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2:4-7
I. 연약한 인생
화란의 유명한 화가로서 고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목사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는 정신에 조금 이상이 있었습니다만은 그의 그림은 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화가가 되기 전에 벨기에라고 하는 나라에 가서 탄광에 들어갔습니다. 광부들과 함께 탄을 캐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의 일을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옷감이 귀할 때였습니다. 물건을 포장하면 포장한 천에 글자를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이라도 귀하기에 그것을 빨아서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자가 지워지지 않아서 등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깨어지기 쉬운 물건이오니 취급할 때 주의하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물건을 포장할 때 쓴 글이었지만 그것으로 옷을 해 입었으니 그 사람의 등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결국은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고흐는 ?사람은 정말 깨지기 쉬운 물건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인생이 질그릇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숨박꼭질 :
→ 남의 장독을 밟아 깨던 기억
→ 허무하게 깨지더라
여러분! 이게 인생입니다. 건강하던 사람도 깨집니다. 힘 있는 사람도 깨집니다. 돈 있는 사람도 깨집니다. 인생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깨질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의 말 한마디에 아내가 깨지고 자식들이 깨집니다. 아내의 눈짓 한번에 남편이 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처럼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이 섬세하고 자상하게 돌보신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인생 자기가 지키는 줄 알지만 하나님이 돌보시고 지키시기에 살아가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이 「돌보시는 하나님」입니다.
II. 필연
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리고 역사를 운행하신다는 믿음에서부터 출발되어집니다. 여기엔 우연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이유가 있고 필연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재수 없다” “재수가 좋아서” 라는 말을 써서는 안됩니다. 비신앙적인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그 때에, 이 때에 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시던 그 때에,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던 이 때에, “때에”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필연적인 한 시점을 말하는 것이지요. 아무도 모르는 어느 한 때,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역사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힘찬 승리의 물결이 밀려오는 어느 때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메시야가 탄생되는 마을을 예고하고 있는데 베들레헴 마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에 사는 어느 처녀의 몸에서 아이가 잉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자그마치 130Km 300리나 떨어진 북쪽 갈릴리 나사렛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갑니다. 배가 불러옵니다.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아이는 태어나게끔 되어있습니다. 바로 이 때에 당시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령을 내립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모두 호적을 신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 베들레헴입니다.
때문에 저들은 함께 베들레헴으로 내려가 호적을 신고하기 위해 가야만 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하나님의 섭리의 때입니까?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령을 내린 것은 즉위 19년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19년동안 가만히 있던 임금이 갑자기 호적령을 덜컥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호적신고 하도록 해라! 지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시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조금만 먼저 내려도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돌아온 다음에 아이는 태어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베들레헴 탄생은 무산되고 마는 것입니다. 조금만 나중에 내려도 안됩니다. 아기를 낳아가지고 가야만 했을 겁니다. 달이 차는데 “아이야 조금만 기다려라!” 그럴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생리법칙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때를 기가막히게 맞추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십시오. 이방 황제의 정치수단을 활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보십시오. 역사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제멋대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토록 정확한 하나님의 손길을 보십시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가 계산되어집니다. 아내 마리아는 나귀를 타고 갑니다. 고삐를 잡은 남편 요셉의 보폭과 속도가 측량되어집니다. 정확히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분만하도록 지금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더라면 필시 마리아와 요셉이 불평하고 원망했을 겁니다. 왜 하필이면 이때에 아이를 가졌는지 모르겠다고. 하나님께서 왜 이럴 때 고생을 시키는지 모르겠다고. 또 황제는 이때 호적을 내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나 내가 지금 고생하는 인생의 발자국 그 자리에 내가 지금 아파하는 그 인생의 배후에 놀라운 한 섭리의 손길이 지금 나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온 세상 일들이 우연히 돌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아파하는 이 자리, 내가 때로 고독에 우는 이 자리, 내가 힘들여 여행하는 인생의 그 자리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섭리의 손길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당신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옛날 친구 셋이 말을 사러 갔더랍니다. 