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방

[스크랩] 알파토크1-6

열국의 어미 2008. 6. 25. 18:37

알파 토크1/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우리가 집을 지을때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 자체가 안전합니다.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확실히 잡혀 있지 않으면 어떤 발전이나 성과, 업적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인생에는 모든 일에 기초가 필요하다. 집을 지을 때 뿐이 아니라 회사에 입사해서도 그 회사의 기본적인 것부터 배운다. 학문에서도 기초 학문이 대단히 중요하다. 과학도 기초과학이 중요하다. 건물이 올라갈 때에 기초가 튼튼한 만큼 견고한 만큼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우리 신앙생활을 더 힘차게 능력있고 활력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신앙의 근간이요 기본이요 기초가 뭔지 배워야 한다. 우리들의 신앙의 기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신앙의 기초가 튼튼하면 그 신앙은 얼마든지 앞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신앙 기초가 잘못 놓이면 신앙은 파산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예수님을 분명히 알아 가는 은혜를 받아 누리기 바란다.



1.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공산국가인  구소련의 사전에는 예수님은 ‘결코 존재하지 않은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 설명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인데, 이 종교를 믿게 되면 자기들의 신조인 공산주의가 무너질 수 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 인물이 아닌 것처럼 꾸며놓은 것이다.


1) (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 신약성경 밖의 증거들/ 예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는 대단히 많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의 여러 가지 저술 심지어는 비기독교 자료에서도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 예를 들어

*로마 역사가 타시투스나 수에토니우스:그들의 기록에 보면 간접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존재에대해 인정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예수라 하는 한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여 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가 다시 사실 것과 그 밖의 수많은 기적들을 예언한 바와 같이, 그가 죽은지 사흘 째 되는 날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의 이름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2) (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  신약성서 상의 증거/ 신약성서에 나타난 증거들은 대단히 확실하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F.F. Bruce (그는 맨체스터 대학의 성경비평과 성서해석학 교수였고 지금은 소천함)는 그의 책 <신약성서의 기록은 믿을만한가?>에서 다른 역사적인 책들과 원전을 비교함으로 신약성서가 얼마나 풍부한 원고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했다. 

여러분의 책 23 쪽 (혹은 학습자용 교재 8 쪽)의 도표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그 도표를 보면서 이 토크를 계속듣기 바란다.


F. F. Bruce 교수

#캐사르의 갤릭 전쟁에 관한 9 혹은 10개의 사본이 현존하고 있고,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이 케사르 시대보다 무려 약 900년 후에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리비의 <로마의 역사>의 경우 20여개의 사본밖에 없고, 가장 일찍 쓰여진 사본은 AD 900년 경의 것이다.

#타시투스의 14권의 역사책은 20개의 사본이 남아있을 뿐.

#투시디데스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약 AD 900년의 것인 8개의 원고로만 알려져 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큰 시간 간격과 비교적 적은 원고의 수에도 불구하고, 이 저서들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고전 학자들은 없다.

#신약 성서에의 경우 우리는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

  (1) 신약의 기록 연대/  AD 40 - 100 사이에 기록됨

  (2) AD 350년에 쓰여진 신약전체의 완전한 원고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300년의 기간 간격 뿐임)

                         신약의 내용을 거의 다 포함하고 있는 3세기의 파피루스

  (3) AD 13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복음의 일부가 있다.

  (4) 또한 사본의 숫자를 살펴보면, 헬라어(희랍어/그리스어)의 원고가 무려 5,000개 이상이나 되고

                                  라틴어 원고가 10,000개 이상

                                   9300개 이상의 원고가 다른 언어로 쓰여진 원고들이다.


   (5) 초대 교부들의 글 속에 36,000개 이상의 인용구절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원전 연구가의 한 사람인 호트는 말하기를, “신약성경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증거들의 다양함과 풍부함에 있어서 고대 산문 기록 중의 독보적인 존재다.”


F. F. 브루스는 이 분야의 권위자인 프레드릭 케니언 경의 말을 인용하여 그 증거를 요약했다.

“그렇다면 원래 글이 쓰여진 시기와 그 글이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증거 사이의 간격은 아주 작은 것이므로 사실상 무시할만하다. 그러므로 셩경이 원래 쓰여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졌는가에 대한 의심의 마지막 근거도 이제는 없어졌다. 신약성서의 신뢰성과 완전무결함은 마침내 증명되었다고 해도 좋다.”


이렇게 신약성경과 그밖의 증거로부터 예수님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렇다면 예수 그분은 과연 누구인가?



2. 예수님은 누구인가 ?.


A.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었다.


   1. 사람의 몸을 갖고 있었다


      1) 피곤함을 느끼셨다.

* 요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 요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2) 배고프심

*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개역개정판 마 4장)


   2.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셨다.

      1) 분노를 느끼심

* 막11: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개역개정판 막 11장)


      2) 사랑하심

*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            르라 하시니 (개역개정판 막 10장)


      3) 슬퍼하심

* 요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             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개역개정판 요 11장)


  3. 인간의 경험을 했다.

      1)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심,  2) 지혜를 배우시고,   3) 일하셨고,    4) 부모에게 순종하심





문제 제기/

많은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여기까지만 언급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서 예수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대한 종교지도자로 이야기한다. 또한 위대한 도덕적 선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단지 위대한 종교지도자이며, 도덕적 선생의 모습이 그분의 모든 모습이겠는가? 그분에게 더 보여줄 만한 다른 모습과 증거가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뭐라고 하셨나?


A. 자신에 대한 가르침/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셨다

예수님의 매력 중의 하나는 그의 가르침의 많은 부분이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14:6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반드시 나를 통해야 하고, 나에게 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만날 수도 없다.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라는 말이다.

“나는 .... 이다”


1. 나는 곧 생명의 떡이다(요6:35).

세상은 온통 굶주려 있다.  20세기 초의 심리학자였던 지그문드 프로이드는 사람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다고 갈파했고, 그의 제자였던 칼 융은 사람들은 안전함에 굶주려있고, 애들러라는 심리학자는 중요성에 굶주려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니 너의 허기진 굶주림을 채우고 싶다면 내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철학의 굶주림도, 심리학의 굶주림도, 경제와 정치의 굶주림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2.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

온통 세상이 어두워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둠과 우울함과 환멸, 절망 속에서 걷고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다. 방황하고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많은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어느 사람은 비행기 타고 가다가 고소 공포증에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이분은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 한번은 자기 친정 어머님이 한국에 살다가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친정부모가 죽었어도 고공 공포증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친정 엄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11:25-26).


4. 나는 쉼터고 피난처고 안식처다 (마11:28,29)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과 근심과 공포와 죄의식으로 어깨가 무겁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5. 나를 따르라 (막1:17)

사람들은 자기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막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6. 나를 영접하라 (마10:40)

예수님은 자기를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다.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7.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 (요14:9)

* 요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화) 어떤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엄마가 무얼 그리고 있느냐고 물음. 아이는 “하나님을 그리고 있어요.” 엄마가 “바보같은 소리. 하나님을 그릴 순 없어.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자 아이가 대답했다. ‘음, 그러나 내가 그림을 다 그리면 알게 되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하나님을 보고 싶으냐? 그러면 나를 보라.


8. 인간의 최고의 사랑을 요청하심 (마10:37, 눅14:26)

* 마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            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B. 예수에 대한 간접적인 주장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주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1. 사람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예수님이 자신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주장하신 것은 잘 알려져있다.  그 좋은 예가 막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하신 말씀이다.

막2:5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은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는거야?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어.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였다.


예수님은 중풍에 걸린 사람을 고치심으로 자신에게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이 주장은 사실 충격적인 것이었다.


죄용서와 관련해서 영국의 학자요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C. S. 루이스의 말을 들어보자. <단순한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주장들 중에 우리의 시선을 끌지 못한 채 지나가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죄를 용서한다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신다는 주장이다. 만약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것은 너무도 터무니가 없어서 우스울 정도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의 입에서 나온 이 말들은 역사상 어느 인물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사기이며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2. 예수님의 특이한 주장/ 그가 언젠가는 세상을 심판하시겠다 (마25:31, 32, 40, 45)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예수님은 심판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심판의 기준이 되실 것이다. 즉 심판의 날 우라가 어떻게 될지는 우리가 지금 살아서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에 달려있다.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저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C. 그분의 직접적인 주장

1. 메시아 되심 (막14:61-64)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렇다... 내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은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대제사장은 분이 나서 자신의 옷을 찢었다. “여러분도 저 사람의 모독적인 말을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막14:61-64).


2. 하나님의 아들 되심 (막14:61)

*막14: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           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           가 보리라 하시니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하게 된 것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즉 하나님이라는 것 때문에 신성모독의 죄로 인해 죽게 된 것이다. 자신이 신이라는 것과 다름없는 주장은 유대인들의 눈에는 죽어 마땅한 신성모독의 죄였다.


한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하자 예수님이 물으셨다. “무엇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그를 돌로 치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 요10:31-33에 보면,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      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 성자 하나님 (요8:58)

* 요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4. 도마의 신앙고백 (요20:28)

*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때에 우리 예수님은 그를 돌아보면서 ‘아니, 아니,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도마를 향하여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고 하시며 늦게야 핵심을 깨닫는 도마를 나무라셨다.


5. 예수님의 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10:33)

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           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만약에 누군가가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주장한 것처럼 주장을 하고 있다면 그는 시험을 받아봐야 한다. 갖가지 사람들이 갖가지 주장을 해왔다. 누군가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가 옳다고 할 수 없다.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일부는 정신병원에 있다. 그들은 자신을 나폴레옹이나 교황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각기 내가 누구 누구라고 했을 때 어떻게 그들의 주장을 시험해 볼 수 있을까?

예수님의 경우,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다. 여기에는 3 가지 논리적인 가능성이 있다.


1) 첫 번째 가능성은 / 그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야바위꾼이며 사악한 사기꾼이다.

2) 두 번째 가능성은 / 그가 환상에 사로잡혔거나 실제로 미친 사람이다.

