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교실

[스크랩] 21세기의 도전과 한국교회 선교의 과제

열국의 어미 2008. 7. 15. 11:09

21세기의 도전과 한국교회 선교의 과제

 

- "여백의 영성"은 창조, 자유, 다양성을 숨쉬게 한다 -

 

 

      

1. 21세기 도전과 목회 신학적 통찰

매 시대는 인간의 상황이 내포한 과제를 지니며, 교회로 하여금 복음의 빛에 의한 그 신학적 응답을 요청한다. 그러나 매 시대는 전 시대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의 흐름처럼, 공기의 파동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름 8월중에 입추와 처서라는 절후가 이미 들어와 있듯이 20세기 안에 이미 21세기는 들어와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의 특징은 그 문화 사회적 변동속도가 매우 중층적 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사회는 아직도 봉건적 잔재인 권위주의, 관료주의, 비합리적 운명주의 등이 지배하기 때문에 중세적 의식구조에서 계몽주의적 근대 시민사회에로의 철저한 전환이 요청되고 있다. 이것을 제1차 파동 의식전환이라 부르자. 제1차 파동 의식전환에서 핵심 되는 문제는 봉건적 권위체계와 전통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확보하는 문제이다.
    다른 한편, 우리사회는 지난 1960년대 이후 급속히 진행된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인간소외" 현상의 치유 문제를 안고 있다. 전통가정과 협동적 농촌사회의  "(공동체)게마인샤프트"가 해체 붕괴되고 이익사회인 "(사회)게젤샤프트" 형성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비인간화 문제"가 제기하는 목회적 과제가 여전히 심각하다. 이것을 제2차 파동 의식전환이라고 부르자. 여기에서 핵심적인 과제는 비인간화된 사회의 구조적 악으로부터 "정의"를 담보해 내는 일이다.
    또 다른 한편, 우리사회는 21세기의 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화사회, 국제화 세계화의 정치 경제 문화 충격 속에 휩쓸려 있다. 전통문화가치 만이 아니라, 전통적 사고방식의 전환을 강요받고 있다. 자연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와 책임에 대해서 갖는 견해,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과 한계에 대한 자각, 종교적 초월경험과 죄책감에 대한 영적 질문 등등에서 일종의 "패러다임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을 제3차 파동 의식전환이라고 부르자. 여기에서 핵심적인 과제는 문명 그 자체가 문명의 토대인 자연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창조질서의 평화" 를 회복하는 문제이다.
교회가 위치하는 곳이 어디이든지, 교회를 구성하는 회중들의 사회 신분계층이 어떠하든지 한국교회의 목회 선교적 사역은 위와 같은 제 1·2·3차 파동이 중층적으로 혼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일깨우고 바르게 지키며, 바르게 푸른 초장과 목장으로 인도하는 목회적 과제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게 된다. 문명사회 세 가지 측면에서 오는 도전의 본질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2. 현대 자연과학이 제기하는 창조적 도전들

오늘날 과학적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은 일반적으로 양자역학이라고 일컫는 과학의 혁명적 전환에 기초하고 있다. 양자역학은 원자이하의 미시세계에서 대상의 "측정" 문제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전 역학적 현상은 자연 대상물이 "측정"과 무관하게 관찰자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불변적인 물질적 질량, 속도, 거리등을 등가적으로 지닌 채 존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양자 역학은 "측정"자체가 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깨달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측정장치, 측정방법, 심지어 과학자의 측정의도가 대상실재에 영향을 준다는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고전 물리학에서 철칙처럼 받아드려졌던 "인과적 결정론"(뉴톤/라플라스)의 부정이다. 그 결과 "불확정성 원리"(하이젠베르그), "상보성 이론"(닐스 보어), "파동함수론"(슈뢰딩거) 등 "실재"를 해석하는 새로운 이론과 패러다임이 출현하였다.
    그러한 양자역학의 여러 이론들은 단순한 이론차원에 머물지 아니하고, 오늘날 기술공학적 차원으로 발전하여 구체적으로 반도체 산업, 단백질 합성, 레이저나 광학섬유 등등 인간의 삶의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과 생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켜 가는 문화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자연과학의 연구결과는 신학의 미래에 어떤 과제를 주고 있는가?

   첫째, 물질과 정신의 상호관계성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근세의 데카르트의 心身二元論이나 현대 생물학적 인간학의 일원론은 인간현상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 현상이 물질의 창조적 진화 정점에서 나타난 정신현상이라고 할지라도, 생겨난 정신현상은 물질과는 전혀 다른 고유한 특성 즉 물질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성, 정신현상, 그리고 그것들이 물질적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방식등 상호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요청되고 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입김을 그 코에 불어넣으니 생령(산 생명)이 되었다"는 창세기 2장 7절의 인간창조설화는 근세 데카르트의 물질/정신의 이원론적 실재관에 걸맞도록 논리 비약적으로 짜집기 당하여 이원론적 인간관이 기독교 신학 안에 정착되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인간의 코에 불어넣는 "생명의 입김" (너샤마)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하는 실재 곧 정신이 아니며,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으니 "살아있는 생명체"(네페쉬-하야)가 되었다는 것은 영육 통일체로서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현대과학은 기계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자연-인간-창조주의 초월적 관계성성과 각각의  분리성을 강조하는 대신에 "天地人" 三材의 내재적 관계성과 각각의 구별성을 인정하는 전일적 이고도 유기체적인 실재관을 요청하고 있다.
비생명적 물질 중심적 형이상학으로부터 생명 중심적 형이상학에로의 전환을 요청 받고 있다. 하나님과 세계(인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초월적 개입자" 라기 보다는 "내재적 초월자"로서 재정의 되기를 요청하고 있다. 엄정한 인과율에 입각한 시간과 공간의 분할적 실재관에서 부터 비인과적 동시성을 수용하는 非局所的(nonlocality) 실재관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양자 역학의 도전을 신학적 용어로 재 표현한다면, 하늘과 땅은 그 차원을 달리하지만 결코 분리되어 따로 독립하는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전일적 실재의 다른 차원일 뿐이며, 하나로 통전되어 있는 실재의 양면이므로, 땅의 평화와 구원 없이 하늘의 평화와 구원의 완성은 불가능하다는 말인 것이다.
  
