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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 어머니의 손가락

열국의 어미 2010. 6. 24. 01:23

 

 

 

보고십은 내아들 -- 좋은생각

 

'사랑하는 내 아들 보고 십흔 내 아들 언제나 만나볼까. 외국으로 떠난지 87년도 떠났으니 8년 세월 다 되도록 소식 한장 없소. 전화 한 통이라도 잇슬까 하여 기다리고 보니 어미는 7십고개를 넘었구나. 살기도 많이 살엇다. 엇지하여 생이별을 하게 되엇는지 모든게 어미 타시다. 어디 가 살든지 몸건강하여라.'

10월 2일 오후 5시경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6리 한탄강에서 낚시를 하던 한 사람이 할머니가 숨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숨진 할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손가방에는 '사랑하는 내아들 보고십흔 내 아들'로 시작되는 유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편지지 뒷면에다 깨알같이 쓴 유서의 내용은 멀리 외국으로 떠난 아들을 8년간 그리워하면서 살아온 할머니의 외롭고 고달픈 인생살이를 전하고 있었다.

며칠 뒤 신문에는 이 할머니에 대한 기사가 다시 실렸다.

'꿈에도 잊지 못한 어머니, 못난 아들 하늘에 있어요'라는 제목으로 투신 할머니의 또다른 애절한 사연이 전해졌다. 할머니는 71세의 송혜호 할머니로 밝혀졌고 외국에 간 아들은 8년간 소식을 끊었던 것이 아니라, 노모를 잘 모실려고 리비아 건설 현장으로 갔다가 풍토병으로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난 송 할머니의 외동아들 김승연씨였다. 그때 나이 27세.

송할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아들을 그리워 하다가 자식들에게 마지막까지 조그만 폐도 끼치지 않으려고 손때 묻은 주민등록증, 경로우대증까지 모두 버린 채 유서 한장만을 남기고 늙은 몸을 강물에 던졌던 것이다.

송할머니의 큰 사위인 홍씨는 '너무나도 아들을 보고 싶어 하셔서 차마 죽었다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차라리 알려드릴 것을 그랬습니다.'하면서 회한의 눈물을 쏟았다. (좋은 생각95.11)

 

 

 

전철 계단 손잡이 -- 솔로몬 

 

그날은 정말 추웠다. 어찌나 추워는지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서 있는데 손발에 감각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빨리 전철이 안오나 하고 종종걸음을 치며 기다리고 있는데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계단 손잡이를 잡고서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별 생각 없이 내려다 보고 있는데 앞장 서서 올라오는 그 아이가 할아버지가 잡을 계단 손잡이를 열심히 손으로 문지르고 있는 것이 눈이 띄었다. 처음에는 나는 그 아이가 또래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참 바라보니 장난치고는 아이의 표정과 몸짓이 너무 진지했다.

그래서 찬찬히 그 아이의 행동을 살펴보니 아이는 할아버지가 잡을 계단 손잡이를 자신의 체온으로 녹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벅차 올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책,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 중에서

 

 

 

어머니의 한쪽 눈 -- 솔로몬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했다.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란 어머니가 가슴 졸이며 병원에 달려갔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이미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마디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은 채 우울하게 지냈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수 없이 아팠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그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그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쪽 눈 이식 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다.

그때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가냐며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청년은 붕대를 풀게 되었다.

그런데 붕대를 모두 풀고 앞을 본 순간 청년의 눈에는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앞에는 한쪽 눈만을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네게 나의 장님 몸뚱이가 짐이 될 것 같아서..." 어머니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남편의 사랑 -- 솔로몬

 

서로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하게 된 한 쌍의 연인이 있었다. 남자는 아파트 한 채를 미리 사 두었고,

여자는 아파트 규모에 맞을 만한 가구와 가전제품을 점찍어 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하루 앞침에 형편이 어렵게 되었다.

그 충격으로 여자의 아버지는 쓰러져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었다.

결혼을 한 달여 앞둔 날,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여자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혜원 씨, 사실 아파트는 내 것이 아니에요." 그러자 여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즈르르 흘러내렸다.

"괜찮아요. 전 이제 그집에 채울 살림살이를 하나도 준비할 수 없는 걸요.

"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칸 전세방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남자의 월급은 보통 사람들보다 적었지만 여자는 마냥 행복했다.

일년 뒤 여자의 아버지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해 사업을 일으켰다. 그러자 여자는 조금씩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크고 좋은 가구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남자에게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결혼 전에 남자가 자기를 속였던 사실이 떠올랐고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자는 친정어머니에게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실은 김 서방이 아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털어놓아야겠구나

." 남편은 아무것도 해올 형편이 못 되는 신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상할까 봐 차라리 아파트를 팔아 장인의 빚을 갚았고

매달 월급의 일부를 병원비로 썼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여자는 남편의 깊은 사랑에 행복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불은 누가 빨라구 --- 낮은울타리

 

아내가 어이없는 사고로 우리곁을 떠난지 4년, 지금도 아내의 자리는 너무 크기만 합니다.