돈이 모자라 서로 어울러 한 마리 말을 사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머리와 앞다리를 샀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몸통을 사기로 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뒷다리와 꼬리 부분 항문 부분을 사기로 했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산 부분을 관리하기로 했지요. 그래서 머리부분을 산 친구는 부지런히 풀을 뜯어다 먹여야 했습니다. 아 꽁지부분을 산 친구는 배설을 할 때마다 따라다니며 치워야 했습니다. 등 부분을 산 친구는 말잔등에 타고는 신선놀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 뒤를 산 친구가 화가 났습니다. 둘이 꾀를 부리고 의논을 했습니다. “자, 우리 이렇게 하기로 하자. 오늘부터 내가 절대로 풀을 뜯어 먹이지 않을 테니까 너는 배설을 못하게 막아라. 반창고를 가지고 막든지 말뚝을 가지고 막든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 여러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내가 말등에 타고 신선놀음을 한 그 배후에는 수고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코로 숨쉬는 이 시간에도 공기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오늘도 걸어가는 그 마당 한 자리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음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찬양하는 그 배후에 독생자의 피흘려 죽어주신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자국마다 한번도 나를 떠난적 없으시고 내곁에서 나와 함께 하셨던 놀라운 은혜의 손길이 있었음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III. 배후에 계신 은혜의 손길
이 사실을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6절의 말씀입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여기 앗사리온은 요즘말로 말하면 100원 200원하는 적은 화폐단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 29절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산수가 여기 있습니다. 한 앗사리온에 참새 두 마리 그러면 두 앗사리온에 참새 네 마리이어야 하는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팔린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① 똑같은 물품 하나도 백화점 값이 다르고 시장바닥의 값이 다른 겁니다. 누가복음은 약자의 복음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누가라고 하는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을 펼쳐보면 어린아이 얘기, 노인 얘기, 가난한 사람들의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참새의 일반적인 거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누가복음은 시장바닥에서 거래와 가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시장바닥에서는 한 앗사리온 주면 두 마리의 참새를 줍니다. 그런데 두 앗사리온 주면 참새 네 마리에다가 덤으로 한 마리를 끼워서 줍니다. 그래서 참새가 다섯 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덤을 아십니까?
추운 겨울날 종로 바닥을 거닐다 보면 군밤장수들이 있습니다. “군밤 한 되 주세요” 그러면 군밤을 한 되박 주고는 “가시오” 우리나라 인심이 그렇지 않습니다. 한 되박 준 다음에 한줌 쥐는 것 같지만 두어개쯤 쥐어 살짝 얹어 줍니다. 그걸 덤이라 그럽니다. 요즘은 쌀을 사는데 Kg로 사고 가마니로 사지요. 옛날에는 한 되, 두 되, 되로 말로 샀습니다. 그래서 되 위에 쌀을 수북하게 세웁니다. 그리고는 릴레이 바톤 같은 동그란 막대기로 삭 밀어 갑니다. 마지막까지 삭 밀어 버리면 그건 한국 인심이 아니지요. 동양인심이란 그런게 아닙니다. 마지막 한줄이 살짝 남았을 때 가다가 살짝 멈춥니다. 그 위에 한줄 남는 것 그걸 덤이라 합니다. 여인들이 화장품 셋트 하나 사고 나면 요만한 손가락만한 것 몇 개 더 끼워줍니다. 그걸 샘플이라고도 하고 덤이라고도 하는 겁니다.
200원 주면 참새 네 마리 주고 덤으로 한 마리 얹어 주는 그 버림받은 참새 한 마리! 그것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덤으로 끼어 팔리는 잊어버린 참새 한 마리!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고 계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③ 당시 참새는 인기없는 식품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참새는 가장 싸구려 음식중에 싸구려 움식이었습니다. 요즘말로 말하면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100원 200원 주고 붕어빵 하나 사서 먹었다 그렇게 이해하면 틀림없습니다. 100원 주면 붕어빵 두개 주는데 200원 주니까 네 개 주고 덤으로 하나 더 끼얹어 주더라 하는 얘기예요.
부자들이 소갈비를 뜯고 평민들이 양 다리를 나눌 때에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비둘기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절이 되었지만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참새를 사서 참새 다리를 씹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덤으로 끼워 팔린 참새 한 마리! 하나님이 얼마나 자상하게 당신을 돌보신다는 것을 이 참새 한 마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하게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시겠습니까? 이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불평하시겠습니까?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넉두리를 늘어 놓으시겠습니까? 내가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되지만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 가운데 하나님이 섭리의 손길이 지금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땅에 불행한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가 있다고 할지라도 오발탄 아니다. 내가 이해가 안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IV.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연약한 성도들이 있어 성경은 다음절로 이어 갑니다. 본문 7절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저는 머리털에 누구보다도 많은 신경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침마다 머리를 감을 때 몇 개의 머리털이 빠지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고 또 알지도 못합니다. 양복에 머리털이 묻어 있으면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습니다. 툴툴 털어버리면 그만입니다.