    셋째, 새로운 실재관의 패러다임에 걸 맞는 발상법의 전환이 신학적 인간학과 성령론적 창조신학의 영역에서 특별히 요청 받고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정통신학의 원죄론과 전적 타락론은 인간성 안에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창조의 영의 "내재적 초월"을 위한 여지를 말살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근대 인간학에게 생물학적 인간학, 유물론적 인간학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교회가 창조의 영이신 성령을 구원론, 속죄론, 교회론에 국한시켜 교회 안에 독점 유폐시킴으로서, 세계는 창조의 영이 떠나버린 물질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신학적 인간학과 성령론의 새로운 정립을 요청하고 있다. 그 방향은 "초월적 내재" 못지 않게 "내재적 초월"을 강조하는 방향이다.  "구원론적-교회론적 성령의 신학" 못지 않게 "창조론적 성령의 신학"의 형성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초월적 내재"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강조점이 놓이고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초점이 사후세계나 초자연 세계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내재적 초월"의 신학은 세계와 피조물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과 존재의 감사에 눈뜨게 된다. 몸으로 모신 하나님이 강조되게 된다. 인간과 생명 있는 것들을 창조해 가시고 지탱 보존하시는 창조주의 영광에 동참하는 찬양의 순례자가 된다. 교회의 시공간에 유폐 당한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를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가시는 새로운 우주생명의 "새순" , "전진기지", "처음 익은 포도주 항아리"로서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이해하고 그분의  경륜에  동참하기를 요청한다.  
 

3. 문화의 다원성으로부터의 도전과 신학의 미래

고전적 정통신학에 의하면,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어야 하며, 그 진리에 대한 이해의 접근방식과, 구원체험의 패러다임도 오직 하나이어야 한다는 단일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현대인의 실재관은 변화되었다. 인간존재의 역사성과 문화의 제약성, 진리이해의 해석학적 과정에 대한 성숙한 자기 통찰이 점점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동남아 여러 나라들과 세계 여행이 빈번해 지면서 "세계는 다양한 문화와 삶의 방식이 있구나"라고 깨닫게 되어간다. 삶의 체험은 다양해야 하며, 진리체험과 표현의 양식도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현대문화의 특징은 다원사회이며, 다원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지구촌의 인간문화교류가 형성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형성해왔고,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왔던 한국의 종교사와 종교문화유산들을 어떻게 대해야 보다 복음적인가를 분별해야하는 시점에 이르고 있다. 특히 제 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와 세계교회협의회 7차 총회 캔버러회의(1991)이후 종교신학의 과제는 회피할 수 없는 중요한 신학적 과제가 되었다. 문화의 다원주의, 종교체험의 다양성이 신학의 미래에 던지는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보다도 문화와 삶 체험의 다원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발상법의 전환이 요청된다.
진리체험과 실재체험의 다원성의 근거는 두 가지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우심과 신적 생명의 무궁 무한하신 풍요성이 다원성의 근원이 된다. 또한  인간의 존재양식이 지니는 역사적, 문화적, 해석학적 제한성이 다양한 경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절 자연과학의 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의 자연이해 패러다임에서 보듯이 ,빛의 이중성은 좋은 예인 것이다. 빛의 상질은 빛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실험장치와 실험방식과 자연과학자의 실험의도에 따라서. 파동현상으로 또는 입자현상으로 나타나 체험된다.
빛의 이중성이라는 말뜻을 좀더 정확히 이해한다면, 빛이 입자가 될 수도 있고 파동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실험방식과 측정도구의 설치 즉 관측작업의 변화에 따라서 어떤 때는 파동적 성질을 볼 수 있는 것이고, 다른 경우에는 파동적 성질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엄밀하고 객관적이라고 믿어왔던 자연과학적 진리도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과 틀, 곧 하나의 자연해석과 설명을 위한 패러다임에 의존적이라는 것이 오늘날 밝혀졌다.  정신과학적 진리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이론에 의하여 보여지는 새로운 자연이해가 출현했다고 해서, 그 이전의 고전적 뉴톤 물리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을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다른 것뿐이다. 양자물리학의 패러다임은 보다 미시적 세계의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탁월한 강점이 있고, 뉴톤 물리학의 패러다임은 거시적 세계의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더욱 적합하다. 자연을 이해하는 자연과학의 패러다임이 변화한다고 해서 자연 그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서 자연을 이해하는 자연과학자에게 자연은 새로운 모습으로 보이고 체험된다. 위에서 언급한 논리는 정신과학 일반과 심지어 구원체험을 본질로 하는 종교의 다양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체험은 성경이 증언하는 구원패러다임 안에서 가장 온전하고 확실한 구원체험을 경험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구원 패러다임에 관심을 안가질 수도 있고, 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종교는 비진리 심지어 우상종교라고 속단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인류문명은 ,기독교의 배타적 독선주의, 독단주의를 시정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진리와 구원체험의 절대성, 궁극성, 유일성을 고백하는 것은 충분히 인정하고 또 그리해야 한다고 보지만, 다른 종교 안에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체험, 진리체험이 있어왔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아니 된다는 충고를 오늘날 세계는 기독교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오늘 세계신학계의 선구자들은 세계교회협의회 종교 대화국의 "바아르선언문"(Baar Statement,1990)이 선언하는 것처럼, 신비로우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경륜과 활동을 기독교인들이 제한 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보수적 정통신학 견지에서 보면 불교, 유교, 이슬람교, 천도교 등 타종교는 하나님의 구원계시가 결여된 자연종교이거나 인본주의적 도덕종교이며, 오직 기독교만이 계시종교라고 주장해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 활동과 성령의 현존을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도교 교회사 안에 국한시켜왔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인간이 임으로 제한시키는 신학은 잘못된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오늘날, 종교다원현상을 보다 열린 복음정신에서 재해석하려는 종교신학의 진지한 노력이 불행하게도 종교혼합주의 이라거나 기독교신앙의 상대화라거나, 심지어 복음선교 열정의 약화 내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매도되거나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가 용납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초청되었다는 사실을 교회가 선포 증언하는데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철저한 복음신앙의 깊이에 투철하지 않는 사람은 타종교의 진리체험에 대하여 개방적일 수 없다. 다가오는 21세기 사회는, 특히 아시아의 문화 다원적 사회는 19-20세기 유형의 기독교문화 정복론적 선교정책이나, 타종교 배타론적 선교정책을 가지고서는 30억의 아시아 인민들을 복음으로 끌어안아 인도 할 수 없을 것이다.