스스로 밥 한끼 끓여먹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남편을 두고 떠난 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마는 난 나대로 아이에게 엄마 몫까지 해주지 못한게 늘 가슴 아프기만 합니다

언젠가 출장으로 인해 아이에게 아침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출근준비만 부랴부랴 하다가 새벽부터 집을 나섰던 적이 있었지요,

전날 지어먹은 밥이 밥솥에 조금은 남아있기에 계란찜을 얼른 데워놓고 아직 잠이 덜 깬 아이에게 대강 설명하고 출장지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있나요? 그저 걱정이 되어 몇번이나 전화로 아이의 아침을 챙기느라 제대로 일도 못 본 것 같습니다.

출장을 다녀온 바로 그날 저녁 8시.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이와 간단한 인사를 한 뒤 너무나 피곤한 몸에 아이의 저녁 걱정은 뒤로 한 채 방으로 들어와 양복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침대에 대자로 누웠습니다.

그순간,"푹! 슈-"소리를 내며 빨간 양념국과 손가락만한 라면 가락이 침대와 이불에 퍼질러지느게 아니겠습니까? 펄펄 끓는 컵라면이 이불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는 뒷전으로 하고 자기방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이를 무작정 불러내 옷걸이를 집어들고 아이의 장딴지와 엉덩이를 마구 때렸답니다.

" 왜 아빠를 속상하게 해! 이불은 누가 빨라고 장난을 쳐, 장난을!"다른 때 같으면 그런 말은 안 했을 텐데 긴장해 있었던 탓으로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을 때,아들 녀석의 울음섞인 몇 마디가 나의 매든 손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들의 얘기로는 밥솥에 있던 밥은 아침에 다 먹고, 점심은 유치원에서 먹고, 다시 저녁때가 되어도 아빠가 일찍 오시질 않아 마침 싱크대 서랍에 있던 컵라면을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가스렌지 불을 함부로 켜선 안된다는 아빠의 말이 생각나서 보일러 온도를 목욕으로 누른 후 데워진 물을 컵라면에 붓고, 하나는 자기가 먹고 한개는 출장 다녀온 아빠에게 드리려고 라면이 식을까봐 제 침대 이불속에 넣어두었다고 합니다.

그럼 왜 그런 얘길 안 했냐고 물었더니 제 딴엔 출장다녀온 아빠가 반가운 나머지 깜박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아들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싫어 화장실로 뛰어들어간 저는 수돗물을 크게 틀어놓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한참이나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와서는 우는 아이를 달래 약을 발라주고 잠을 재웠습니다.

라면에 더러워진 침대보와 이불을 치우고 아이방을 열어보니 얼마나 아팠으면 잠자리속에서도 흐느끼지 뭡니까?

정말이지 아내가 떠나고 난 자리는 너무 크기만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는 그저 오랫동안 문에 머리를 박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낮은울타리.99.5 (이재종/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할머니의 초콜릿 -- 권채경

 

그날 현충사 정원의 벤치에는 초가을의 따스한 햇살이 한가롭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고요함을 깨뜨리며 어디선가 확자지껄한 소리가 밀려들더니 '효도관광'이란 플래카드를 허리띠처럼 두른 관광버스에서 노인들이 하나둘 내려서고 있었다.

대부분 칠십이 훨씬 넘어보이는 그 노인들 중에서 한 노부부가 걸음을 옮겨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쭈글쭈글한 피부, 검은 머리칼을 셀 수 있을 만큼 세어버린 은빛 백발. 할아버지의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할머니의 손이 갈퀴발처럼 거칠어 보였다.

"영감, 힘들지 않소?"

"나야 괜찮지만 몸도 편치않은 당신이 따라나선 게 걱정이지"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내 걱정일랑 붙잡아 매시고 당신이나 오래 사슈"할머니는 허리춤을 뒤적여 뭔가를 꺼내들며 말했다.

"자, 눈을 꼭 감고 입이나 크게 벌려 보슈"

"왜?"

"쪼꼬렛 주려고 그러우"

할아버지는 엄마 말 잘듣는 아이처럼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얇은 은박지가 잘 벗겨지지 않는지 할머니는 몇 번 헛손질을 한 뒤에야 겨우 알맹이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할아버지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갑자기 할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야? 이건 쪼꼬렛이 아니잖아?"

"그렇수. 영감. 부디 나보다 오래 사시유"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입속에 넣어준 것은 우황청심환이었다. 할머니의 눈속에 정감이 빛나고 있었다. <빈터를 보면 꽃씨를 심고 싶다> 권채경 엮음.