3) 세 번째 가능성은 / 그가 한 말은 사실이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C.S 루이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그의 일생을 두고 우리는 그를 위대한 도덕군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대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해야 한다. 적당한 도덕군자라는 말은 예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가 말한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반대로 미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을 그의 말씀대로 다 믿든지 아니면 전부 부정해야지 중간노선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단지 성인, 도덕군자, 기독교의 창시자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4. 그분이 말한 것을 지지하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위에서 논의한 대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평가 3가지 가능성(사기꾼, 미친사람, 하나님의 아들)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를 평가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분의 생애에 대한 증거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A. 예수님의 가르침/


* 산상수훈/ (마5:5-7)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입술에서 떨어진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산상수훈을 좋아합니다. 내 생활신조이죠.”


미국 신학교수인 버나드 램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그의 가르침들이 더 많이 읽혀지고, 더 많이 인용되고,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많이 믿어지고, 더 많이 번역되는 것은 사람이 한 말 중 가장 위대하기 때문이다. .... 다른 어떤 사람의 말도 예수의 말 만큼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사람도 이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들에 대해 예수처럼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 그런 말씀이었고 대답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모든 서구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서구의 많은 법 조항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사람들이 더 빨리 이동하고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2000년이 지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더 좋은 것을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가르침이 정말 사기꾼이나 미친 사람의 것일 수 있을까?


B. 그분이 하신 일/

* 요한복음 10:37,38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      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기적들은 그것만으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10:38)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함께 있기에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지루하지 않았다.

- 그는 어떤 결혼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 한 아이의 도시락을 받아 수천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으로 늘리셨다.

- 그에게는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서 바람과 파도에게 명령하여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다.

- 그는 사람들을 치료하셨다.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듣고 말하게 하셨고,

   중풍에 걸린 사람은 걷게 하셨다. 그가 환자들이 있는 곳을 방문했을 때는 38년된 병자가 자기 자리를 거둬     들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악한 세력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다. 때로 그는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려내기도 하셨다.

그의 행동이 그토록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행한 기적 때문만은 아니셨다. 그것은 그의 사랑, 특히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나병환자들, 창녀와 세리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며, 그러한 사랑은 그가 한 모든 일의 원동력이었다. 그 사랑의 정점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괴롭히고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는 말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눅23:34).  확실히 이것은 악하거나 미친 사람의 행동은 아니었다. 


C. 그분의 특성/


* 그분이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심

고대 세계에는 예언이라는 미래를 예측하는 다양한 수단들이 있었다. 그러나 희랍과 라틴의 문학 전반을 통털어봐도 그들이 비록 예언자와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먼 미래에 이루어질 위대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예언도, 인류를 위해 올 구원자에 대한 예언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마호메트교에서는 마호메트가 탄생하기 수백년 전에 그가 올 것을 예언한 글귀를 짚어볼 수가 없다. 또한 이 나라에 있는 어떤 신흥종교의 창시자들도 그들이 나타날 것을 명확하게 예언하고 있는 고대의 문서를 정확하게 골라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300개가 넘는 예언을 이루셨으며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각기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의해 선포된 예언들) 그중에 29개의 중요한 예언들을 하루에 -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날에 - 이루셨다. 이 예언의 궁극적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아주 똑똑한 사기꾼이어서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보이려고 일부러 이 예언들이 이루어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의 문제점은 그 예언들의 숫자만으로도 그 일은 엄청나게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로, 인간적으로 말해 그는 그 사건들 중 많은 일들에 대해 아무런 통제력을 가지지 못했다. 예를 들면, 그가 정확히 어떻게 죽으리라는 것과(사53장), 그가 묻힐 장소와 심지어 태어날 장소까지(미가5:2) 구약에 예언이 되어 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예언들을 완성하기를 원했던 사기꾼이라고 하면 그가 태어났어야 하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었을 것이다.



D. 그분의 부활하심/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사건은 기독교의 주춧돌이다. 그러나 그 일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무엇일까? 4가지로 살펴본다.


1. 그는 원래 무덤에 들어가 계시지 않았다는 설

부활의 날 아침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없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많은 이론들이 나왔다. 그 중 설득력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1) 예수님은 십자가 위해서 죽지 않았고 잠시 기절해 있었다는 주장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졌을 때 아직 살아있었으며, 나중에 회복되었다고 주장

 반론/ 예수님은 로마의 채찍형을 당하셨고, 십자가에서 6시간이나 매달려 계셨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설령 살았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무련 1.5톤이나 되는 무거운 돌을 치울 수 있었겠는가? 병사들은 예수가 죽은 것을 확인까지 했다. 더구나 어떤 병사는 예수님이 이미 돌아가신 것을 보고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고, 그때에 피와 불이 나왔다고 했다. 이것은 응혈과 혈청의 분리인데 이것은 의학적으로 사람이 죽었다는 강력한 증거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2)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설

제자들이 시체를 훔치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소문을 퍼뜨렸다는 설

<반론> 병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이론은 심리학적으로 타당성이 없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몹시 실망했고, 꿈을 잃어버렸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한 집에 모여 있었다.


  3) 권력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는 사람들

아마도 이것도 타당성이 없는 이론일 것이다.


<반론> 만일에 권력자들이 시체를 훔쳤다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소문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쓸 때 왜 시체를 내놓지 않았겠는가?






E. 그분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단지 환상이었을까?  옥스퍼드 사전에 의하면 환상을 이렇게 정의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외부의 물체를 분명하게 지각하는 것.”


환상은 보통 극도로 긴장하거나 극도로 상상력이 풍부하거나, 몹시 신경질적인 사람, 또는 병을 앓고 있거나 마약을 복용한 사람에게 나타난다.  제자들은 이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았다. 건장한 어부 출신, 세리 출신, 특히 도마같이 의심 많은 사람이 환각을 일으킬 리가 없다. 환각을 일으키는 사람은 갑자기 그것을 멈출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6주 동안에 최소 11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11번 나타나시고 갑자기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은 환각 이론도 타당치 못하다.


더구나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격한 증인들이 무려 550명이 넘는다. 한 사람이 환각을 일으키는 것은 가능하고,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같은 환각 상태에 빠질 수는 있어도, 550명이 같은 환각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환각은 주관적이다. 마치 유령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져질 수 있었고, 구운 물고기를 드셨으며, 한번은 제자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시기 까지 하셨다. 베드로는 행10:41에서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길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많은 것들을 가르치기도 하셨다.



F. 사회에 미친 즉각적인 영향/  즉, 교회의 탄생과 교회의 성장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세상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교회가 탄생하여 엄청난 속도로 자라났다.  마이클 그린은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소수의 교육을 받지 못한 어부와 세리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300년 동안 그때까지 알려진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평화적인 혁명에 관한 완벽하리 만큼 경이로운 이야기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게 질문을 던져오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단지 돌아가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나셨습니다. 당신은 그를 만날 수 있으며,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햇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말들을 했고 교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교회는 부활절의 무덤에서 태어나, 온 누리에 퍼져갔다.



G. 시대를 통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수백만이 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했다. 그들은 피부색, 민족, 종족, 대륙,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각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영국의 구세군 지도자였던 카라일이 공원에서 설교할 때였다.  그는 “예수님이 오늘도 살아계십니다.”라고 설교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러자 설교자는 “왜냐하면 저는 오늘 아침에도 그분과 30분 동안 얘기했기 때문이죠.”

전 세계 수백만의 기독교인들은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증거는 대단히 광범위하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실제로 가능한 경우는 다음 3 가지로 압축된다.

1)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2) 아니면 미친 사람이었든지

3) 아니면 그보다 더 끔찍한 존재였을 것이다.

   증거를 살펴볼 때 그가 미쳤다거나 악마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 그의 하신 일, 그의 성품, 구약성경의 예언의 완성, 죽음을 정복한 일들을 살펴볼 때 그런 주장들은 터무니 없고 비논리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알파토크2/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귀걸이나 목걸이 심지어 팔지에 십자가를 달고 다닌다. 이런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아마도 죄수를 처형하는 교수대나 전기 의자에 달린 줄을 걸고 다닌다면 무척 놀랄 것이다. 사실 십자가는 로마시대에 아주 무서운 죄인을 처형할 때 사용했던 사형 틀이었다. 인류에게 알려져있는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십자가 형이었다. 십자가형은 315년 로마가 국교로 공인이 되고 얼마지나서 폐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 조차도 이 십자가형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져왔다. 복음의 상당 부분은 사실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신약성경의 상당 부분은 거의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교회가 성찬식 예배를 드릴 때에도 예수님의 상처받은 육신의 몸과 흘리신 피에 중심을 두고 있다.  교회 첨탑은 거의가 다 십자가로 장식되어져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방에 갔을 때 이렇게 고백했다.

- 고전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                    로 작정하였음이라”.

- 고전1:23,24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거나 세계를 변화시킨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끼친 삶의 영향 때문에 기억된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가장 크게 세계 역사의 모습을 바꾸어 놓으셨지만 그의 삶보다는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욱 기억되고 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그토록 주목되고 있는가? 그의 죽음과 소크라테스나 공자, 석가의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순교자들이나 전쟁의 영웅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는 무엇이 다른가? 그는 왜 죽었는가? 그로 인해서 무엇을 얻었는가?  신약성경에서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었다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이 무엇인가?” 저는 여러분에게 여기서 이런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자 한다.


1.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


가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기독교가 필요 없어요. 나는 무척 행복해요.  나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꼭 예수를 믿어야 하나요?” 과연 그럴까? 우리는 왜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사도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악랄한 살인범이나 강도에 비해서는 깨끗할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된다. 


작가인 섬머셋 모음이 이런 말을 했다.

“만약 내가 이제 까지 생각한 모든 것과 저지른 모든 행동들을 다 적는다면 사람들은 내가 사악한 괴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했다.


죄의 근원, 죄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떨어지게 되어 삶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 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우리는 엉망이 되어버린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1) 죄로 인해 오염됨

예수님께서 막7:20-2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개역개정판 막 7장)


야고보서 2:10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개역개정판 약 2장)


2) 죄의 권세 (힘)

나쁜 짓에는 중독적인 힘이 있다. 요8:34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개역개정판)


고약한 성미, 질투, 교만, 자랑, 이기심, 중상모략, 성적인 방탕함에 중독되기도 한다. 우리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사고 방식이나 습관적인 행동에 중독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힘의 종이 된 상태다.