 

 

4. 생태계위기와 자연파괴 현상이 종교에게 촉구하는 것

교회의 가장 절박한 문제는 자연 생태계파괴로 인한 지구 생명의 멸절 위기로부터 "창조질서, 창조세계의 통전성" (Integration of Creation)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 일은 환경오염방지와 생태계파괴 속도를 줄일 수 있는 과학적 접근만 가지고서는 불가능하다. 인류문명의 총체적 "메타노이아"가 요청되고 있으며, 새로운 금욕주의 문화의 출현, 새로운 영성적 각성과 생명문화의 출현을 요청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러한 운동의 선도자로서 기능 해야  하는 그리스도교 교회공동체가 자본주의적 상업주의 문화논리구조 곧 생산소비의 가속화-재생산 개발증대-환경파괴-성장 성공 신화의 구조 속에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바울사도의 권면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명령이다. 단순한 삶의 추구, 무한욕망충족을 절제 할 줄 아는 정신적 내면성 함양, 유연성과 감수성의 개발교육, 지속 가능한 개발과 자연의 생태순환구조 에로의 적응, 외양적 종교의례나 조직기구의 현란함에 대한 유혹의 극복, 단아하고 숭고한 종교적 품격함양 등이 새로운 시대의 영성훈련의 목표이어야 한다.
 올해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되는 해 이어서 각계에서 동학 농민혁명에 대한 각종 연구와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운동에 대한 사계의 관심이 주로 사회 경제사적인 민중운동 측면에 조명 초점이 맞추어 졌고, 동학 운동의 시원이 되는 수운의 종교적  체험과 그의 종교사상의 본질에 대한 연구가 소홀히 되어진 것은 유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동학의 핵심주문인  "강령주문" 23자중에서 "시천주"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신앙과 한국전통종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동학사상과의 "지평융합"이 우리들의 교인들의 회중 마음속에서는 이미 이루어져왔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동학의 강령주문 23자는 다음과 같다.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 지극한 기 여기 이 몸에 접하여 크게 강림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눌님을 모실지니 그리하면 자연스레 만물이 제덕에 합하고, 영원히 잊지말고 지성으로 모시면, 만사를 환히 깨달아 알게 될 지로다"

위의 주문을 "강령주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체인 지극한 우주적 영, 至氣의 임재와, 임재하는 하느님을 바르게 경험하게 되는 종교체험의 현상과, 신도의 신실한 믿음의 다짐과 그러한 믿음의 생산적 결과를 가르치는 주문이며 기원문이기 때문이다.

    위 강령주문 중 핵심인 "侍天主" 三字를 최제우 자신이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 同事者也.
    " 모신다는 것은 , 몸 안으로는 신령한 기운이 있고, 몸밖으로는 氣化가 있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 각자가 옮기지 아니할 실재임을 안다. 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처럼 섬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위에서 언급한 "侍天主" 三字는 동학 최제우 종교체험의 핵심이고, 동학을 유불선 三敎로부터 구별해주는 핵심적 사상이다. 후일 동학이 천도교로 교명을 바꾸고, 손병희 등 개화된 천도교 지도그룹에 의하여 "시천주"는 "인내천"사상으로 더 많이 회자되지만, 본래 최제우가 쓴 동경대전 안에는 "시천주"라는 말이 나올 뿐 "人乃天"이라는 말은 없다. "인내천"이 본래 동학 사상의 "侍天主"에 대한 보다 자각된 종교철학적 표현임에는 틀림없지만, 발전이라고 보아서는 않된다. 만약 "인내천"의 사상이 "시천주"라는 원체험 위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면, 동학 또는 천도교의 사상은 종교철학적으로 세인들의 보다 넓은 호감을 얻을런지 모르나, 종교적 불씨를 잃어버리는 것이요, 그래서 마침내 동양종교의 거대한 범신론적 파도 속에 휩쓸려 버릴 위험을 언제나 안고 있는 것이다.
수운의 "시천주"사상이 없다면 동학사상은 수운이 유교로부터 물려받은 氣一元的 存在論과, 노장사상의 仙道的 無爲而化사상과, 불교가 가르치는 만유상호 유기적 연관성과 萬有同根同體 사상과, 무속적 주술치병 술을 종교 혼합적 방법으로 혼합시켜놓은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종교적 혼합사상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활화산의 산 에너지가 폭발 할 수 없다. 결국 동학이 동학이 되는 관건은 "시천주"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앞으로 미래 천도교의 종교로서의 생명력과도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첫째, "모신다"는 말의 첫 의미 "내유신령"이란 몸으로서의 사람 생명 안에 무궁한 우주 생명력이요  至氣이며 하느님이신 천주를 신령한 능력과 의미로서 현존하는 경험을 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추상적으로 두뇌로서 인지하는 인식론적 행위가 아니다. 동시에 단순한 감정의 흥분상태이거나 심미적 합일감에서 오는 도취가 아니다. 또한 실천이성의 양심의 소리로서 도덕적 지상명법으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수운의 "시천주"에서 중요한 점은 하느님의 내주를 사람의 몸으로서의 전체생명을 매개로 하여 직증하는 종교체험 현상을 일컫는다. 몸 전체로 체험하는 전일적 시천주 체험은 지성, 감성, 덕성이 혼연일체가 된 전인적 신 체험이다.