 

 

 

만남의 소망 -- 낮은울타리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배는 그만 뒤집히려는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안의 사람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중 노인 한사람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를 드리는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느냐고,

그 노인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에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큰 딸은 몇년전에 잃고 지금은 작은 딸을 찾아가고 있는 길입니다.

만약 이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게 되면 작은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만남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군요" 99.6. 낮은 울타리

 

 

 

누가 포도잼 병을 깨뜨렸나? -- 임지혜 

 

작년 여름, 어머니는 집안에 넘쳐나는 포도를 처리한다며 잼을 만드셨다.

무더위속에서 포도를 씻고 끓이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몇시간동안 힘들인끝에 빛깔 고운 포도잼이 완성되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그런데 한참뒤 시장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갑자기 큰소리로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와 다짜고짜 물으셨다.

"아니, 누가 포도잼 병을 깨뜨렸어? 지혜, 네가 그랬니?"

내가 안 그랬다고 하자 이번에는 동생에게 다가가 막무가내로 혼을 내셨다.

"그럼, 네가 그랬지? 엄마가 이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해서 만들었더니 그걸 깨뜨리곤 몰래 휴지통에 버려? 내가 정말 너 때문에..."

어머니는 몹시 화가 나셨다. 그러나 동생은 억울하다는 듯 아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다가,끝끝내 어머니가 믿어주지 않자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우리 집에 오신 이모의 손에 웬 포도잼이 들려 있었다.

"언니, 미안해! 어제 집에 왔었는데 냉장고를 열다가 잘못해서 그만 포도잼병을 깨뜨렸지 뭐유?

말하려고 했는데 아무도 없고, 또 바빠서 그냥 집에 갔지. 대신 오늘 포도잼 사 왔어"

이모의 말에 어머니와 나는 무척 당황했다. 잠시 뒤 포도잼에 얽힌 사연을 들은 이모가 동생에게 미안해 하고 있는데 그때 동생이 막 들어왔다.

동생은 손에 들린 포도잼을 어머니께 내밀면서 말했다.

"엄마, 어젠 죄송했어요. 정말 힘들게 만드신 건데 ... 그래서 새로 포도잼 사왔는데 저 용서해 주실거죠?"

순간 어머니는 동생을 부둥켜 안고 정말정말 미안하다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좋은 생각 99.4.(임지혜님/전남 곡성군 곡성읍)

 

 

가장 중요했던 시험 문제 -- 조안.C. 존스 

 

간호학교에 입학한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강의 대신 간단한 문제가 수록된 시험지를 돌렸다.

수업을 착실하게 들었던 나로서는 별로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항에서 막혔다.

"우리 학교를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아주머니의 이름은?"

이것이 시험문제라고 할 수 있는가! 난 이 아주머니를 여러 번 봤었다.

검정 머리에 키가 크고 나이는 오십대쯤 보였는데 이름은 뭐지?

난 마지막 문제의 답을 공란으로 두고 답안지를 제출했다.

모두 답안지를 제출하고 난 후 한 학생이 마지막 문항도 점수에 반영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물론이지."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간호사로서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여러분의 각별한 주의와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여러분은 항상 이들에게 미소를 보내야 하고, 먼저 미소를 보내야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야 합니다."

지금도 난 그 강의를 절대 잊지 않고 있다. 청소 아주머니의 이름이 도로시였다는 것도. -조안.C. 존스, 내 마음의 생수 61잔, 잭 캔필드. 재클린 밀러 지음/김형곤 옮김, 창현출판사

 

 

 

한 알의 콩 이야기 -- 낮은울타리 91년 10월호에 실렸던 이야기

 

 

알 몇 개를 낡은 편지에 싸 가지고 소중하게 품고 다니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초등학교 3학년인 맏이와 1학년인 막내가 있었는데 불행히도 남편은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지요. 더군다나 죽은 후에 남편이 오히려 가해자로 몰려 어머니와 아들 형제가 그대로 길거리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호의로 헛간 일부를 빌려서 가마니를 깔고, 백열등 한 개, 식탁과 아들 책상을 겸한 사과 궤짝 한 개, 변변찮은 이부자리와 옷가지 약간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이것이 전 재산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생활을 잇기 위하여 아침 여섯 시에 집을 나서서 가까운 빌딩의 청소를 하고 낮에는 학교 급식을 돕고 밤에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등 고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니 집안 일은 자연히 맏이가 맡게 되었지요. 그런 생활이 반 년.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는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잠잘 겨를도 없었으나 생활은 여전히 구차스러웠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냄비에 콩을 잔뜩 안쳐 놓고 집을 나서면서 맏이에게 메모를 써 놓았습니다.