3) 죄의 대가

인간 본성에는 정의를 갈망하는 무엇인가가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아주 악한 자들의 만행이나 몹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분노가 일어나면서 그런 짓을 한 사람들이 잡혀서 벌을 받기를 바란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죄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다.  어느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한다(롬 6:23).


4) 죄로 인해 분리됨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체적인 죽음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죽음이다.

육체저인 죽음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영적인 죽음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만들어서 하나님과 분리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악한 일들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벽을 만들게 한다.



2.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우리 모두는 사는 동안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1) 하나님이 친히 대속하심/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            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개역개정판 고후 5장)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         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개역개정판 갈 3장)

벧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           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개역개정판 벧전 2장)

* 존 스톳트는 ‘하나님의 자기 대리’라는 말을 썼다. 자기 대리란 이런 뜻이다. 여기 한 예를 들겠다.

# 에네스트 고든이 쓴 책 <콰이강의 다리> -- 이것은 2차 대전 중에 미얀마 철도 작업을 했던 전쟁 포로들이 겪은 실제적인 이야기다. 매일 매일 일과가 끝나면 작업반은 연장을 반납해야 했다. 어느날 일본인 감독관이 삽 하나가 모자란다고 소리를 지르며 누가 가져갔는지 말하라고 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서 연장을 가지고 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다 총으로 쏴 죽여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총을 포로를 향해 겨누었다.


그 순간에 한 포로가 앞으로 나갔다. 차렷 자세로 말없이 서있는 그 병사를 그 감독관은 심하게 총으로 때려서 숨지게 했다. 포로들이 숙소로 돌아간 후 연장을 다시 세워보았을 때 삽의 숫자는 꼭 맞았다. 그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아무 죄도 없는데 대신 앞으로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신(대리)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앞으로 나오셨다. 대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셨다. 키케로는 말하기를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저주스러운 고통”이라고 했다.


2) 십자가의 고통/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로마 군병의 채찍에 맞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발가벗기운 채로 채찍 기둥에 묶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뼈 조각과 납 덩어리가 엮여진 네 다섯 가닥의 가죽 끈으로 된 채찍에 맞으셨다. 3 세기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로마의 채찍질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고통받는 자의 혈관이 훤히 드러나고... 희생자의 근육과 힘줄, 창자는 찢겨져 속이 드러나 보였다.’


예수가 집정관 앞으로 끌려갔을 때 가시관이 그의 이마 위로 씌여졌다. 그는 600여명의 군중들에게 조롱당했으며 얼굴과 머리를 맞았다. 그런 다음 무거운 십자가를 피가 흐르는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했으며, 그가 쓰러지자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를 대신해 짊어지게 했다.


그들이 십자가가 서게 되는 터에 당도하자 다시 예수를 발가벗겼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 위에 눕히고 15 cm되는 못을 손목 바로 위인 전박에 박았다. 무릎은 옆으로 비틀어서 아킬레스 건과 경골 사이 발목에 못을 박았다. 십자가는 그를 달리운 채로 들리운 다음에 땅에 미리 파놓은 구멍에 쳐넣었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사람들이 조롱하는 가운데 뜨거운 태양열과 견딜 수 없는 갈증 속에 시달려야 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약 6 시간을 매달려 있으면서 그의 생명은 조금씩 사그라져 갔다.


그의 고통 중에 가장 무서운 고통은 육체적인 상처나 십자가의 아픔이 아니고, 또한 자기의 제자들과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정서적인 아픔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순간적으로 외면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분리되는 영적인 고통이었다.



3. 십자가의 결과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에는 많은 면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도 역시 많은 단면들이 있다. 십자가 위에서 악한 어둠의 세력들은 무장해체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골2:14하,15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2)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                 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개역개정판 골 2장)

죽음과 마귀의 힘은 패배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는 사람들의

세상에 오셨고 고통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본을 보이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설명하기 위해 신약성경이 사용한 4개의 이미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1. 첫 번째 이미지/ 법정에서 - 용서와 칭의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롬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라고 했다.

여기서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법정 용어다. 법정에 섰다가 사면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의롭게 된 것이다.

(예) 두 사람이 있었다. 같은 학교와 대학에 진학하면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한 사람은 판사가 되고, 다른 사람은 계속 내리막 길을 걸어 범죄자가 되었다. 그 친구가 법정에 서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자기 옛친구가 법관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죄를 범한 친구는 자기의 죄를 인정했다. 판사는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판사로서 공정하게 재판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 친구를 봐줄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그 친구에게 벌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 죄에 합당한 벌로써 벌금형을 선포했다.  이것이 공의다.


그런 다음 그는 판사로서의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와서 그 벌금에 해당되는 액수의 수표에 사인을 했다. 그는 그것을 친구에게 주면서 자신이 대신해서 벌금을 내겠다고 했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 예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향해서 하신 일을 예로 들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해서 반드시 처벌하셔야 한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내려오서서 우리를 대신해 벌을 받으셨다. 그는 심판자인 동시에 구원자이시다.


그러나 이 예화에도 3가지가 정확하지 않다.

* 첫째는, 우리는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형벌은 벌금형 정도가 아니다. 죽음이다.

* 둘째는, 더 친밀한 관계다. 단순한 친구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아버지들이 그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 세 번째는, 그 대가가 더 컸다. 하나님이 치루어야 했던 대가는 돈이 아니라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그가 죄의 대가를 치루었다.


2) 두 번째 이미지는,  시장에서 일어났다

   다른 말로 몸값 - 시장: 구속

빚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빚은 진 사람에게 큰 부담이 된다. 그래서 고대시대에는 누군가가 빚을 지게 되면 그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팔아야 했다. 한 남자가 시장에 서서 자신을 노예로 내놓았다고 가정하자. 누군가 그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당신의 빚이 얼마요?”하고 물었다. 빚진 사람은 “2천만원”이라 했고, 그 손님이 그 돈을 내준 다음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었다고 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몸값”을 치러 그를 구한 것이다.


*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속죄함을 받았다” (롬3:24).

  예수님은 막10:45에서 말씀하신대로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대속의 값을 치르셨다.”


* 죄의 권세가 깨지다.

우리는 이렇게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요8:36에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잡고 있던 죄의 지배력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가능하게 했다.


3) 세 번째 이미지는, 성전으로부터 왔다.

    씻음 - 성전: 정화


구약성경에는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상세한 율법으로 명시되어 있다.

일반적인 경우 죄인이 속함을 받기 위해서는 짐승을 잡아야 했다. 그 짐승은 가능한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 죄인은 그의 손을 그 짐승 위에 얹고 그의 죄들을 고백했다. 그렇게 하면 죄는 죄인으로부터 짐승에게로 옮겨가고 짐승은 죽임을 당한다.


히10:4에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 줄 수는 없다”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그림 혹은 ‘그림자’일 뿐이었다. 실체는 예수님의 희생과 함께 왔다.  오직 그리스도, 우리 대리자의 피만이 우리 죄를 없앨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완벽한 삶을 살았기에 그분만이 완벽한 희생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피는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주며 죄로 인한 오염을 없앨 수 있다.

요1:29에 “보라, 새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4) 네 번째 이미지는, 가정이다.

    관계 - 가정: 화목


죄의 뿌리도 죄의 결과도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라고 했다. 반대로 십자가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고후5:19에서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     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개역개정판 고후 5장) 라고 했다.


탕자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그의 사랑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 관계는 단지 지금의 삶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것이다. 단지 죄에 대한 형벌이나 죄의 권세, 죄로 인한 오염, 죄로 인한 분리 뿐만 아니라 죄라는 것 자체로부터도 자유로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기 대리로 가능해진 일들이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시며 보통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 하나 하나와 친해지고 싶어하듯이 우리와 친해지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단순히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바울은 갈2:20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그럴 때에 내 삶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존 윔버의 회개 간증 >  인생의 의문점들, p. 54-56.  --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영접 기도를 하게 하라.













































알파토크3/어떻게 나의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라디오나 텔레비젼이 정상적으로 동작하려면 2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전기를 연결해야 하고, 두 번 째는 잘 조정해야 한다. 전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그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어떠한 방법을 다 동원해도 결코 그 물건들은 동작을 하지 않는다. 모든 손잡이와 다이얼을 다 돌려보고 리모컨을 작동시켜봐도 동작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안테나를 길게 뽑아보고, 두드리고 발길로 찬다고 할지라도 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동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2과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고 했다. 우리가 치루어야 할 모든 값을 대신 지불하셨다고 했다.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우리가 엄청나게 자선 사업을 하더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전기를 연결하지 않는 라디오나 텔레비젼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관계를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애 구주와 주님으로 모셨다는 것은 과거에는 그분과 전혀 상관 없이 내 뜻대로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예수를 내 인생에서 중요한 분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모든 삶 속에서 그분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고후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사도 요한은 요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다. 여기서도 예수 믿는 것을 관계로 이야기하고 있다.


고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해서 예수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출석하지만 자기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즉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구원의 기쁨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없이 결코 구원의 기쁨은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기왕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예수 믿는 맛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 믿는 맛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구원받은 기쁨이 생겨난다. 구원받은 기쁨이 있을 때에 주의 일을 하더라고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적인 신자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율법적인 신자는 누가 시켜야 하고, 벌이 두려워서 하는 신자들을 말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동시에 영원한 삶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요한일서 5:13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카메라 삼발이를 세 개의 다리가 지탱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 세분 모두의 역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성부께서: 그의 말씀으로 주시는 약속들,-- 하나님의 말씀

-성자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희생 -- 예수님의 하신 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주시는 확신 -- 성령의 증거


1. 하나님의 말씀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 3가지)

기분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기분이란 날씨나 대인관계나 기타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분은 변하기 쉽고 그래서 믿을 수가 없다. 성경에 있는 약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으며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위대한 약속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1) 요한계시록 3:20 -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시겠다고 하심/

특히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거나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도움이 되는 구절 중의 하나는 사도 요한이 라오디게아에 보낸 편지 속에서 주님의 말씀하신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계3:20)


기독교 신앙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 많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시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을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 예수님을 우리 삶 속으로 초청하는 것’, ‘예수님께 문을 여는 것’ 등이다.


