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방

[스크랩] 구성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 / 허호익 교수

열국의 어미 2008. 8. 5. 13:45

 


구성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 / 허호익 교수   



6세기경 시리아의 수도승들에 의해 수집된 아레오파고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의 저서 「교회의 위계」(Ecclesiastical Hierarchy )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세 가지의 길이 제시되었다.


정화의 길(catharsis: purification); 하나님과 거룩한 것을 사랑함

교화의 길(potismos: illumination); 성스러운 진리를 보고 앎

연합의 길(teleiosis-henosis; perfection); 단순한 완전성과 거룩한 관상을 즐김


이 세 길이 클레르보의 버나드,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등 가톨릭 교회의 대가들에 의해 기도의 세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보나벤투라(1121-1275)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순례」에서 기도의 3 방식을 체계화하여 제시하였다.



1. 구성기도(vocal pray): 정화의 길 pugative way


 통회자복하는 통성기도로서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는 정화의 기도이다. 본성을 추악하게 하는 죄를 피하고, 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정화하고 우리를 회복시키는 은혜를 얻기 위해 기도 해야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상기도, 금식기도 등 여러 성격의 기도를 강조하는데 기도의 내용과 형식은 대동소이하다. 통성으로 드리는 우리의 사정을 간구하는 간청기도가 주종을 이룬다.



2. 묵상기도(meditation) : 조명의 길 illuminative way


묵상기도는 우리의 죄를 통회자복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침묵하는 기도이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단지 신자의 사정을 중구부언 아뢰는 독백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가 묵상기도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기도 가운데서 듣는 것은 영적이 감화감동 즉 영적 조명이 필요하므로 조명의 길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빛을 비추사 즉시 께닫게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조명하시는 지혜를 얻기 위해 묵상해야 한다.”


기도는 신의 뜻을 간구하는 신탁이다. 나의 뜻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독백적인 측면이 강하다. 나의 소원을 간청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영적 감수성과 영적 능력을 강화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가 더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성숙한 기도의 자세인 것이다.


예수께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길(마 26:39) 기도하신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듣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의 간청이 이루어지는 것을 응답받는 기도로 역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내 뜻대로 살기를 간청하고 고집하면서 그것을 대단한 신앙인 것처럼 칭송한다.



3.관상기도(contemplation) : 일치의 길 Unitive Way


기도의 최종 단계는 관상기도(contemplatio)이다. 관상(觀想)기도는 정관(靜觀)기도 라고도 번역한다. 라틴어 contemplationem은 깊은 애정과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는 응시의 행위(act of looking at)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관상기도는 하나님만 바라보고(觀想) 그 현존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기도이다. 그리하여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마냥 주님을 바라만 보아도 좋은 그런 마음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관은 사랑하는 애인을 거저 지그시 바라만 보아도 황홀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는 마음의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신비한 희열에 이르는 기도의 방식이다. 하나님과의 일치의 기도로서 모든 인간적인 지성과 의지와 감정과 의식을 소멸시키고 자아마저 온전히 비워 무상 무념상태에서 온전히 하나님만이 나의 존재와 의식 속에 가득 차도록 나를 비우는 기도이다. 간청 기도가 나를 채우는 기도라면, 관상기도는 나를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 ‘세상과 없고 나도 없고 구속의 주만 보이는’ 영적인 상태에 이르는 기도이다. 이를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이라고 보았고 아빌라의 테레사나는 성애적(性愛的) 일치로 여겼으므로 비판과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관계의 일치(unio relatio)'를 지향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고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신앙을 지향하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의 궁극적 목표는 기도와 삶의 일치를 지향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지향한다.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이며, 기도가 놀이이고 놀이가 기도이며, 기도가 쉼이고 쉼이 기도가 되는 즉,  기도와 삶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 관상기도의 궁극적 목적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의존함으로써 기도와 삶의 일치를 이루라는 것이다.


한국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신앙과 삶의 불일치이다. 그래서 일찍이 주일날 교회에서의 신앙생활과 나머지 날의 세상에서의 가정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김재준 목사는 신앙생활을 하지말고 생활신앙을 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생활 전체를 통해 신앙의 향기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활신앙이야 말로 기도와 삶의 일치를 지향하는 관상기도의 목적이기도하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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