?아가, 냄비에 콩을 안쳐 놓았으니 이것을 조려서 오늘 저녁 반찬으로 하거라. 콩이 물러지면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면 된단다. 엄마가.?

그날도 하루종일 일에 시달려 지쳐 버린 어머니는 오늘은 꼭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남몰래 수면제를 사들고 돌아왔습니다. 두 아이는 가마니 위에서 낡은 이부자리를 덮고 나란히 잠들어 있었는데 맏이의 머리맡에 ?어머님께!?라고 쓰인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가 적어 놓으신 대로 열심히 콩을 삶았어요. 그리고 콩이 물렁해졌을 때 간장을 부었지요.

그래서 저녁식사 때 반찬으로 내 놓았는데 동생이 ?형! 짜서 못 먹겠어?하며 찬밥을 물에 말아서 맨밥만 먹고 잠들어 버렸어요.

어머니, 정말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정말 열심히 콩을 삶았어요.

어머니 부탁합니다. 제가 삶은 콩 한 알만 드셔 보세요. 그리고 내일 저에게 콩 삶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내일 아침 아무리 일러도 좋으니 나가시기 전에 저를 깨워 주시구요. 꼭이요.

어머니 지금 몹시 피곤하시지요? 저는 알아요. 저희들 때문에 고생하신다는 것을….

정말 고맙습니다. 제발 몸조심 하세요. 저 먼저 잡니다. 어머니도 편히 주무세요.?

?아아, 저 어린 것이 이토록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었구나.?

어머니는 아이들 머리 맡에서 맏이가 너무 졸여 짜디짠 콩자반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눈물범벅이 된 채 한 알 또 한 알 먹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젓가락 -- 김형석

 

내가 막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시골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시러 서울에 올라오셨다.

당신께서는 몇 달만에 보는 아들에게 뭔가 사 먹여야 겠다는 생각에 근처 식당에 데려 가셨다.

그곳은 학교 부근 중국집이었는데,아버지께서는중국집이 처음이셨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노친네가 어찌 중국집에 가 본 적이 있었겠는가?

우리는 그 집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먹었는데,짜장면을 한 손으로 비비지 않고 두 손으로 섞는 모습이 영 못 마땅하셨는 지

"사람이 점잖지 못하게 그게 뭐냐?"고 하셨는데 난, "편하면 되지" 하며 고집을 부렸다.

그런 나를 주름진 눈으로 힘없이 가만히 보시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내 나이 일흔을 지나, 그때 내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더 늙은 아버지가 되어 보니 내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그립다.

'그때 거기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이 비합리적 아니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렇게 한다고 대단한 큰 일이 일어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요즘 와서 아버지의 그 슬픈 눈이 자꾸만 떠 오른다. - 김형석 교수의 회고록 중에서

 

 

할아버지의 컵라면 -- 솔로몬

 

얼마 전 학원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다가 지저분한 파카를 입고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사발면 두 개가 든 비닐 봉지를 들고 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얼른 할아버지를 피해 학원으로 들어갔다.

한 이십 분쯤 지났을까. 친구와 커피를 마시려고 다시 밖으로 나갔더니 학원 앞 병원 계단에서 조금 전에 보았던 할아버지가 사발면을 드시고 계셨다.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너무 안돼 보였다. 그때 한 젊은 아저씨가 씩씩거리며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아마도 병원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인 듯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라면을 먹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로 차며 "야,저리로 가. 저리로 가란 말야" 하고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아저씨의 발길질에 밀려 라면국물이 조금씩 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그 아저씨에게 왜 그러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비겁하게도 나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강의실에 들어와서도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대항하지 못한 내 자신이 싫었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고 있는 현실이 싫었다.

기어이 나는 수업을 마치기도 전에 가방을 챙겨 학원을 나왔다. 그런데 아까 그 할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계단에는 미처 다 먹지 못한 사발면 그릇이 엎어져 있었다.

난 과연 무엇을 위해 배우는 것일까.  

 

 

어머니

 

눈이 수북히 쌓이도록 내린 어느 겨울날, 강원도 깊은 골짜기를 두 사람이 찾았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한 사람은 미국 사람이었고, 젊은 청년은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눈속을 빠져나가며 한참 골짜기를 더듬어 들어간 두사람이 마침내 한 무덤앞에 섰습니다.

"이곳이 네 어머니가 묻힌 곳이란다"

나이 많은 미국인이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한 미국 병사가 강원도 깊은 골짜기로 후퇴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아이 울음소리였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소리는 눈구덩이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눈에서 꺼내기 위해 눈을 치우던 미국병사는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습니다.

또 한번 놀란것은 흰눈 속에 파묻혀 있는 어머니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는사실이었습니다.