둘째, "모신다"는 말의 둘째 의미 "외유기화"란 위와 같은 신 체험이 신앙인의 주관적, 내면적, 개인적 체험으로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령한 무궁생명력 곧 至氣의 현존이, 나의 생명체 구체적인 몸의 삼투막을 넘다들면서 우주 만물의 생명활동과 연계되고 창생적 활동 속에 있음을 감지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명 생성의 창조적 과정이 우주 자연의 무궁한 생명 창생활동과 단절된 일이 아니라, 그것과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고 관련되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증한다는 경험이다. 이러한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 체험은 기독교인들의 성령체험과 대조된다. 본래적 성령체험은 성령의 주관적 소유화이거나 내면화가 아니라 만물의 샬롬 실현을 위한 열려진 존재에로 인간을 변화시키지만, 왜곡된 성령체험에서는 흔히 영 체험자와 성령간의 은밀한 내면적 개인관계에 그치고 마는 단점을 본다. 이러한 잘못된 성령체험의 내면화, 사유화, 종교화, 이원화는 수운의 "시천주"체험에 의해볼 때, 비판받아야 하는 점이다.
   
셋째, "모신다"는 말의 셋째의미는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는 것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다소 불명확하고, 그 해석도 다양하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각자 알기를 옮기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뜻은 무엇일까. 무엇을, 또는 어떤 사실을 옮기지 아니한다는 말인가.  야뇌 이돈화의 해석에 의하면, 지극한 우주무궁생명 곧 하느님은 간섭하지 않은 일이 없고(無事不涉) 명령하지 않는 일이 없는(無事不命)  절대 무궁한 "내재적 초월자"이시고  "초월적 내재자"이신 생명의 현실성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그 무궁한 하느님의 생명법도와 뜻에 위반하고 지낸다는 것 자체가 개개 생명체 스스로의 재앙과 질병과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옮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최동희는 이러한 종교적 경험은 체험자 자신이 직접 몸으로 체험해야 하는 일종의 종교적 황홀경험이기 때문에, 말이나 문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전달하여 옮겨 질 수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 설명한다.  혹은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면, 이러한 무궁한 생명자체 곧 하나님의 현존은 한 개의 국한된 유한자가 아니라, 온 우주를 가득 안팎으로 충만하게 채우고 만물들을 창생해 가는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공간적 장소이동을 전제로 하는 옮긴다는 개념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넷째, "시천주" 三字중 마지막 글자 主라는 글자의 의미는 영원무궁한 생명의 활동자 창생자가 단순한 理法이거나 자연의 法則이거나 우주생성의 原理가 아니라 존경과 경외와 기도와 예배의 대상이 되는 인격적 ,초인격적 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운 최제우는 당시 서학의 천주호칭이 감내해야 하는 이단사설로서의 위험부담을 충분히 감지하면서도, 그는 천주라는 하느님체험의 한문글자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학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사상을 일별 하였다. 2세교주 해월 최 시형의 "事人如天", "以天食天","養天主,體天主", "向我設位", "物人神 三敬思想"등등은 모두 시천주 사상을 기초로 할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하게 되었다. "한살림 운동"을 일으킨 장일순의 생명운동과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모두 동학 시천주와 최시형의 생명외경사상 곧 우주 만물이 그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종교적 사상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연과, 인간과 ,하나님이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과정가운데 있다고 보는 이러한 동학적 실재관과 신관은 과정철학 특히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많은 통하는 점을 갖는다. 우리는 과정사상에서 자연, 인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리고 과정사상의 입장이 전통적 기독교의 견해나 동학의 견해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 아래에서 일별 하기로 한다. 

