기에서 사용된 "죄"란 단어 또한 복수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성화를 위한 회개로서 구체적인 죄에 대한 회개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5) 끝으로 요한계시록의 교회들에 보낸 사도요한의 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회개하라는 말이 12번 나오는데 대부분 구체적인 죄를 하나씩 지적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들은 바로는 이들 구원파는 구체적인 죄의 고백은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다 되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자는 한가지 구체적인 죄의 뉘우침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전인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쭌만 아니라 구체적인 죄에 대해 죄의식이 없이 전인적인 의미에서 죄인이란 의식은 불가능할 것이 아닙니까?

(2) 죄인과 의인의 개념이 다르다.

구원받은 후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마롸 같은 의미로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인임에 틀림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더욱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해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감사 외에 뽐낼 것도 예수님의 공로 외의 자랑할 것도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의인이야, 죄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다"라고 하면 지옥의 자식으로 정죄해 버린다는 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거스리는 사탄적 궤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 편에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여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다가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다.(욥 42:7~9). 사실 참된 의미의 의인이 아니면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없이 참된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성경적 증거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던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죄인 주에 내가 괴수니라 - 딤전 1:15), 13절에서는 자신이 훼방자요, 행악자였음을 과거시제로 밝히고 나서 죄인임을 고백할 때는 현재시제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단자들에게 어떤 성구를 말한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겠는가? 특히 박옥수 씨와 그 수하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과거시제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웃어야 할 것인가?, 울어야 할 것인가?

(3)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다르다.

구원파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묻는다. 아니 그렇게 묻는 것을 즐겨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최대 무기로 사용하는 것 같다. 10년만에 시아버지 장로님을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첫인사가, "아버님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한다. 필자가 아는 어떤 목사님에게 "목사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이제 보니 구원을 못 받으셨군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으세요."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대답을 못하거나 화를 내면 구원받은 자에게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 데 대답을 못할 것이 무엇이며, 더욱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들이 구원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 같은데 그들 편에서 보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여겨야 할텐데 왜 교단이름을 아예 구원파라고 하지 않고, 역사적 정통성도 없이 침례교 이름을 도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그들은 구원의 점진성 같은 것은 아예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구워 받았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상례이다. 이 점을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시켜 비판해 보자.

(ㄱ)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하는 점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구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경이 구원을 확증하라고 할 때(고후 13:5),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좌우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성경은 구원의 확신을 요구하나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확신이 없는 자들을 구원파처럼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한 일이 없다. 그 경우가 위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6:1~2)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주신 말씀을 보게 되면 모순이 생기게 된다.

(ㄴ)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믿음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믿음을 동시에 말한다. 즉 하나님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동싱에 균형있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을 촉구하지만 구원이 인간의 믿음의 대가라거나 인간의 공로라고 말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인 예정을 말한다고 해서(엡 1:4, 2:1) 인간의 의무인 전도나 믿음을 의심하지도 경시하지도 않는다. 분명 믿음으로 얻은 것이 구원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리면 그것도 인간주의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즉(우리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고 하였다. 필자는 구원파의 교리를 구원관과, 교회관과 종말론의 측면에서 정통교회의 교리와 다르다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기독교복음침례례회''예수교복음침례회'란 공식적인 명칭 외에 구원파란 이름이 저들에게 붙여진 것은 그들이 구원에 대한 질문을 핵심으로 정통교인들을 유헉하고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마치 구원에 대한 비밀을 자기들만 알고 있는 것처럼, 또는 좁은 의미의 구원 즉 중생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심지어 자신들만 구원받은 교리인 것처럼 겸손으로 위장한 영적 교만과 오만을 떨기에 정통교회는 그들을 일명 구원파 이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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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직♡주님만을♡
글쓴이 : 맑은웃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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