피난을 가던 어머니가 깊은 골짜기에 갇히게 되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아이를 감싸곤 허리를 꾸부려 아이를 끌어 않은 채 얼어 죽고만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한 미군병사는 언땅을 파 어머니를 묻고, 어머니 품에서 울어대던 갓난아이를 데리고가 자기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자 지난달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하고, 그때 언땅에 묻었던 청년의 어머니 산소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청년이 눈이 수북히 쌓인 무덤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무릎아래 눈을 녹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만에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알몸이 되었습니다. 청년은 무덤 위에 쌓인 눈을 두손으로 정성스레 모두 치워냈습니다.

그런뒤 청년은 자기가 벗은 옷으로 무덤을 덮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께 옷을 입혀 드리듯 청년은 어머니의 무덤을 모두 자기 옷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위에 쓰러져 통곡을 합니다.

"어머니, 그 날 얼마나 추우셨어요.!"

 

 

유럽을 울려버린 적군장교와 60년 못다한 사랑 김현(1999년 3월 16일 화요일)

 

유럽을 울려버린 적군장교와 60년 못다한 사랑 사랑이 아름다울수록 운명은 혹독한가.

60여년의 기다림 끝의 짧은 만남. 그리고 영원한 이별. 지난달 80세로 세상을 떠난 한 그리스 할머니가 온 유럽인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안겔리키 스트라티고우. 이 할머니는 아모레 셈프레 (영원한 사랑) 라는 이탈리아어로 끝나는 두통의 엽서를 가슴에 끌어안고 숨을 거뒀다.

할머니가 숨지기 직전 몇분 동안 한 말은 "티 아스페토 콘 그란데 아모레 (난 위대한 사랑을 안고 그대를 기다렸어요) ." 시간은 1941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의 이탈리아군 소위 루이지 수라체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북부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파트라이로 파견된다. 행군을 하던 루이지는 집 앞에 앉아 있던 안겔리키 스트라티고우에게 길을 묻는다.

처녀는 크고 검은 눈이 매력적이었다.

청년은 의젓하며 정이 많은 장교. 둘은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길을 가르쳐준 처녀가 굶주림에 지쳐 있음을 눈치채고 갖고 있던 전투식량을 나눠줬다. 루이지는 사흘이 멀다 하고 먹을 것을 들고 그녀의 집을 찾았다.

루이지는 그리스말을, 안겔리키는 이탈리아말을 배웠다.

짧았던 행복. 그러나 이 행복은 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면서 끝난다.

급거 귀국해야 했던 루이지는 안겔리키를 찾아 손을 한번 잡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적군 장교와 사귀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볼까 두려워한 그녀는 끝내 거절했다. 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전쟁이 끝나면 결혼해달라" 는 루이지의 청혼에 대해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끝난 후 루이지는 고향인 이탈리아 남부 렉지오 칼라브리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루이지는 안겔리키에게 계속 편지를 띄웠다. 당시 그녀는 고모집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조카가 적군과 연애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고모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 없애버렸다. 메아리 없는 편지를 계속 보내던 루이지는 천일째 되던 날 드디어 그녀를 잊기로 결심했다.

루이지는 곧 결혼을 했다.

아들 하나를 둔 평범한 삶이 계속됐다.

그러나 부인이 96년 세상을 떠나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그의 가슴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파트라이의 시장에게 사연을 담은 편지를 냈고, 시장은 현지 스카이 방송사 기자들의 도움을 얻어 아직도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안겔리키를 찾아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 소식을 들은 안겔리키의 첫 마디였다.

안겔리키의 연락을 받은 루이지는 얼굴을 가리고 한없이 울었다. 그녀가 56년 전의 결혼약속을 여전히 믿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의 성밸런타인데이에 둘의 감격어린 재회가 이뤄졌다.

파트라이를 방문한 루이지는 또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청혼했고 안겔리키는 벅찬가슴으로 받아들였다.

루이지는 77세, 안겔리키는 79세였다.

1년의 절반씩을 각각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지내기로 한 루이지와 안겔리키의 달콤한 계획은 안겔리키가 앓아누운 끝에 훌쩍 하늘나라로 떠나면서 꿈이 돼버렸다.

사망일은 1월 23일로 예정됐던 결혼식을 2주일 앞둔 9일이었다.

루이지는 아직도 그녀의 죽음을 모르고 있다.

그 자신이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고, 주변에서 비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식도 연기된 것으로 안다. 지금도 그는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펜을 들어 영원한 사랑 으로 끝나는 엽서를 쓴다.  엽서는 그녀의 무덤 앞에 쌓이고 있다.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 솔로몬

 

세 친구는 정말 친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말이 없는대신 다른 두 친구들이 정말 힘들때면 어김없이 와서 도와주는 친구였습니다.

다른 한 명은 말도 많고 외성적이고 하지만 마음은 두 친구들을 사랑했습니다.