 

 

5.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세계와 신의 관계

알프레드 화이트헤드(1861-1947)는 영국 왕립대학에서 수학, 물리학을 가르치다가 그의 나이 63세 때, 미국 하버드대학교 철학교수로 초빙되어 ,현대철학사에서 신실재론이라 부르는 유기체철학, 과정철학을 집대성한 분이다. 그가 영국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교수하면서 버틀란트 럿셀과 공동 저술한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출판하여 관련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서들 중 "과정과 실재"(1929)는 현대철학의 고전이 되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을 유기체철학, 신실재론, 신형이상학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영국의 경험론적인 사유전통 곧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이며 경험적인 현실을 중시하는 분석적 경험주의 전통에 서면서도, 존재의 통일성, 전일성, 보편적 이념, 그리고 심미적 직관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20세기 양자물리학적 실재관을 철저히 이해하면서 자연 속에 나타나는 새로움, 창조성, 조화, 아름다움, 그리고 유기체적 관계성이 왜 일어나는 가를 설명하려는 새로운 우주론이자, 자연철학이다. 그의 유기체 철학 안에는 구체적 현실재와 추상적 보편자가 통전되며, 대륙의 관념론 전통과 영국의 경험론 전통이 통전된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은 정밀한 합리적 분석과 추론의 사유형태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상상력과 형이상학적 관념실재들이 융합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근본적 개념들은 "현실재"(actual entities), "영원한 이데아적 형상"(eternal objects), "창조성"(creativity), "영원한 무한 연장실재"(eternal extensive continum), 그리고 "신"(God)이다. 우리는 우리의 논제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하여 화이트헤드 과정 사상 중에서 신과 세계 현실과의 관련성에 집중하려고 한다.
 
   첫째,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과정사상은 성서가 증언하는 "살아계신 하나님 "의 역사-문화적 왜곡형태인 "유신론적 초월신"(theistic supernatural god)을 극복하여 실재의 창조적 과정 속에서 무수한 "현실재들"을 창조적으로 구성하는 "구체화의 원리"로서 현존하는 신 곧 범재신론(pan-en-theism)을 주장한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통상적으로 서구 기독교전통에서 생각하는 통속적인 "유신론적 초월신"은 항상 세계를 초월하여 있고, 세계에 맞서 있으며, 세계 위에서 군림하고 명령 심판하는 군주적 이미지를 지니고, 세계현실 속에서 경험되는 악과 고통으로부터는  초연한 신 곧 헬라철학과 구약 예언자들의 도덕신 개념이 결합된 일종의   종교철학적 산물이라고 본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가 전한 갈릴리 복음에서 보여주고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은 로마황제를 닮은 "통치자 황제 이미지"도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부동의 動者 이미지"도 아니고, 히브리 예언자들이 강조하는 엄격한 "도덕적 능력의 인격화 이미지"도 아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신은 모든 창조에 앞서있지 않고, 모든 창조와 더불어 있다". 화이트헤드의 신은 "구체화의 원리", "사랑의 유인자", "새로움과 창조성의 원천"이다.
 
   둘째,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과정사상에서는 만물은 끊임없는 생성과정이요 창조적 과정 안에 있다. 우주 자연의 과정은 무수한 "현실재" 들의 물리적 ,정신적 경험과 의미와 힘들이 보다 고도로 복잡하게 유기체적으로 형성 되어가는 "合生"(concrescence)과정이다. 현실세계는 끊임없이 무수한 현실재들(actual entities)이 연계(nexus)를 이루어가면서 합생(concrescence) 과정을 반복하면서 보다 발달한 조합적 사회(corporate society)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한 알의 씨앗도 무수한 현실재들의 합생적 조합사회이며, 씨앗이 발아하여 잎과 꽃을 피우면, 잎과 꽃 한 송이도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적 사회이며, 살아있는 나무는  더 큰 하나의 유기체적 사회이다. 화이트헤드의 신은 이러한 창조적 합생과정 속에 "구체화의 원리"로서 , "창조적 유인자"로서, 생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창조적 개방성의 가능성으로서 현존한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형이상학에 있어서  무수한 "현실재들"이 "연계"를 이루면서 보다 고차적인 "합생"을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서 이해하는 실재관은 불교적 실재관의 기본을 이루는 "인연생기설"(因緣生起說, Pratityasamutpada, the theory of co-origination)을 연상케 한다. 대승 기신론의 논지에 의하면 경험적 인식구조와 언어적 표현을 초월해 있는 眞如(실재, 본질계, 형이상학적 실재)와 生滅(현상, 시공 현실세계, 형이하학적 실재)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별도로 분리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도 유사한데,  신은 根源的 본성(primordial nature)과 果因的 본성(consequent nature)을 지니며, 그 양자는 구별되되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과 불교의 연기설 및 동학의 실재관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만물의 창조적 합생과정이 시간의 불가역성이라는 절대법칙 위에서 전개되는 前方位型의 線形的 도형이지만, 불교와 동학의 실재관 에서는 시간이 과거에서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기점을 중심으로 하여 사면팔방으로 질량적으로 확장되면서 거대한 주기적 순환운동 안에 있는 물결파적 모델이다. 불교의 실재관에서는 시간의 중심은 없고 모든 시공이  중심이면서 동시에 중심이 아니다. 동학의 실재관에서 만물은 시운의 우주적 주기율을 따라 순환하면서도 인간의 창조적 행위를 통해 새로움을 더해 가는 나선형의 구조이다. 비록 화이트헤드의 우주자연의 합생적 창조과정은 떼이야르 샤르뎅이 예견하는 우주적 오메가 포인트를 향하는 통일적 수렴점을 부정하고 다원적 단위형태의 多中心部를 형성하고 각각의 존재를 향유하지만, 시간의 불가역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화이트헤드 사상은 서구 기독교적 실재관의 영향아래 있다.
 