(예화)  화가 홀만 헌트가 영감을 얻어 그린 ‘세상의 빛’이란 그림을 그렸다. 시대를 통해서 그려진 성화 중에서 가장 숭고한 작품 중의 하나라고 했던 이 그림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문 밖에 서 계시는데 그 문은 담쟁이 넝쿨과 잡초로 무성해져 있다. 문은 분명 어떤 사람의 인생의 문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그의 삶에 한 번도 초청한 적이 없다.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는 들어가서 그 사람 인생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문 밖에서 들어가기 위한 문고리가 없다. 그 문고리는 문 안에만 달려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 삶 속에 들어오시려면 우리가 문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은 억지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분께 문을 여느냐 열지 않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만약에 문을 연다면 우리 주님은 그에게로 들어가셔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새로운 관계를 맺으실 것이다.


2) 마28:20 -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

그렇다. 일단 우리가 예수님께 들어오시라고 청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  우리가 항상 그분과 함께 직접 대화하지 않더라도 그분은 항상 계신다. 당신이 친구와 함께 한 방에서 일하고 있다면, 직접 말을 걸지 않더라도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이 계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3) 요10:28 -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겠다. --> 내가 세상 이후에도 영원토록 함께 하겠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 생에서 뿐 아니라 이 생 이후인 내세에서도 영원토록 살 수 있도록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면서 얻게 되는 삶의 질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져다 주신 삶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그 순간 시작된다.


요10:10에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그 삶은 현재의 삶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지속된다.


< 기독교적 역사관 >

현재의 삶이 끝이 아니다. 세상의 지식은 이 세상을 떠나가면 사후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또한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순환적인 역사관을 주장한다. 즉 환생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전생에는 돼지였는데 그가 착한 일을 하여서 후생에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 등이다. 이 사상에는 이 생에서 잘못하여 나중에 환생하여 열심히 잘 살면 좋게 된다는 일종의 순환적 역사관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역사관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관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천지 창조의 시작이 있고, 이 땅에 종말이 오는 마지막이 있다.  신약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세상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도 아니다. 영광스러운 종말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계21: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살전4:17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               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천국에는 고통이 없으며 눈물도 없다고 한다. 죄가 없으므로 더 이상 유혹도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이 없을 것이다. 그때는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다(고전13:12).

그리고 우리는 영광스럽고 고통이 없는 부활한 육신의 몸을 얻게 될 것이다(고전15장).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요일3:2).


한 마디로 천국은 기쁨과 즐거움이 영원하게 지속되는 그야말로 복된 천국이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천국은 지루하고 재미 없고 너무 무료할 것일 것이라 말하며 비웃는다.

그러나 고전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                 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신앙이란 1)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받아 들이고,

                  2) 그 약속들을 굳게 믿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업적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내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의로와서,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루신 일에 달려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성취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의 그분의 업적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다.


1) 하나님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대신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선물로 주셨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선물로 주실 수 있게 되었다 (요10:28).


그래서 요3:16에 그분은 우리 대신에 그의 아들을 주어 죽게 하셨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멸망해야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시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셔서 죽게 하신 것이다. 그 죽음의 결과로 영원한 생명이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그 자신이 대신 담당하셨다.

-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였다. 

 사53:6에 “우리늠 모두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더니 여호와께서 그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             당시키셨도다.”


-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았다.

 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             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것이 하나님이 멀리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다. 우리와 그분 사이에 죄의 벽이 가로 놓여져 우리가 그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한편, 우리 예수님은 어떤 잘못도 없는 분이셨다. 그는 완벽한 삶을 사셨던 분이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어떤 벽도 없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로 옮겨버리셨다(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그 순간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이다.


- 이 일로 인해서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던 벽이 무너졌다.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죄는 사라졌고 결코 유죄판결을 받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죄는 사라졌고, 결코 유죄판결을 받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그래서 롬8:1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3. 성령의 증거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된다.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오신다.  롬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신을 가지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여러 가지 역할은 특별히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성령님은 우리의 속 사람부터 변화시키신다.


a. 우리의 성격을 변화시키신다.  갈5:22,23의 성령의 열매를 우리의 인격에서 맺게 하신다. 곧 예수의 성품을 우리의 성품 속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 할 것은 출생과 성숙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성장/성숙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장하게 됨에 따라 과거 예수 믿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가게 될 것이다.


(예) 닉키 검블이 정원에 배나무를 심었다. 자기 친구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솜으로 된 사과를 만들어 배나무에 매어달아 놓았다. 그것은 의미있는 장난이었다. 니키는 속지 않았다. 열매가 맺는데는 우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또한 배나무에서 사과 나무가 열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b.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에 변화를 주신다.

*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 과거 예수를 알기 전에는 ‘예수’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이 왔다. 라디오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주제가 예수 이야기가 나오면 꺼버리든가 다이얼을 돌려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는 소리를 더 잘 들으려고 더 크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을 향한 내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변화/ 과거에는 예수믿는 자들을 만나는 것이 거북하고 불편했는데 지금은 기쁨이 된다. 또한 과거에는 거리를 가거나 신문을 보거나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려운 사람이나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눈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 마9:35-36에, “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                     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에수를 믿어도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의 기쁨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의예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자들이 많다.  그래서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물으면 대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합니다.”등으로 대답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요일5:13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아는 12 가지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1/ 우리 생활에 변화가 생긴다.(고후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2/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새로운 욕구가 생긴다. (요일2:3-5)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3/ 세상 제도를 사랑하지 않는다. (요일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4/ 죄에 대해서 새로운 감각이 생긴다. (요일3:6-9)  ---> 양과 돼지의 비유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        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        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죄를 사랑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죄를 지으면 비참함을 느끼고,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화평을 찾을 수 없다.


*5/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게 된다. (요일3:14)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     하느니라


*6/ 성령의 증거. 성령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요일3:24, 롬8:16)

요일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           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특별한 느낌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조건은 느낌이 아니라 믿음이다. 죽음의 대열에 섰던 정죄받은 죄인이 용서를 받았을 때 그의 기쁨과 안도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 사형수로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데,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죽이지 말고 무죄로 석방을 시키라고 했다면 그 놀라움과 기쁨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과거 일제 시대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내일이면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오늘 8.15 해방이 터진 것이다. 그는 죽음 직전에 살아났다. 이것은 육신적인 죽음에서 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그것보다 더 놀라운 영적인 죽음에서 해방받는 것이다.)


어떤 성도가 이렇게 노래했다.

기분과 느낌은 요동하지만 내 주는 여전하시니

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배워라.

그러면 네 감정이 어떠하든지

예수는 여전히 네 구세주로다.


*7/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 (롬8:14)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 하나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사랑 (벧전2:2)

벧전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있든지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영혼을 먹이는 것을 즐거워한다.


*9/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  (고전2:12)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성경을 다른 책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적인 관점에서 연구했으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거룩한 계시를 해주는 성령에 완전히 의존함으로 성경을 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전에는 무의미하던 성경구절이나 진리가 새로운 뜻을 가지고 나타난다. 또한 전에는 얼음과 같이 차던 말씀이 불과 같이 뜨거웁게 되어진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10/ 기도하려는 새로운 욕망 (롬8:15)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중생하기 전에는 교회에 나와서도 의무적으로 기도하지만,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지내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기도를 한다.


*11/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새로운 사랑 (막5:18-20)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12/ 주의 징계 (히12:5-8)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     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결론/ 확신은 교만과 다르다. 우리의 확신의 근거는 감정이 아닌 3가지(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의 업적, 성령의 증거)다.
























알파토크4/ 왜 그리고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나의 사랑하는 책/


  ’98 한국 갤럽보고서에 나타난 한국 개신교인들의 성경 읽기에 대한 통계는 오늘 한국 교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한국 개신교인의 51.9%가 예배 시간 외에는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통계수치가 보여주는 증거는 무엇인가? 예배시간 외에는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 50% 이상의 교인들은 실제로 영적생명이 없는  사람들이거나 중병에 걸린 사람들일 것이다.


갓 태어난 신생아는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꼭지를 빨거나 우유병의 젖꼭지를 빨게 되어있다.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자라게 되어 있다. 신생아에게 젖은 자라는데 필수적인 식물이다. 만일 태어났는데도 전혀 젖꼭지를 먹고자 하지 않는다면 죽은 아이이든지 건강상태가 극도로 약한 경우일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 읽기는 선택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난 성도들의 건강한 삶의 특징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한다.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  또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도 거듭난 성도들을 갓난아이에 비유하면서 성경 읽기와 성도들의 성장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이렇게 역설하고 있다.  “갓난 아이들과 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2:2).


시편기자는 시1편에서 복있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했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바란다. 이 장에서는 왜 성경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는지, 어떻게 즐거움이 되는지에 대해 성겸만이 가진 독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1. 성경은 가장 인기있는 책이다. 세계에서 매년 제일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는 성경이다. 매년 팔리는 성경의 숫자만 4천 4백만 권이다. 미국의 모든 가정에는 평균 6.8권의 성경책이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미국 시사주간지인 타임지에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성경이었다. 만약 성경의 누적 판매량이 솔직하게 베스트 셀러 목록에 반영된다면 그 자리를 다른 책이 차지하는 주간은 보기 드물 것이다. 구할 수 있는 책들이 해마다 늘어가는 이때에 이 한권의 책이 시간이 흘러가도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고 있다는 것은 놀랍고 이상하고 아니 점점 더 신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이해하기 힘든 일일 뿐이다. .... 영국에서 매년 팔리는 성경과 신약성경은 거의 250만 권에 달한다.