마지막 한 명은 평범했지만세 명중에서 가장 마음이 따뜻했고 나머지 두 친구들을 자기보다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평범한 친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친구는 다 제쳤놓고 영안실로 달려갔습니다.

말많은 친구는 평범한 친구의 관을 보자 어느 누구보다 서럽게 울었습니다.

마치 자기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슬프게 울었습니다.

말없는 친구는 그냥 덤덤히 서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소곤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친하다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냐고...정말 저 슬피 우는 친구가 친구답다고.

거의 1시간동안 말많은 친구는 실신할 정도로 울었고 말없는 친구는 계속 서있기만 했습니다.

둘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말없는 친구가 "요기라도 하려 가자."

둘이서 식당으로 향할 때 말없는 친구가 약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말많은 친구는 어디가 아픈가 하고 같이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말없는 친구의 두 손바닥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손을 꽉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뚫은 것이었습니다.

피는 손바닥뿐만 아니라 팔에 흘려 온통 피투성이었습니다.

그가 흘린 것은 눈물이 아니라 핏물이었습니다.

너무 슬프면 눈물이 아니라 핏물이 흐른답니다.

 

 

 

할아버지의 유품 -- 김용택

 

벚꽃이 지던 그날,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하얀 봉투를 발견하곤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부모님이 이혼하는 바람에 나와 내 동생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할아버지가 국수를 뽑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생활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돈도 벌 수 있는 산업체 야간학교를 택했다.

학교에 입학하여 첫 월급을 타던 날,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봉투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대견하시다며 연신 눈물을 찍어 내셨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천 원짜리 육십 장을 천천히 세어본 뒤,

귀가 접힌 돈과 앞뒤가 뒤집힌 돈을 차례차례 귀를 펴고 맞춰서 툭툭 다독이셨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리던지 할아버지 앞에서 한 달 용돈을 기다리던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애가 고생하면서 번 돈이니 마음대로 쓰라고 하셨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호되게 야단치고 달랑 천 원짜리 세 장을 내미셨다.

나는 속으로 '내 돈인데...'하며 뾰로통해졌다.

월급봉투를 서랍에 집어넣는 할아버지가 너무 야속해서 그날 밤 나는 그대로 회사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매번 할아버지 앞에서 삼 천원을 타기 위해 기다린 지루함이 먼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책상 서랍 한쪽에서 가지런히 귀가 맞추어진 지폐 몇 장이 든 돈봉투와 스물일곱 장의 월급봉투,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번도 '수고했다'는 말씀이 없었던 할아버지셨지만 월급 봉투 한 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깨끗이 보관한 것으로 보아 나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

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이름 석 자가 또렷이 박힌 월급봉투를 안고 나는 한참이나 울었다. <행복수첩>, 김용택 엮음, 좋은생각 

 

 

아내의 사랑

 

인적이 드문 이른 새벽 거리에서 큰 가방을 든 두 남녀가 택시를 세웠다.

"아저씨, 여기서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가 주세요."

사십대 초반쯤 돼 보이는 여자의 말에 경철 씨는 백미러로 그들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여보 지금 당장 당신을 집으로 모셔갈 수 없어 정말 미안해요."

"이해하오. 꼭 오 년 만이구료. 아이들은 많이 자랐겠지?

"네. 나리와 경민이가 중학생이 됐어요. 여보, 아이들이 좀더 자라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만 기다리기로 해요..."

"알겠소. 내 이제부터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리다. 뭐든 말만 하시오."

남편이 아내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미국에서 오 년 동안 계셨던 거에요. 우선 따뜻한 물로 목욕한 뒤 푹 주무세요. 그 사이 제가 나가서 당신이 갈아 입을 옷을 사 오겠어요. 그런 다음 편하게 식사를 하고 아이들의 선물을 사서 저와 함께 집으로 가면 돼요."

그러자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제서야 경철 씨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알 게 되었다.

작은 식료품 가게에서 잠깐 차를 세운 경철 씨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두부를 한 모 사서 차 안에 있는 그 부부에게 내밀었다.

"잠시 차를 세워둘 테니 이것 좀 드슈."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그들을 차 안에 남겨둔 채 한참을 밖에서 서성거리던 경철씨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몇 년 전 천안 교도소 앞에서 두부를 가져와 기다리고 있던 죽은 아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좋은생각 편집부)

 

 

 

더러운 아이 -- 좋은생각

 

검게 그을린 얼굴에 여드름 투성이인 그 친구는 늘 외톨이었다.

옷도 유행에 뒤쳐진 단벌뿐인 그에게서 나는 역겨운 냄새를 아이들은 무척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그를 구박하고 메스꺼운 표정을 지으며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냈다.