   셋째, 신과 세계와의 상호 공속, 상호 의존관계는 화이트헤드 신관의 특징을 이루며, 기독교 신관과 극명하게 대조되고 동학적 신관과 상응성을 갖는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신과 세계와의 관계는 이렇다: 신은 영원하고 세계는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이 참 이라면 ,세계는 영원하고 신은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도 참이다.  신은 유일무이하신 하나요 세계는 무수한 多로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라면, 세계는 하나요 신은 多로서 현시된다고 말하는 것도 참이다. 세계는 신 안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라면, 신은 세계 안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도 참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듯이, 세계는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도 참이다. 요컨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서 신과 세게는 二元論的 대립구조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兩極性的 상보구조 관계에 있다. 신을 "근원적 본성"의 측면에서 보면, 영원하며 무시무종하며 무제약적이고 절대 순수한 眞如法體에 해당하지만, 신을 果因的 본성의 측면에서 보면 시간적이고 제한적이고 상대적이고 세계의 새로움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희비애락에 참여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위대한 동반자"(God is  the great companion)이며,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고 동참하는 "고난의 동반자"( the fellow-sufferer who understands)라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6. 생태학적 윤리형성을 위한  창조적 과정 안에 계신 하나님의 고백

우리는 지금까지 동학과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안에서 창조적 과정 안에서 세계현실과 생명세계 현실과 불가분리적 관계 속에 있는 "창조적 과정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리고  통속적인 "유신론적 초월신론"이 오히려 성서의 살아계신 하나님 신앙을 왜곡 시켜 왔음을 보았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장부를 지으시며 어머니의 모태에서 인간을 조성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104:13-14)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는 분이 아니요 우리가 날마다 그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행17;28) 하나님은 생명의 영을 살아있는 모든 것들 위에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시며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시104:30)  그 한 분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엡4:6)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영"이시며, 만물을 끊임없이 새롭게 소생케하고 창조적 새로움을 맛보게 하시며, 창조 안에, 창조적 과정 안에서 역사하신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영, 성령이 구원론과 속죄론과 교회론의 맥락에서 주로 고백되어 온 것은 서방교회  전통에서 "필리오케"(filioque)구절을 "니케아 신조"에 삽입하기로 한 아아켄(Aachen) 종교회의 (809년) 이후부터이다. 성령의 발현에 관한 교리를 통해서 동서교회의 분열은 더욱 넓어지게 되었는데, 서방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발현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아들에게서도 발현된다고 생각하였다. "필리오케"(아들로부터) 라는 이 구절이 니케아 신조에 삽입되는 위치는 성령의 발현과 관련된 부분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상호 불가분리적 공속성과 일체성을 옹호하려는 동기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부와의 완전한 동질을 재확인하려는 논리적 결과였다. 기독론적 동기가 단초였지만 결과론적으로 성령을 아들에게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함으로서 "창조의 영"이신 성령을 그리스도의 구원진리를 확증하고 깨닫게 하며 담보하는 "구원의 영"으로 한정시켰고, 전 창조영역에서 활동하시는 창조의 영의 활동 영역을 교회의 영역으로 제한시켰고, 창조의 영이신 성령의 자유로운 해방과 갱신과 희망의 사역을 교회의 교권이 독점하게 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21세기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성령의 기독교 교회의 독점과 종교영역 안에 유폐시키는 성령의 "바벨론 포로 상태"를 회개하고 창조의 영으로서 복권시킴과 동시에 "창조질서의 보존"을 위하여 전 창조영역에서 함께 탄식하며 치유와 갱신의 활동을 펴시는 성령의 역사에 겸허한 맘으로 동참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성령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교회를 지배하신다. 교회가 선 곳에 성령이 입주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곳에 교회가 탄생한다. 선교사가 비기독교 문화 속에 들어가 개척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은 그 곳 사람들과 생명 들 안에서 창조와 구원의 사역을 진행해 오셨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중심주의적 창조론과 교회 중심적 성령론은 보다 넓고 깊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신앙과 "생명의 영"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최근 율겐 몰트만의 신학적 노작은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연계에는 "먹이사슬"이 존재하는데 이는 자연적 질서의 일부이면서 역설적으로 자연의 균형과 조화와 평형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윤리의 정의로움을 생명개체간의 완전한 평등이라는 의미로서 이해한다거나, 인간의 가치와 여타 동식물의 가치가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일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폐쇄적으로  닫힌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 장회익은 태양과 지구라고 부르는 항성-행성계 구조 속에서 매우 정교한 물리 화학적 여건을 갖추고 그 안에서 다양한 유기체적 전일적 생명을 이루며 생존해 가는 "온생명"(global life) 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온전한 하나의 독립된 생명단위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전 지구적 생명체로서 전체 생명, 유기적 관계 속에 있는 전일적 생명체가 있을 뿐이며,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은 그 유기체구성 과정에서 비교적 최근에 출현한 "중추신경계"에 해당하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므로 "환경위기"라고 말할 때, 환경이라는 어휘자체가 인간을 제외하고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 통례이어서 그러한 환경개념의 인식차원에서는 생태계 위기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환경"은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여건이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유기적 조직체의 다른 전체부분이기 때문이다.
  
     "온생명"은 지구역사 45억년 중에서 적어도 35억년의 생명시간을 지닌 하나의 유기체적 연관 구조 속에 있는 생명체이다. 깨어 있는 참사람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인간은 그 35억 년 생명진화 끝점에서 피어난 꽃이다. 단일 개체 생명으로 보면 인간의 생존기한은 80-90년에 불과 하지만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생명은 지난 35억 년의 생명의 전 역사를 지니며, 앞으로도 몇 억 년을 더 생존할 수 있는 생명이다. 이러한 "온생명"이 생존할 수 있는 절대적 법칙은 유기적 온생명체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는 순환의 원리, 절제의 원리, 분여의 원리이다.
   