2.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능력있는 책이다. 성경책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의해서 온갖 공격을 받아왔지만 태산과 같이 굳게 서있다. 성경은 수백만, 수천만, 수억의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성경은 고통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 성경은 슬픔을 찬양으로 바꾸어준다. 이 책은 몸이 불편한 자에게 목발이 되어주며, 쫓기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준다. 이 책은 길 잃은 자에게 등불이 되어주며, 학자에게 도서관이 되어준다. 이 책은 세계의 위대한 시, 역사, 편지, 그리고 전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가족을 잃은 자에게는 향기로운 치유를 베풀어주며 방황하는 자에게 등대가 되어준다. 성경은 개개인만 변화시킬 뿐 아니라 국가도 변화시킨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한 청년이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자기의 방탕한 아들을 구원해달라고 주님께 계속해서 간구했다. 로마 여행 중에 어거스틴은 어떤 불리한 환경에 의하여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의 영혼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악한 친구가 그를 부르며 말했다. “어거스틴, 왜 도망가니? 나야, 나!” 그는 소리치며 대꾸했다.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기 때문에 달아나는거야!” 어거스틴은 성경 때문에 새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성경에는 능력이 있다.



3. 성경은 가장 귀한 책이다.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책이다. 니키 검블이 수년 전에 중앙아시아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당시 그곳은 성경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는 러시아로 된 성경을 포함한 기독교 서적 몇 권을 갖고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교회에 나가면서 진실된 그리스도인을 찾아 보았다.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서 60세 가량의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에게 다가가서 가져온 러시아 성경책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자기 주머니에서 100년이 된듯한 신약성경을 꺼냈다. 책장은 너무나 닮아있었다. 자신이 온전한 새 성경책을 받았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했다.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몰랐고 니키 검블은 러시아어를 한 마디도 몰랐지만 그들 둘이는 서로 얼싸앉고 기뻐했다. 그는 성경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왜 그토록 인기가 많고, 그토록 힘이 있으며, 그토록 귀한 것일까?


1. 성경은 삶의 지침서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계시).


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창조를 계시한다.


- 히1:2/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이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였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주된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신다(시19편).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과학은 창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기독교신앙은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성령으로 즉 예언, 꿈, 환상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방법을 살펴보겠다.



나. 모든 성경은 영감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성경의 영감에 대해 이렇게 썼다.  딤후3:16-17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유능하게 하고 온갖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말의 원어는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혹은 하나님의 숨결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을 대리인으로 사용하셨다. 성경은 100% 사람의 작품이다. 그러나 100%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신 것처럼).


* 예수님 자신도 예수님 당시의 경전을 이렇게 이해하셨다. 그에게 성경이 말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었다(막7:5-13).

(예)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 가운데 대표적인 학교인 시카고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교가 있다. 그 신학교 학감이었던 칸쪄라는 교수가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에 나갔다. 진행자가 그분에게 묻기를, “당신은 왜 성경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칸쪄 교수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님이 성경을 매우 귀하게 여기셨고 그분은 나의 구주이시기 때문에 나는 성경의 권위를 믿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 예수님 자신이 온전한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 믿음은 구약은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이며 신약은 그의 증거들에 대한 추론의 결과임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귄위를 성경에 부여하시는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자.


-눅24:25-27에서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제자들을 미련하다고 하심.”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요5:45-47에서 모세의 글을 언급하시면서 예수님은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글을 자신의 말씀과 동일시하셨다.


-눅24:44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 


요점은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성경과 구약을 아주 높이 보셨다는 것이다. 고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성경관을 받아들일 것이다. 주님은 구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는 이 견해는 거의 보편적으로 전 세계의 교회들에 의해 수세기를 걸쳐 지켜져 내려왔다. 교회의 초기 신학자들은 이 견해를 고수했다. 초대 교부 중의 한 분인 이레니우스(AD 130-200)는 ‘성경은 완벽하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자들, 예를 들어 마틴 루터는 ‘흠이 없는 성경’이라고 말했다. “성경은 흠이 없으며, 성령의 영감 아래 쓰여졌다.”는 이런 말이 비록 지금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고 학교에서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긴 하지만 이 견해는 많은 훌륭한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지켜지고 있다.


이 말은 성경에 아무런 난해함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베드로 조차도 바울의 편지에는 더러 ‘알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했다(벧후3:16)

벧후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성경은 1,50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왕, 학자, 철학자, 어부, 시인, 정치인, 역사가, 의사 등 적어도 40명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서, 시, 예언, 계시, 편지와 같은 서로 다른 문학 형태로 글을 썼다. 우리는 성경이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믿음을 지키고, 어려운 부분들을 그 문맥 안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비록 모든 난해함을 즉시 해결할 수 없다 할지라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적인 복음전도자 빌리 그래함이 젊은 전도자일 때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 심각하게 도전했다. 그는 1956년에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잡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오늘의 기독교)에 “성경의 권위와 복음주의”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 글에서 그는 자기가 한번 성경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되니까 아무런 설교를 할 수 없게 되더라고 고백했다. 그가 쓴 글을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고자 한다.


   1949년에 나는 성경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성경에 명백한 모순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것들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제한된 개념과 일치하지 않았다. 설교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바로 과거의 모든 위대한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였다. 그해 8월에 나는 로스앤젤레스 외곽에 있는 높은 산에 위치한 수양관에서 열린 수양회에 초대받았다. 그때 숲속을 따라 거닐면서 하나님과 씨름하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결국 나는 절망해서, 성경에 계시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내 의지를 굴복시켰다. 나는 펼쳐진 성경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 있는 많은 것을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은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저는 믿음으로 성경을 주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경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무조건 모두 받아들입니다. 주께서 기쁘게 보신다면 제가 주의 말씀을 선포할 때 저에게 권위를 입혀 주옵소서. 그리고 그 권위로 저의 죄를 깨닫게 하여주시고 많은 죄인들을 구주께로 돌아서게 하옵소서.”  그로부터 6주 후, 지금은 이미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된 로스앤젤레스 전도대회를 시작했다. 그 전도대회 기간 중 나는 나의 사역을 변화시킨 비밀을 발견했다. 나는 성경의 참됨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성경은 참이라고 분명히 믿었다. 그러자 자꾸 반복해서 “성경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은 성령이 말씀하시는 하나의 목청일 뿐이라고 느꼈다. 권위가 믿음을 만들었다. 그 믿음은 반응을 낳았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자 앞으로 나아왔다. 사람들을 위대한 연사의 말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사람들은 주의 거룩한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깊이 찔러 그들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나는 성경이 내 손에서 불꽃같이 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불꽃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불신앙을 녹이고 그들을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하도록 만들었다. 그 말씀은 방망이가 되어 돌 같은 마음을 깨뜨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였다. 나는 점점 더 성경말씀 자체를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권위는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최고의 근거가 되어야 마땅하다. 예수님에게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하는 말보다도 (예를 들어, 막7:1-20), 아주 똑똑한 사람들의 견해보다도 (예를 들어, 막12:18-27)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


그러나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상충이 되지 않는다면 교회의 지도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 성경은 삶을 위한 하나님의 지침서이다.


성경은 모든 ‘신조와 행위’은 기초 근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딤후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성경을 주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1) 성경은 우리가 믿는 것(신조)의 근거가 된다.  즉, 교훈과 책망을 위한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다. 고통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또 그 밖의 것들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따라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성경 안에서다.


2) 성경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행위)이 근거가 된다. 즉, 성경은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위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눈에 무엇이 옳으며, 어떻게 하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곳은 바로 성경이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 한 사회가, 한 민족이, 한 나라가 건전하고 의로우며 문명화된 삶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에 대한 뛰어난 분석이다.“


성경은 몇 가지 것들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성경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성경은 독신 생활이 은혜의 선물임을 가르치나(고전7:7), 그것은 규범이라고 보다는 예외이다. 결혼하는 것이 표준인 것이다(창2:24, 고전7:2).


혼외 성관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 할 수만 있으면 일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 베풀고 용서하는 것이 옳다는 것도 안다. 특히 아이들을 어떻게 기르고 나이든 친척들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도 우리에게 주어졌다.



# 규정들 안에서의 자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난 이 율법책이 싫어. 전부 율법과 규범들 밖에 없고 - 너무 구속적이야. 나는 자유롭고 싶어. 성경에 따라 산다면 마음대로 삶을 즐길 수도 없어.”  여러분,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가? 성경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는가? 아니면 사실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가? 율법과 규범들은 실제로는 자유를 창조하고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다.


(예화) 몇 년 전에 니키 검블의 자녀 포함해서 22명이 축구시합하기로 하고 심판에 그들을 수년 동안 지도한 니키의 친구가 하기로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아 축구 규칙도 잘 알지 못하는 니키가 심판을 보기로 했다. 그는 축구 규칙도 잘 알지 못하고 선수 구분도 안된 상태에서 심판을 보았는데, 시합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떤 아이들은 공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어떤 아이는 공이 밖으로 나갔다고 주장했다. 니키는 어쩔 수 없이 그냥 시합을 진행시켰다. 그러자 파울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들은 ‘파울’이라고 소리쳤고 다른 편 아이들은 아니라고 악을 썼다. 니키는 누가 옳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계속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그 아이들이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심판을 보기로 했던 니키의 친구가 왔을 때 아이 3명이 부상을 입어 운동장에 누워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는데 주로 심판이었던 니키를 향해 질러댔다. 그러나 니키 친구인 그가 도착하자 그는 팀을 정리하고, 경계선이 어딘인지 말해주는 등 아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은 그들 생애 최고의 시합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아이들이 규칙이 없을 때에 더 자유로왔는가? 아니면 더 자유롭지 못했는가?

효력을 가진 권위가 없을 때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마음이 상했다는 것이다. 그 아들들은 축구시합의 경계선이 어딘지를 아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그 경계선 안에서 마음껏 시합을 즐겼던 것이다.


어느 면에서 성경은 그와 같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책이다. 그분은 무엇이 ‘안’이고 ‘밖’인지를 말씀해 주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말씀해주신다. 그 규칙 안에서 시합을 한다면 자유와 기쁨이 있다. 그 규칙을 깨뜨리면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하나님은 인생의 즐거움을 망치기 위해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가 방해꾼이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사람들이 그들의 남편을, 아내를, 자녀들을 버리고 간음하면 삶은 난장판이 되고 만다.


#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자유/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분의 뜻을 더 많이 발견하고 실천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와질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를 들을 필요가 있다.