그래도 항상 밝은 얼굴로 나를 대하던 그는 지각이 잦아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더러운 놈, 냄새풍기지 말고 아무도 없을 때 좀 일찍일찍 다니면 안 되냐?"고 면박을 주었다.

뉴스에서 불볕더위라는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어느 날이었다.

여름방학이었지만 고입시험을 앞둔 우리는 보충수업을 받았는데 그날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 나는 허둥지둥 엄마 차를 얻어타고 학교 근처에 내려서 학교를 향해 언덕길을 뛰어 올랐다.

헉헉거리며 급히 뛰어가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뒤에는 내 또래의 한 아이가 냄새나는 수레를 묵묵히 밀고 있었다.

"또 지각이잖아. 그만 가래도" "아니에요. 십오분밖에 안 늦었어요.마저 끝내놓고 가도 괜찮아요"

그순간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바로 냄새나는 아이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본 그가 멋쩍은 듯 말했다."우리 아버지야" 그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계속해서 수레를 밀었다.

그날 나는 지각한 벌로 매를 맞았는데도 왠지 흐뭇했다.

그뒤로 나는 그의 냄새를 싫어하지 않았다.아마 앞으로 냄새나는 그 아이의 미소를 잊지 못할 것이다.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 되었지만 그 친구는 지금도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며 살고 있으리라. <좋은 생각.98.1>

 

 

사랑하는 내 아들아 보고 싶구나. -- 솔로몬

 

저는 9살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별하시고 저는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형편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직장을 나가게 되었지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저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어머니는 점차 병이 들어가시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 호되게 혼이 난 다음 집을 나오고 말았어요. 물론 학교도 가지 않았구요.

집을 나와 친구네서 신세를 졌지만 신세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는 못 있겠더라구요.

배도 고프고 집생각도 났지만 집에 들어가긴 싫었어요. 그러다가 주유소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일은 너무나 힘들었고,냉정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기심에 술도 마시게 되었고, 담배도 피우게 되었어요.

그러기를 한두 달, 벌써 5개월이란 시간이 지나게 되었지요.

저는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서 집에 전화를 했지요. 아무도 받지 않더라구요. 몇번 더 전화를 더 걸었지만 마찬가지였어요.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더군요.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이모에게 전화를 받는 순간 전 너무 당황했고 나의 몸에 싸늘히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북받쳐 올라오는 눈물로 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답니다.

일주일전 어머니가 악성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강례도 이미 치러졌구요.

어머니가 남기신 것은 사진과 일기장, 그리고 제가 가장 갖고 싶어하던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시고 가셨어요.

어머니의 일기장을 보며 장마비같은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나왔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보고싶구나..."

저는 속으로 말했죠.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시간이 뒤로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매해마다 어머니의 산소를 돌보며 지난 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답니다.

한순간의 방황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저버리시 않으시길 바랍니다.

 

 

도시락의 비밀.. -- 솔로몬

 

가끔식 머리카락이 섞인 도시락밥을 먹는 중학생이 있었다.게다가 심심찮게 모래까지 깨물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학생은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있으면 다소곳이 그것을 가려내고 모래가 씹히면 조용히 그것을 뱉어낼 뿐이었다.

어떤 때는 머리카락과 돌을 그냥 넘겨 삼키는 바람에 한동안 목이 메이기도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교실의 다른 아이들은 그 학생을 안쓰럽게 여기면서 위생이 철저하지 못한 학생의 어머니를 비난했다.

어쩌면 계모일지 모른다고까지 생각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교실에는 그 학생과 매우 다정하게 지내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하지만 친구도 그 학생의 집을 몰랐다. 그 학생은 친구에게 한 번도 자기집을 구경시켜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심이 많은 친구는 '아마도 가난해서 그런 걸거야'하고 구태여 조르지 않았다.

그러다 졸업을 앞두고 두 친구가 헤어져야 할 상황이 되자 그 학생은 친구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친구는 이제야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학생의 뒤를 따라갔다. 언덕길을 한참 오르자 벽이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금이 간 허술한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은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 친구와 함께 왔어요!"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그러자 어두운 방안에서 그의 어머니가 더듬거면서 밖으로 나왔다."네 얘기 참 많이 들었다. 정말 고맙구나!"

학생의 어머니는 앞을 못보는 맹인이었던 것이다.

 

 

노점상 할아버지의 도시락 -- 임옥례

 

우리 회사 앞 양쪽 보도 블록에 죽 늘어선 노점상에는 항상 사람들이 제각기 분주하게 일하고 있다.

구두 수선집, 튀김 가게, 신문 가게 등 온종일 조그만 네모 상자 안에서 일하는 그분들을 지나칠 때 마다 나는 삶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곤 한다.

그중 일흔이 훨씬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돗 자리를 펼쳐 놓고 손톱깍기, 가위, 도장집, 돋보기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잡동사니들을 팔고 있다.