     "순환의 원리"란 대자연계의 에너지 유통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한 거름과 밥이 되어주기 위해서 기꺼이, 유기체로서 생물학적 몸과 사용하는 물질적 재화를  자연의 기본구성 원소에로 환원시키고 다시 순환되는 리듬을 거역하지 않는 삶의 철학이다. "절제의 원리"란 무한 소유적 욕망, 물질적 정신적 영적  탐욕을 스스로 기꺼이 포기하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은 재화를 향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성공한 인생의 표식이라는 잘못된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분여의 원리"란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쪽을 채워주고, 모자라는 것은 함께 나눠 쓰고 공유함으로서 생명의 흐름의 氣가 정지하거나 부패하지 않게 하는 원리이다.
 9억 5천만 이상의 인간이 오늘날 인간의 최저 생활수준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매일 4만 명의 어린이들이 기아와 관련된 이유들로 죽어가고 있으며, 매년 3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간다. 세계인구 5분의 1일에 해당하는 최빈곤층이 전지구 생산재화의 2 %만을 수혜받고 있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세게 인구 5분의 1에 해당하는(5.5억) 사람들이 전 지구 생산물의 74 %를 소비하고 있다.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한가지 명백한 사실은, 현재 한국 사회의 중산계층의 생활수준을 만약 전세계 50억 인구가 누린다면 ,지구는 생태적 파산에 이르고 무서운 재앙으로 인해 지구 생명은 멸절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 사회 중산계층 이상의 삶의 양식은 본인의 윤리적 성실성과는 상관없이 이미 생태학적 위기의 조성자로서 범죄적 삶의 구조 속에 들어와 있는 "원죄적" 죄아래 있는 셈이다.
  
    인간 구원론에서 죄의식과 관련된 구원개념은 고대, 중세, 근세가 그 초점이 이동해 왔다. 고대에서 구원은 인간의 "덧없음과 무상성"으로부터 구원이며, 不死와 영혼의 영생을  목적으로 하는 구원이 갈망되었다. 중세기는 "악마성과 죄의 심판"으로 부터의 구원이 문제였고, 교회의 사죄권과 축성된 세크라멘트가 죄를 해독시키는 구원의 약이 되었다. 근세는 인간이 만든 사회적 환경의 질곡과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었다. 죄는 곧 "소외"였고 구원은 소외로부터의 해방 곧 화해가 그 핵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있어서 인간의 죄는 "자연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며, 구원은 "창조질서의 회복"이다.
   오늘날 생태학적 윤리의 정립에서 "절제의 윤리"가 얼마나 긴급히 요청되는 가 명백해졌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으로 포괄되는 문제들이 각각 유기적으로 연관된 문제들이라는 인식을 보다 명확히 하는 일이다. 경제적 활동의 생산소비 구조를 "순환의 원리"에로 전환시키는 경제 윤리적 행위, 정의로운 재화 분배가 평화롭게 이뤄지는 "분여의 원리" 에 따르는 사회공동체 형성, 그리고 "절제의 원리"에 입각한 삶의 양태자체가 정의 문제, 평화문제, 창조질서보존의 문제로서 서로 맞물려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사회정의 없이, 전쟁의 억제와 군비 경쟁없이 생태학적 윤리사회 실현은 불가능하다. 정치, 군사, 기득권 세력은 언제나 "국가안보", "국가경제 지표의 성장", "보다 안락한 과학 기술문화의 향유"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온생명"을 파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늘 논제의 잠정적 결론은 "생태학적 창조론"의 시각에서 자연, 인간, 창조주 하나님의 관계성에 대하여 보다 새로운 발상법으로 전환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해월 최시형의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는 명제를 농업 생산적 삶의 양식 속에서 수천 년간 살아온 아시아적 민중들이 몸으로 체득한 천주경외의 성례전적 표현이라고 충분히 이해하며, 시천주 사상이 모든 생명있는 것들을 하나님 모시고 있는 존재들로서 존경하여 생명경외 사상의 함양에 탁월한 실재관을 제공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창조세계와 창조주 하나님을 곧바로 일치시키는 범신론적 오류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창조 안에 내재하시고 특히 창조적 과정 안에 내재하시되 "창조의 영"으로서 자유하신 주체적인  해방의 영으로서 피조물 가운데 현존하신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독교적인 신관의 강조점은 "유신론적 초월신"으로 변질할 위험이 항상 있기 때문에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내재적 초월"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교회가 독점하려는 불신앙적 교만을 버리고, "창조의 영'이 탄식하시며 구원활동을 하시는 생명의 한 복판으로 나아가서 창조세계의 총체적 보전과 그 에 선교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세기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시대에 강조해야 하는 최고의 윤리적 경건은 "절제의 윤리"임을 다짐해야 할 것이며, "절제의 윤리"는 "여백의 영성"에서 나올 때라야 ,경직화된 퓨리탄적 윤리태도가 아닌 다함없는 새로움과 창조적 영성이 될 수 있다.
          