2. 하나님이 보내는 사랑의 편지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관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은 과거에 기록된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에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과거에 기록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매일 이야기하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삶의 지침서일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의 편지이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요5:39-30에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     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로체스터 주교였던 크리스토퍼 차배스 박사는 말하기를,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다. 복음은 초상화 안의 인물 그림에 해당한다. 구약은 전체 구도에서 꼭 필요한 뒷배경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초상화를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사이에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지 못한다면 즉 읽으면서 그 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아기 예수가 누워있는 구유 혹은 요람이다. 요람을 살펴보느라 아기에                                게 경배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자.”


- 하나님과의 관계는 마치 왕복 차선과 같이 가고 오는 상호관계이다. 우리는 그분께 기도로 이야기하고 그분    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특히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 하나님은 이미 과거에 말씀하셨던 것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을 인용할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히3:7을 보라.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개역개정판 히 3장)

7 그러므로 성령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 히 3장)

7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 히브 3장)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개역한글판 히 3장)

7 So, as the Holy Spirit says: (NIV He Chapter 3)

7 So then, as the Holy Spirit says, (TEV He Chapter 3)


성령은 과거에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는 이미 말씀하셨던 것을 통해 새롭게 말씀하신다. 이 때문에 성경은 살아있는 것이다. 다시 마틴 루터의 말을 인용하자면, “성경은 살아있어서 나에게 말을 하며, 발이 있어서 내 뒤에 뛰어오며, 손이 있어서 나를 붙잡는다.”


1.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1)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신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직접 만나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대체로 귀로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하신다.


(1) 그분과 성경을 통해서 시간을 보낼 때에 우리의 성품은 더욱 그 분을 닮아갈 것이다. (고후3:18)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           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2) 우리의 삶이 곤란한 가운데 있을 때라도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 (시23:5)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3) 건강과 치유를 제공하신다. (잠4:20-22)

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4) 영적 공격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마4:1-11).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시작하실 무렵 사탄의 강력한 공격에 맞서셨다. 예수님은 모든 유혹을 성경구절로 대응하셨다. 그의 대답이 전부 신6-8장에 나오는 말씀이었다. 그분은 이 성경의 부분을 공부하셨고, 그것이 그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그 말씀을 사용하실 수 있었다.


(5) 하나님의 말씀은 큰 위력적인 힘을 갖고 있다 (히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6)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요15:3)


<예화> 니키 검블이 자기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자기 아버지의 구원문제로 고민.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일 후에 성경을 읽으며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버지에 대해 걱정이 되니 그분에 대해 말씀해달라”고 기도. 그리고 우연히 로마서를 읽다가 롬10:13을 읽게 되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니키는 그 순간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고 느꼈다. 아버지가 주의 이름을 불렀고 구원을 받으셨다는 것을... 약 5분 후에 그 아내가 들어와 행2:21을 읽었는데, 니키 아버지에 대한 구절같다면서 말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그 구절은 신약에 딱 2번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니키 부부에게 성경의 서로 다른 부분에 나오는 같은 말슴을 거의 같은 시간에 말씀하신 것이다. 3일 후에 성경공부 하러 친구 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날 성경공부 본문이 바로 롬10:13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러 가는 길에 여전히 그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근심하고 있었는데, 지하철 밖으로 나오다가 위를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곳에 커다란 포스타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는 롬10:13의 말씀이 적혀 있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3.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


시간은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살아갈수록 시간에 쫓기게 되며 우리는 점점 더 바빠지게 될 것이다. ‘돈은 힘이다. 그러나 시간은 생명이다.’라는 말이 있다. 성경을 읽을 시간을 마련하려면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계쇡을 세우지 않으면, 절대로 성경을 읽지 못할 것이다. 목사라 할지라도, 신학교 교수, 신학 박사라고 할지라도.


1) 시간 계획을 세우라.  성경을 읽는 것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가능한 게획을 세우라는 것이다. 지나친 야망은 금물이다. 매일 몇분이라도 계속해서 갖는 것이 첫날에는 한 시간 반을 하고 그 다음날 포기하는 것보다 낫다. 성경을 처음 읽은 자는 하루에 7분으로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점점 시간을 늘려나가라.


2) 장소. 한적한 곳이 좋다. 방해를 받지 않는 장소를 말한다. 막1:35에 우리 예수님께서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 교제하셨다.


3) 방법/

  (1) 먼저 하나님께서 읽을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읽은 말씀해 통해 내게 말씀해 달라고 기도하라.

  (2) 주어진 본문을 읽는다.

  (3) 읽어가면서 다음 3가지 질문을 던져보라.

     *1) 이 구절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즉 내용이 뭔가? ( 관찰 )

     *2) 무슨 뜻인가? ( 해석 )

     *3) 이 구절을 어떻게 적용할까? (내 자신, 가족, 내 일, 내 이웃들에게, 내 주위 사회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삶과 연관성을 보게 될 때 성경읽기가 더 흥미로와지며,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4) 하나님께 들은 바를 실행에 옮기라.



 결  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설교하시고 결론에 가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19세기 설교자인 D.L. 무디는 “성경은 우리의 지식을 늘리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변                                 화시키기 위해 주어졌다.”


# 시편기자는 시1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라고 우리를 격려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 삶 속에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할 때 일어나는 결과들/


1. 열매를 맺게 된다. 시편기자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 열매 맺으며 그 잎이 사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시1:3)라고 말한다.  결국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 시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 자신의 삶에 열매만 맺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측면에서도 열매를 맺게 된다.


-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된다는 것이다.


2.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인내의 삶을 살게 된다 (시1:3)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 그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영적인 생명력을 잃는 일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의 말씀과 그분과의 관계 안에 깊게 뿌리 박고 있지 않으면, 삶의 비바람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그 관계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그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면, 비바람이 몰아칠 때 우리는 넉넉히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이다.


3. 형통의 복을 얻게 된다. 하는 일마다 잘되는 축복을 얻게 된다. 이 말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의 복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며, 우리의 성품이 예수를 닮아가는 것에 있어서 풍요로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계획을 세워서 규칙적으로 매일 날마다 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적용한대로 실천에 옮김으로 성경이 말하는 모든 복을 받아 누리는 복된 주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 바란다.




<참고자료>


1. 백금산 목사, <성경 이렇게 읽읍시다>, 부흥과 개혁사, 1999.

2. 존 우드브리지, <성경의 권위>상, 도서출판 횃불, 1997.

3. 리로이 아임스, <그리스도인 성장의 열쇠>, 네비게이토 출판사, 1987.

알파토크5/ 왜 그리고 어떻게 기도할까?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해나갈 때에 기도라는 것은 단순한 위로를 주는 심리학적인 경험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또한 사귐이다.


서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만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를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공부하기 전에 먼저 기도의 정의부터 내리고자 한다.


1.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이다. 주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키워간다. 기도는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고 관계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다. 기도는 다른 사람이나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있어서 관계가 중요하며, 우리가 기도할 때는 성 3위 하나님 모두가 귀를 기울이신다.


1)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부 하나님(아버지)께 하는 기도다. 기도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이시다.

  * 마6:6에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라고 했다. / 하나님의 내재성

  * 마6:9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격 속에 내재해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초월해 계신다.  그는 전능한 힘을 가지셨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초월성


우리 하나님의 힘은 엄청나다. 우리 지구가 있는 은하계에만 태양과 같은 사이즈의 별들이 100만개나 된다고 한다. 우리 지구가 속해 있는 은하계는 10만개의 은하계 중 하나다. 그런데도 창세기 저자는 대수롭지 않는 듯 “또 별들도 만드셨다”(창1:16)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힘이란 그 정도로 엄청나다.


앤드류 머레이는 말하기를 “기도의 힘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가르 이해하는 데 온전히 달려있다.”


기도할 때 우리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그 모든 것에 내재해 계신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보다 더 크고 강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그곳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


2)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아들을 통하여 기도한다. 기도의 통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맺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로 기도를 끝낸다. 이것은 단지 형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1) 엡2:18에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 요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없애셨다.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예수의 이름에 그러한 힘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천국의 은행에 가면 내가 저축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서 무제한의 신용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께서 자기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3)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한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다.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시지 않았다. 그는 성령을 주셔서 우리 안에서 살면서 기도하는 것을 돕도록 하셨다. 바울은 엡2:18에서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한다’고 했고, 롬8:26,27에서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했다.

 *1) 엡2:18에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 롬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                  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 왜 기도하는가?


기도는 생명이 걸린 행동이다. 기도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1) 우선, 기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키워가는 길이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데 왜 굳이 간구해야 하는가?’라고 말한다. 대화가 없다면 그것을 관계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간구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다른 기도의 형식들도 있다.  찬양, 감사, 경배, 고백, 경청 등이다. 그러나 간구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는 것을 볼 때, 그분과의 관계가 자라난다.


2) 예수님의 본을 따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셨다. 그의 생애는 하나의 끊이지 않는 기도였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에 대한 언급은 수없이 많다. 예를 들면 막1:35,

눅6:12 등이다.

* 막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 눅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당연히 기도하리라고 생각하셨다. 예수님은 “너희가 만약 기도하면”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마6:7)라고 하셨다.


3) 기도의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기도의 보상은 너무나 많아 다 셀 수 없다. 그러나 대표적인 몇 가지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 요16:24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4) 기도는 나를 포함해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상황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3.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성경 전체를 통해 볼 때에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때때로 응답되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즉, 기도의 응답을 장애물들이 있다는 말이다.


1) 고백되지 않은 죄 (사59:1,2)

   고백하지 않은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벽을 만든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그 벽이 없어져야 한다.


  #1) 용서하지 않음 (마6:14,15)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2) 불순종 (요일3:221,22)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 잘못된 동기 (약4:2,3)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3) 하나님의 뜻을 오해함


#1) 하나님은 오직 “좋은 것”만 주신다 (마7:11)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좋은 아버지는 자녀가 구하는 것을 다 주지 않는다. 좋은 것, 자녀에게 유익된 것, 좋은 것을 주신다.


#2) 기도의 응답은 “예”, “아니요”, “기다려라”로 응답하신다.