할아버지는 손님을 기다리면서 깜빡깜빡 조릭도 하고, 이따금씩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향해 연기를 내뿜곤 하셨다.

그리고 점심은 라면으로 때우실 때가 많았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살 때도 많았다.

그런데 그날 일찍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다가 할아버지 앞을 지나치다 보니 할아버지가 다른 때와 달리 도시락을 드시고 있었다.

웬일일까 궁금했지만 우선은 라면보다 밥을 드신다는 사실에 적이 안심이 되었다.

나는 곧 건물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마침 그 안에는 아가씨 둘이 타고 있었는데 한 아가씨가 친구에게 무엇인가 캐묻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 갔다 오는데 말하기 그렇게 어려운거야?

"응. 그냥 저기..."

"말을 안하니까 더 궁금하다 어디 다녀오는데? 말 좀 해봐."

"요 앞에 장사하는 할아버지한테. 며칠째 계속 라면만 드시기에 아침에 내 도시락 싸면서 하나 더 싸가지고 왔거든. 그걸 갖다 드리고 오는 길이야."

부드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아가씨의 말에는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임옥례님/서울 중구 서소문동)  

 

 

노부부의 사랑 -- 이숙영

 

부부 금실이 좋기로 유명한 노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위해 주며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에 치료를 다니면서부터 할머니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약 가져와라." "여기요."

"물은?" "여기요."

"아니 , 뜨거운 물로 어떻게 약을 먹어?'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물컵을 엎어 버렸다

그래서 할머니가 다시 물을 떠 왔더니, "아니 그렇다고 찬물을 가져오면 어떡해?' 하면서 물을 또 엎었다.

손님들이 찾아오자, 할아버지는 먹을 거 안 가져온다고 소리쳤다.

'당신이 하도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저도 지금 정신이 벙벙해서 그만 ..."

"이기 , 어디서 말대답이고?'

"손님들 계신데 너무 하시네요.

할머니는 결국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갔다.

보다 못한 손님 중의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르신네, 왜 그렇게 사모님을 못살게 구세요"

그러자 한참동안 아무 말도 안 하던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 할망구가 마음이 여려서 나죽고 나면 어떻게 살지 걱정이 돼서‥‥‥ "

할아버지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얼마 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무덤가 한 켠에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일 중독 사랑 중독>, 이숙영 외. 문학수첩.-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몇 년 전 몹시 무덥던 날 전철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 안이라 응급조치를 취할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주위 사람들고 괜찮으냐고 걱정을 해 주는 것이 고작일 따름이었다.

아주머니가 약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마실 물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전철은 역에 도착했다.

바로 그 순간 20세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꽁지에 불붙은 토끼처럼 튀어나가더니 전철이 출발하는 벨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캔 주스를 하나 들고 전철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아주머니, 이것으로 약을 드세요."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역이 내려야 할 역인 듯 그 아가씨는 다시 잽싸게 내렸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승객 모두는 어안이 벙벙해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아가씨가 내리고 나자 잠시 후 아주머니도 고통에서 벗어났다. 요즘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다고 하지만 그런 기특한 아가씨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내 딸도 그 아가씨처럼 성장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빌었다. 그 광경은 언제까지고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 중에서

 

 

어머니의 손가락

 

내가 결혼전 간호사로 일할때의 일이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에 이른 시간이었음에도25살 남짓 되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병원문앞에 서있었다. 아마도 모녀인듯 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 아주머니..아직 진료 시작 될려면 좀 있어야 하는데요.. 선생님도 아직 안오셨구요.. "

" ..... "

" ..... "

내 말에 두 모녀가 기다리겠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마주 보았다.업무 시작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두 모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채 작은 소리로 얘기를 주고 받기도 했고..엄마가 딸의 손을 쓰다듬으면서 긴장된..그러나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위로하고 있었다.잠시 후 원장선생님이 오시고..나는 두 모녀를 진료실로 안내했다.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얘..얘가...제 딸아이예요...예..옛날에..그니까..초등학교 들어가기전에..외가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렸어요.. .....

다행이 네손가락은 접합수술에 성공했지만...근데....네...네번째 손가락만은 그러질 못했네요.......

다음달에 우리딸이 시집을 가게 됐어요..사위될 녀석...그래도 괜찮다고 하지만...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이 못난 에미.....보잘것 없고 어린 마음에 상처 많이 줬지만..그래도 결혼반지 끼울 손가락 주고 싶은게..이 못난 에미 바램이예요..

그래서 말인데....늙고 못생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으로 접합수술이 가능한지........ "

그 순간 딸도 나도 그리고 원장선생님도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원장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채.." 그럼요..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 할수 있습니다. "라고 했고..그말을 들은 두 모녀와 나도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출처: 예화 500 제1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