7. 에필로그: "여백의 영성"을 지향하면서

우리는 문명이 새로운 털갈이를 하지 않으면 인류가 지구에서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다는 역사적 카이로스에 서 있다. 한편 한국 근대 개화기에 들어온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으로 창조적 누룩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한국 기독교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도취하여 스스로 교만해진 맘을 회개하고 가난하고 단순했던 갈릴리복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그 동안  지녀온 고전적 신학과 선교신학으로서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선교하는데 이바지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시대 착오적이고, 정복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이고, 성공 지향적이고, 무한 경쟁적이고, 탐심에 병든 자본주의적 생리에 젖어있는 선교신학을 고집해서는 아니된다.
우리에게 별다른 새로운 선교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성적 회개와 참회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 영성을 "여백의 영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여백의 영성"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첫째,  "여백의 영성"은 우선 교조적, 독단적 사유방식에서부터 해방되어 갈릴리의 복음이 지니는 부드러움, 유연성, 탄력성을 지닌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적 권위주의와 굳어진 사유방식 때문에 그들의 심령에 부드러운 생명의 기운을 느껴볼 수 없도록 되기가 쉽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한 것과 거룩한 일"에 전문가가 되어 버린다. 거룩 앞에서는 전문적 목회자로서 "떨림과 황홀과 희열과 더듬거림"은 없어지고  차거운 수술도구를 들고 환자 앞에 선 전문적 외과의사와 같은 사람으로 변해질 위험이 있다.

    둘째, "여백의 영성"은 여백이 지닌 여유로움 때문에, 새로움이 그 안에서 운동할 수 있고, 창조적 운동이 꿈틀거릴 수 있는 정신적 ,영적 공간을 마련해 준다. 위대한 창조는 여백에서 생긴다. 하나님의 창조 역시 당신을 스스로 비우시고 그 안에 피조물을 받아 드림으로서만 창조가 가능했다. 성육신 또한 자신을 스스로 비우시고, 그 빈자리에 몸으로 태어나신 채우심이 있다. 비어있는 여백이 없으면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 창조적인 운동, 그리고 조화로운 안식과 쉼의 평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동양화는 여백으로 말하고, 여백을 숨쉰다. 서양화는 화폭의 공간을 사물로서 가득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 21세기의 영성은 여백이 많은 동양화를 닮은 동양적 "여백의 영성"을 기다린다. "여백의 영성"은 여백이 주는 여유로움과 자유 때문에 , 굳어진 중세 수도원의 엄격한 규칙생활이나 17세기 말 엄숙주의를 연상케하는 굳어진 퓨리탄 윤리와 같을 수가 없다. "여백의 영성"에는 자연스러운 질서와 조화가 있다. 스스로 절제하고 단순함에서 오는 아름다운과 자기 초월의 감정이 있다.

    셋째, "여백의 영성"은 그 여백사이로 넘나드는 생명의 기운과 햇빛과 물과 온갖 정신적-물질적 영양소 때문에, 생명의 유기체적 일체성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연대성의 영성이요, 유기체적 영성이다. 개체 안에 전체가 들어와 있고, 전체는 개체들의 파동으로서 스스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사회의 일부분이 병들고 구원받지 못한 채 남아 있는 한, 자신의 구원도 아직 미완성임을 알고 공동구원을 이룰 때까지 함께 고통하고 함께 울고 웃는다. "衆生의 病은 無明에서오지만, 유마거사 보디사트바의 병은 大悲에서 온다" . "여백의 영성" 은 삶과 죽음을 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 심화시킬줄 아는 영성이다.

  넷째, "여백의 영성"은 단세포의 구조로부터 우주 항성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생명운동이란, 그 무엇이 들어오고 나가는 "순환운동"과, 그 과정 속에서 이뤄지는 촉매적 "치환운동" 과 "상보적 운동" 가운데 있음을 직증하는 깨달음과 실천의 영성을 말한다. 권력, 재산, 지식, 재능, 체험 등 온갖 좋은 것이 순환되지 않고 촉매적 작용을 통하여 상보적 작용으로 서로 치환되는 작용이 그치는 곳에 죽음이 있다. 죽음은 막힘이고 정지이고 독점이지만, 생명은 뚫림이고 통함이고 흐름이고 나눠씀이다.

   다섯째, "여백의 영성"은 갈릴리 예수의 영성으로서, 갈릴리 민초들의 희비애락을 그의 가슴에 한 몸으로 끌어안으면서, 하나님과 온전히 동심원을 이루는 하나되는 경험의  영성이다. 그 "여백의 영성" 안에 자유, 정의, 사랑, 평화가 꽃핀다. 상대적인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영생하는 생명이 있다.
   전남, 광주지역엔 "무등의 영맥"이 흐르고 있는 줄 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허물어진 거룩한 교회의 제단을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 벽돌과 화강암으로 재건하는 제단이 아니라, 거룩한 불로서 거듭난 산 돌로서 재건되는 제단 말이다. 권력욕과, 명예욕과, 소유욕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목회자는 광야의 세 가지 유혹을 계속 받는다.

   "종은 종치는 자의 힘만큼 그에 상응하여 소리를 낸다"는 예술적 화두가 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경도 하나의 종이요, 하나님도 하나의 종이랄 수 있다. 종은 계속 치지 않으면 녹슬어서 울리지 않는다. 장엄한 큰소리이면서도 맑은 신앙의 종소리가 우리사회에서 들리지 않게 된지 오래이다. 우리 다시 한번  맑고도 장엄한 인간 구원의 종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정진하자. 목회자의 심령 속에서 그 종소리가 울릴 때, 그 종소리는 교회의 회중들의 심령 속에 들리고 그리고 온 민족 속에 들릴 것이다. "여백의 영성"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로 하여금 급변하는 세기의 전환기 속에서도 창조, 자유, 다양성을 숨쉬게 하며 ,새로운 시대 속에 능히 자기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면서 한 민족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지닌 생명과 진리와 은혜의 세계로 인도 할 것이다.

"여백의 영성" 훈련에 정진하는 자는 비로소, 그 심령이 가난해져서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 되고, 그의 심령이 맑고 깨끗해져서 하나님을 뵙게 되고, 작은 인간형제 안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영음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새 시대의 선교운동은 이 점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
글쓴이 : ♨대명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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