설교자 마틴 로이스 죤스 목사는 “하나님께서 내가 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내가 구하는 어떤 것들은 허락하시지 않으며, 어떤 문들은 바로 내 눈 앞에서 닫아버리심을 나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예) 빌리 그래함의 아내 루스 그래함은...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언제나 응답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저는 엉뚱한 남자와 결혼했을 겁니다. 그것도 여러 번 결혼했을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동안 왜 그 대답이 “안된다” 였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성경에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성경의 약속은 때로 제한이 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이 간구를 들어주신다고 기록했다(요일5:14).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분의 뜻을 더욱 잘 알게 되며 더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4. 어떻게 기도할까?


기도하는데 정해진 방식은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 필수적인 부분이며, 따라서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기분께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의미없는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신다. 그러나, 많은 기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해왔다.


1) ACTS(사도행전)식으로 기도했다.


A - 어도레이션 (Adoration) 경배 --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하신 일들을 찬양하고 높여드림

C - 컨페션 (Confession) 자백/고백 -- 잘못한 일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함

T - 땡스기빙 (Thanksgiving) 감사 -- 하나님이 내게(가족, 건강, 친구 등) 베풀어주신 일에 대해

S - 써플리케이션 (Supplication) 간구 -- 자신을 위해, 친구,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



2)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형태(주기도)를 따라 기도함 (마6:9-13)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9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분과 나와의 관계와 그분께서 기도에 응답해주                                     시는 것을 감사하는 시간을 가짐.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절)/

히브리에서는 사람의 이름은 그의 성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다. 주변을 둘러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경멸당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교회에서,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영광받으시기를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3)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며 (10절)/

하나님의 나라란 그의 지배와 통치를 말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것은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한 것은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이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다. “나라가 임하옵소시며”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가 미래와 현재 모두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 기도에는,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키고, 치료받고, 사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두 함께 왕을 섬기고 순종하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가 포함된다.



# D.L.무디가 100명의 불신자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자기가 살아있을 동안에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기도했     다. 그들 중에 96명이 그가 죽기 전에 개종했고, 나머지 4명은 그의 장례식에서 개종했다고 한다.


# 한 그리스도인인 여인이 반항적인 10대 아들 때문에 근심하고 있었다. 그는 게으르고, 성질이 나빴고, 사기꾼이었고 거짓말쟁이였으며, 도둑이었다. 후에 겉으로는 존경을 받는 변호사가 되기는 했지만, 그의 삶은 세상적인 야망과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문란한 생활을 했고, 한번에 여러 명의 여자와 같이 살았다. 그 중의 한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 한 동안은 이상한 마니교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하여 여러 가지 희한한 관습들을 따라가기도 했다. 그동안 그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환상을 보여주셨고, 그녀는 기도 중에 눈물을 흘렸다. 아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있는 것과 그의 얼굴이 변화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들이 32살에 그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기까지 그녀는 9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교회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다고 항상 말했다.


(4)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10절)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끌어안고 다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결정해야 할 문제들을 앞에 놓고 근심한다. 그것이 중대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다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37:5)라고 말한다.


(5)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시고 (11절)/

이 구절은 성도들의 영적인 양식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근본적인 필요들을 언급하신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구절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 즉 음식, 건강한 육체, 좋은 날씨, 집, 가정, 아내, 자녀들, 좋은 정부, 평화 같은 것”을 지칭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내가 염려하는 모든 것을 염려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자기들의 염려와 걱정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 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을 듣고 싶어하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염려에 대해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단,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면 말이다.


(6)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12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어떤 사람들은 “왜 용서를 위해 기도해야 하나요? 십자가 앞으로 나아올 때, 이미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용서받지 않나요?”라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가장 도움이 될만한 비유를 요13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몸소 보여주셨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 씻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베드로는 “그렇다면 제 몸 전부를 씻어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에게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다.” 이것이 용서의 그림이다.


십자가로 나아올 때 우리는 용서를 받고 완전히 깨끗하게 된다.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하나님과의 우정을 더럽히는 일들을 하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변함이 없지만, 우정에는 발에 묻히고 다니는 먼지로 인해 때가 타게 된다. 매일, “주님,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이미 깨끗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다시 목욕할 필요는 없지만, 매일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필요하다.


또한 우리가 참으로 용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에 대해 용서해줄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남을 기꺼이 용서할 수 없다면, 우리 자신이 용서를 모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마6:14-15).

(7)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13절)/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시지만(약1:13), 우리가 악에 어느 정도까지 얼마나 노출되는가는 통제하신다(예를 들어 욥1,2장).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약점이 있다. 그것은 두려움, 이기적인 야망, 욕심, 교만, 정욕, 남의 말하기, 냉소주의 혹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약점을 안다면, 불필요한 유혹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다.



5. 언제 기도해야 하는가?


1)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할 것을 권면한다(살전5:17, 엡6:18)

*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2) 모든 곳에서 기도할 수 있다. 지하철, 버스, 차 안에서, 길을 걸으면서, 침대에 누워서, 한밤 중에,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시간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1) 혼자 있을 때에 (마6:6)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 예수님의 모범/ 막1:35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2) 하루 중에 가장 좋을 때


(2)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18:19)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기도는 기독교의 중심부에 있다. 기독교의 중심부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인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말을 비웃는다.

우리의 수고를 조롱한다.

그러나 기도에는 벌벌 떤다.

















알파토크6/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결혼, 자녀, 시간 사용, 직장, 가정, 돈, 베풀기 등에 대한 결정과 맞부딪친다. 이중에 어떤 것은 매우 큰 결정이며, 어떤 것은 사소한 것이다. 많은 경우에 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인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결과다.


1. 하나님은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심.


1) 그는 그와 함께 걷는 사람들을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시32: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2)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요10:3,4 )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 는고로 따라 오되“

3) 그는 우리가 그분의 뜻을 발견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골1:9; 엡5:17)

   골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엡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우리 삶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주 작은 것부터 큰 일까지 알려주시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해 정말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것을 바라신다. (엡2:10)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다. (롬12:2)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하나님의 계획은 재앙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주시는 계획이다. (렘29:11)

    렘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3.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싶으면 하나님께 여쭈어보아야 한다. (이사야 30:1,2)


1)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한 것은 죄다 (사30:1,2)

    이사야 30: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찐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2) 예수님의 본보기/ 예수님은 끊임없이 성령에게 이끌려 다시셨고(눅4:1), 그의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었다.(요5:19)

* 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4. 하나님은 그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를 인도하신다.


1)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 자신의 뜻을 나타내주신다.

     개역     시25: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공동번역   시25:9   겸손한 자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표준새번역 시25:9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



2)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자신의 뜻을 보여주신다.

      개역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표준새번역)  시25:14 주께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의논하시며, 그들에게서 주의 언약을 확인하신다.

   (공동번역)   시25;14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생각을 털어 놓으시고 당신의 계약을 가르쳐 주                              시리라.


3) 기꺼이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눅1:38, 시37:5)

    개역   눅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공동번역)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표준새번역)      마리아가 말하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천사님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개역시   37:5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표준새번역)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께서 몸소 도와주실 것이다.

 (공동번역)          그에게 앞날을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께서 행해 주시리라.

  우리 주님은 우리가 기꺼이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 때에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결정 내린 것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분께서 몸소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화) 니키라는 한 친구가 먼저 예수를 믿었는데, 그와 사귄 여자는 불신자였다. 그래서 그가 기도하기를 자기와 사귄 그 여자 친구가 자기와 함께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말한대로 주님께 맡기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만약 이 관계가 옳지 않다면, 주님께서 멈추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만약 옳다면, 그녀가 봄학기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는 주님만 의지하고 그분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다렸다.  봄학기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들은 그날밤 파티에 함께 가기로 했다. 자정이 되기 직전 그녀는 드라이브하고 싶다고 했고, 그저 재미삼아 즉흥적으로 가야할 방향을 말했다.  ‘세 번은 좌회전, 세 번은 우회전,  그리고 3마일을 직진하고 멈추기“. 닉키도 놀이하는 기분으로 그 지시대로 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미국식 공동묘지였는데, 그 중앙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수백개의 작은 십자가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행복한 그리스도인 부부로 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우리가 기꺼이하고자 하면 하나님은 다음의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해가실 것이다.


*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들 ( 5 CS )


1. 성경을 통한 명령 ( Commanding Scripture )


1)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을 성경에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의 전반적인 뜻이 이미 성경 안에 계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분이 이미 말씀하신 기본적인 틀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예1)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이미 결혼했는데, “나는 이 여자를 너무 사랑해. 내 느낌에는 하나님께서 내 아내  

      와 이혼하고 이 여인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라고 인도하시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을 저버림으로 바르게 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즉, 출20:14절과 17절에 보면, “14절 간음하지 말찌니라......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예2) 돈을 절약하라는 인도를 받았으므로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야 할 세금은 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롬13:7에

롬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2) 하나님의 특별한 뜻은 언제나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 성경은 우리가 결혼한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독신으로 사는 것은 고귀한 사명이긴 하지만 그것은 예외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결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와 구체적으로 결혼해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 우리가 성경을 아무 곳이나 되는 대로 펴서 읽는다고 하나님의 뜻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매일 마다 규칙적으로 정성을 들여 성경을 읽어나갈 때에 우리가 처해 있는 특별한 환경에 맞게 하나님은 그분의 특별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해 나가신다.


(예) 니키 검블의 경우, 자기 직업인 변호사를 그만두고 성공회 성직자로 사역하기 위해 훈련을 받으라고 소명을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받았는데, 그는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느끼는 부분들을 읽어나가다가 표시를 해두었는데 무려 15회나 말씀을 통해서 인도를 받았다고 한다.


시10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30-133  130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131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133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2. 성령의 통제 ( Confrolling Spirit ) = 거역할 수 없는 성령(학습자 지침서)


인도는 매우 개인적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들어오셔서 살게 된다. 그리고 우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요10:3-5에서 그의 양들(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전화에서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 내가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일수록 상대방 목소리를 금방 알아들을 수 있다. 반대로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목소리를 알아듣기가 힘들고 시간도 걸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잘 알게 될 수록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기가 더욱 쉬워질 것이다.