내 몸에 별로 필요없는 손톱은 깎아 하나씩 챙겨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그러나 머리털은 아무렇게나 털어 버립니다. 머리털! 황금머리털은 145,00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동양사람들의 머리털은 120,000개 정도 되구요. 빨강색 머리털은 90,00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 머리털을 세고 계실까요? 천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니까 “얘, 너 이리와 봐. 네 머리털 한번 세어 보자.” 하나님께서 할 일이 없어서 머리털을 세고 계신 것이었습니까? 온 세상 창조를 다 마치고 하나님께서 할 일 없어 머리털 세는 것 아니라 사람들이 무관심한 영역까지 하나님은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그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 영역, 부분을 하나님께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막상 본인 당사자도 알지 못하는 사실까지 하나님은 깊은 애정을 갖고 계신다. 할렐루야.
도대체 당신이 누구고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소중하게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당신의 호흡, 당신의 정신, 형상을 불어넣었습니다.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살아있는 존재,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은 종류대로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창세기 1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화는 국화처럼 만들어졌고, 배추는 배추같이 만들었고 호랑이는 호랑이같이 개는 개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만큼은 사람같이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처럼 사람을 만들었다고 얘기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귀한 선물입니까?
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져서 지옥의 백성이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그 분을 죽이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해야 했던, 그 분을 버리시면서까지 나를 얻어야 했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하고 맞바꾼 존재가 바로 나! 라는 존재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천국에서 더불어 살아가게 될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너희 시민권이 하늘 나라에 있느니라.
여러분의 몸이 조금 불편하다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건강할 때도 하나님은 관심을 갖고 계시지만 여러분의 몸이 아파할 때도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얼마나 소중하게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애절하게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버려두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생사의 문제, 여러분의 사업의 문제, 환경 문제, 여러분이 기도하는 일거수 일투족에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겠습니까?
덤으로 끼워 팔리는 참새 한 마리를 내가 깊이 관심 가지고 있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V. 하나님의 손안에
하나님께서 참새에 관심을 가지시고 머리털 하나까지도 세고 계시니까 참새는 병들지 않고 죽지도 않습니까? 머리털은 상하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고 세지도 않더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참새도 때로 그 포수의 총에 죽기도 합니다. 그물에 걸려 떼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추위에 얼어 죽기도 합니다. 공격자 뱀의 밥이 되기도 하고 개구장이 새총 돌멩이에 맞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세시는 머리털이지만 백발도 있고 대머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이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 은혜의 손길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더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면 감기도 안걸리고 사업의 실패도 없고 이별도 죽음도 없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도 때로 병들고 실패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손길을 떠나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관심해서 일어난 일들이 아니더란 말이지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나의 믿음이 있고 여러분의 평안이 있고 우리 모두의 뱃장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6-7절 참새 머리털 얘기를 하게 된 배경이 4-5절에 나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우리를 예수의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분상승입니까? 우리를 종의 하나로 영접해 주신다고 할지라도 감지덕지지요.
이 땅의 근심과 염려 두려워 해야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두려워 해야할 대상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니, 세상에 힘있는 자가 너희와 함께 계시니, 세상에 부한 자가 너와 함께 계시니, 온 우주에 능한 자가 너와 함께 계시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도 지키시거든 하물며 너희는 왜 두려워 하느냐. 너희를 버려 두겠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덤으로 팔린 참새 한 마리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미물입니까? 공작새는 깃털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참새는 자랑할 만한 털 한쪽이 없습니다. 황소는 힘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참새는 힘이 있는 새가 되지도 못합니다. 독수리는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참새 한 마리는 발톱도 부리도 없습니다. 돼지는 먹음직한 살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참새는 한 점 살도 없습니다.