행16:7에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전하기 위해서 그의 동료들과 함께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지만 예수의 영(성령)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길로 갔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의 영의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분간하지 못했다면 계속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 얼마나 행했는지 모른다. 사도 바울팀에게 성령께서 정확하게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다음 몇 가지 방법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여기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말씀하시는 방법 3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1)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기도는 쌍방간의 대화다. 내가 의사에게 갔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선생님, 전 여러 곳이 아파요. 발톱 밑엔 무좀이 자라고 있구요, 치질도 있어요. 눈도 아프고, 감기주사도 맞아야 할 것 같아요. 게다가 등도 너무 아프고

테니스 때문에 팔꿈치에 관절염이 생겼어요.” 그리고는 불편한 사항들을 다 말했으니 시계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시간이 벌써 다 됐네. 아, 가야겠어요. 제 얘길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다면, 의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요. 왜 내 이야기는 듣지 않고 가려고 하지요?”

  우리가 실수하는 것은 주님께 물어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걸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내가 이것을 하기 원하시는 지는 잘 모르겠어.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것이 나를 위한 하나님이 뜻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옳다고 고집을 부릴 때 보다는, 그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기도할 때 말하기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1) 바나바와 사울의 예 (행13:1-3)/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다.


물론 이 경우에 성령께서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셨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들이 기도하는 중에 그런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을 것이다. 하나님은 보통 그런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때로 그것을 ‘강한 인상’ 혹은 ‘뼈 속에서 부터의 느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성령은 이 모든 방법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생각과 느낌을 시험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일4:1).

*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   

           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지금 그 생각이 성경과 일치하는가? 사랑을 키우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 리가 없다 (요일4:16).

*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또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인가 (고전 14:3).

*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그렇게 결정을 내렸을 때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가? (골3:15)도 살펴보아야 한다.

*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2)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강한 소망(소원)을 주심으로써 말씀하신다.

*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내어드리면 그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종종 우리의 소망을 바꾸어 놓으신다.

 (예) 닉키 검블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그는 영국 국교의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고 주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을 때, 닉키는 자기 소망(소원)이 바뀌게 되었고 지금은 현재 하고 있는 일 이상의 더 큰 특권이나 더 만족스러운 일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강제로 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예를 들어 “내가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하나님은 나를 선교사로 만드실지도 몰라.” 이렇게 겁을 집어 먹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것이 당신이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고, 당신의 의지가 하나님께 드려졌다면 하나님은 그 일을 하고 싶은 강한 소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때로 특이한 방법으로도 인도하신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개개인을 극적인 방법으로 인도하신 예들이 많이 있다.


(1)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하나님은 사무엘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 그가 육체적인 귀로 들을 수 있도록 말씀   

    하셨다.(삼상3:4-14).

(2) 천사를 통해서/ 아브라함(창18장), 요셉(마2:19), 베드로(행12:7)를 천사를 통해 인도하셨다.

(3) 예언을 통해서/ 아가보의 예언(행11:27,28; 21:10,11)

   27절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4) 환상을 통해서/ 바울이 밤에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간청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의 일행을 마게도냐에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인도라고 확신하였다. 

   행16:9,10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5) 꿈으로/ 요셉의 경우(마1:20; 2:12,13,22)

마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2:12,13  12절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13절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3. 상 식 (Common Sense)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상식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1. 구약의 경우/

시편기자는 경고한다. 시32:9에 “재갈과 굴레를 씌워야만 잡아 둘 수 있는 분별없는 노새나 말처럼 되지 말라.”


2. 신약의 경우/

신약성경에서도 여러 번 자주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격려한다. 이성(mind)을 사용하는 것을 제재한 적이 한번도

없다.  예를 들어 딤후2:7에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3. 실례(1) / 결혼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

다음 3 가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1) 두 사람이 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가?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과 결혼해야 한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삶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고후6:14).  현실적으로 둘 중의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닐 경우, 거의 언제나 결혼생활에 큰 갈등이 생긴다. 그리스도인 배우자는 그의 동반자를 섬기고 싶은 마음과 주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조화는 두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이라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단순히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되는 시험을 통과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보다는 각자가 상대방의 영적인 면을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2) 우리는 인격적으로 조화를 이루는가? 분명 결혼 상대는 좋은 친구여야 하며, 공통점이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      암3:3에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했다.


3) 우리는 육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가? 이 말은 서로에게 매력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확학반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것을 가장 첫째로 꼽지만 이것은 우선순위에 맨 마지막에 온다. 세상 사람들은 성적으로 조화를 이루는지 알기 위해서 함께 자 봐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리다.


4. 실례 (2) / 평생의 직업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

이때에도 상식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는 이미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일을 하라고 부르시기 전까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고전7:17,20,24).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직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는 인생을 멀리 내다보는 것이 상식이다. 10년, 15년, 20년을 내다본 후에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 “나의 현재 직업은 나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내가 결국 가고자 하는 곳이 그곳일까? 아니면 나의 먼 훗날의 비전은 전혀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그곳에 닿기 위해 지금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4. 성도들의 조언(상담) (Counsel of the saints)


잠언서에는 지혜로운 조언을 구하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잠12:15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이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

          (표준새번역 잠12:15)

잠15:22  의논 없이 세워진 계획은 실패하지만, 조언자들이 많으면 그 계획이 이루어진다 (표준새번역)

잠20:18  계획은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세우고, 전쟁은 전략을 세워 놓고 하여라 (표준 새번역)

1) 결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조언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나 선택과 결정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떠 넘기거나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탓을 남에게 돌릴 수도 없다. ‘성도들의 조언’이 하나님의 인도의 일부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일을 추진하는 것이 옳을 때도 있다.


2) 경건한 그리스도인들과 상의하라/ 그러나 조언이 필요한 선택에 부딪쳤을 때 누구와 의논을 해야하는가? 잠언의 기자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좋은 조언자는 지혜와 경험을 갖춘,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다.

3) 조언을 구할 사람을 선택할 때 주의할 점은, 자신이 이미 마음에 정한 것에 동의해 줄 것인지를 기준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결정을 지지해 줄 사람을 찾아내려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구한다. 그런 조언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5. 상황적인 증거들 (Circumstantial signs)


1. 모든 사건들의 궁극적인 통제권은 하나님께 있다. (잠16:9)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표준새번역)


* 어떤 때 하나님은 문을 닫으시기도 한다 (행16:7)

* 또 다른 때는 하나님은 문을 여시기도 한다 (고전16:9)

  고전16:9 나에게 큰문이 활짝 열려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대적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표준 새번역)




결 론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서,


1. 서두르지 말라. 하나님의 인도가 구하는 즉시 올 때도 있지만, 훨씬 더 오래 걸릴 때가 많다. 한달, 심지어 몇

   년이 걸릴 때도 있다.  아브하람과 같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는 오래 참은 끝에 그 약속을 받았다.

* 히6:15  아브라함은 오래 참은 끝에, 그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의 경우 - 인간적인 방법을 시도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함/ 물론 아브라함이 기다리다가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라는 유혹을 받았고, 그것은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창16,21장).


2) 요셉의 경우 - 하나님은 요셉에게 17세의 어린 소년이었을 때에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말씀하셨다. 아마도 그는 그 꿈이 당장 이루어지기를 기대했겠지만 처음 꾼 지 13년이 지났을 때에야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준비의 일부였던 것이다.  (창37, 50장).


인도와 관련하여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에 실수를 저지른다. 때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의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요셉처럼 그 시기를 잘못 판단하기도 한다. 때로는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후에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기를 인도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 주님은 멋진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남은 생애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을 가지고 좋은 것을 만들어 내실 수가 있다. 그 시간이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회개하고 바르게 고치고 그분께 내어 드리고 그분과 협력한다면 그분은 얼마든지 나를 회복시키실 수 있다.


욜2:25에 

25 "메뚜기와 누리가 썰어 먹고 황충과 풀무치가 삼켜 버린 그 여러 해의 손해를, 내가 너희에게 보상해    

    주겠다. 그 엄청난 메뚜기 군대를 너희에게 보내어 공격하게 한 것은 바로 나다. (표준새번역 욜 2장)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개역성경 욜 2장)



(예화) 보로딘과 그의 딸의 피아노 연주


한 신사가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런데 복도 아래 피아노에서 한 소녀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데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음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한 남자가 그 옆에 와서 앉더니 빈곳을 매워주면서 함께 연주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너무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그 소녀 옆에서 피아노를 친 사람은 그 소녀의 아버지이자 유명한 작곡가인 알렉산더 보로딘이었다.


이 예화와 같이 우리가 더듬거리며 우리가 부분을 연주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 분의 명령을 듣고 상식을 사용해서 생각하고, 성도들의 조언을 구하며 환경적인 증거를 구하면서 나가면서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뜻을 구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 곁에 앉으셔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으로 만들어주신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묘사했다.


롬8: 28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표준 새번역)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하나님은 우리의 ‘뚱..... 땅,... 쿵’ 거리는 소리를 가지고 우리 삶을 아름답게 연주하시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주신다.


<유모 예화>

■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구할까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구할까?" 라는 질문에서 모 대학 학생들은 이렇게 답했다.

화학과 : 소금을 잔뜩 풀어 놓으면 강물의 밀도가 커져서 사람이 뜬다. 그때 사람을 구한다.

화학과대학원 : 강물을 전기분해하면 산소와 수소로 분리된다. 그때 구한다.

건축학과 : 상류로 올라가 댐을 쌓는다.

광학과 : 오목거울과 볼록렌즈로 햇빛을 집중시켜 강물을 증발시킨다.

지리학과 : 25,000 : 1 지도를 구해 수심이 얕은 곳을 찾아 물에 빠진 사람이 그쯕으로 떠내려 올때까지 기다린다.

항공학과 : 커다란 선풍기로 물에 빠진 사람을 건너편 강둑으로 날려 보낸다.

의상학과 : 물먹는 하마를 엄청나게 강물에 넣는다.

교육학과 : 물에 빠진 사람에게 큰소리로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체육학과 :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쳐가 “수영은 이렇게 하는거야” 하고 가르쳐준다.

신학과 : 강물이 두 갈래로 갈라질 때까지 기도한다.

철학과 :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도 사람이다. 고로 그는 죽을 것이니 애써 구할 필요없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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