참새의 자랑이 있다고 하면 무가치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덤으로 끼워 팔린 참새 한 마리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그 참새에게도 밤이 되면 보금자리를 허락하십니다. 낮에는 먹을 것을 주십니다. 봄이 되면 벌레를 날게 만듭니다. 겨울에는 곡식이삭을 땅에 떨어뜨려 놓습니다. 때로 노래를 주고 햇빛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참새를 먹이신 하나님 여러분을 먹여 주실 것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참새를 입히신 하나님 여러분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참새를 마시우게 하신 하나님 여러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의 손안에서 주관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잠시 실패했다고 낙심하시겠습니까? 절망하시겠습니까? 뭔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불평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잠시 기다리게 하신다고 방정떨고 불안해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뜰 안에서 노는 참새 한 마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크기는 주먹보다 훨씬 더 작습니다. 소리는 왜 그렇게 예쁘지도 않은지 짹짹거리는 소리는 노래가 되지 않고 듣기도 싫습니다. 팔짝거리고 홀짝 거리는 자태를 보셨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두 다리 모으고 깡충깡충 뛰는 모습이 방정스러운지요. 성질이 급해서 사람이 키울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를 아끼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자기가 자기를 볼 때도 마음에 안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내 맘에 안드는데 하나님은 내가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도 없고 재능도 남같이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고 돌보고 계십니다. 실수는 어쩌면 그렇게도 자주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도 감싸주시고 덮어주시고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 앞에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나는 너를 인정한다. 끝까지 너를 기대한다. 너를 사랑하마. 너를 신뢰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으신 하나님. 오늘 나를 지키고 계신 하나님. 내일도 너를 지킬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스럽다 말씀하여 주십니다.
VI. 지켜주시는 하나님
교인들이 수술을 한다고 그러면 새벽같이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말씀을 나눕니다. 그런데 한번은 제가 이빨 하나를 뽑기 위하여 치과에 갔는데 팔뚝만한 마취주사를 입에다 갖다 대는데 어쩌면 그렇게 가슴이 콩당거리고 뛰는지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데요. 그게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남의 아이들 상담오면 대범하십시오. 담대하십시오. 곧잘 상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내자식 성적표 보고 울화통이 터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아이들이 조금만 밤늦게 돌아오면 불안한게 부모의 심정입니다. 친구의 자식이 군대간다 그러면 사나이 대장부는 군대 갖다 와야 돼. 어깨 뚝 두드리며 남자답게 훈련 받고 와! 그런데 내 자식 군대 간다고 그러면 어쩌면 그렇게 눈물이 나고 불안스럽습니까?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걸핏하면 넘어집니다. 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순경 가운데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 역경 가운데도 여러분과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성공 속에 동행하셨던 그 하나님 실패 가운데도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여정속에 동행하셨던 그 하나님, 인생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손 붙들어 천국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1-3,8)
이토록 확실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오늘 아침 참새 한 마리가 비웃고 있습니다. 내 발바닥 밑에 떨어지는 머리카락 한올이 믿음없는 사람들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참새와 로빈새」라는 시가 있습니다.
로빈새가 참새에게 말했다.
참 이상하다.
사람들은 왜 저렇게 많이 걱정을 하고
왜 저토록 안절부절 저토록 안달하는가?
참새가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나와 너를 돌봐주시는 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그분이 저들에게는 계시지 않는가 봐?
당신은 참새보다 귀합니다. 당신은 머리털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인정하십니까? 당신은 덤으로 팔리는 참새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위로의 말씀입니까?
VII. 돌보시는 하나님임을 고백하라!
사랑은 고백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슬그머니 불러내어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로 고백을 합니다.
그런 용기가 없는 사람은 불러내어 선물하나를 건네 줍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집에 가서 풀어 보라고 합니다. 집에 가서 열어 보면 손수건 하나입니다. “내가 가난해서 좋은 선물은 사지 못한다 해도 이 손수건이 언제나 네 땀을 닦아주리라”는 뜻으로 선물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고백이 아닙니까? 이것은 행동으로 고백한 것이요, 생활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은 반드시 고백하게 되어 있고 고백하지 않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혼자서 짝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말은 못하고 끙끙거리며 앓고 있다면 그 사랑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 사랑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되 나에게는 예수님이 최고입니다” “죽을 때까지 믿겠습니다”라고 말로 고백을 하든지 행동으로 고백을 하든지 믿음은 고백할 때 귀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써먹을 데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에서 9절을 보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가 최고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사는 삶이 최고의 삶입니다. 당신들도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이렇게 사람 앞에서 고백할 때는 내가 너희들을 인정하시겠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고 인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싶으십니까? 사람 앞에서 딱 부러지게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백하는 믿음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시리아에 오헬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힘이 장사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강자를 찾아서 그의 제자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왕이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왕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무슨 일이든지 시키십시오. 나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 바치는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왕이 최고인줄 알고 따라다녔는데 무슨 소리 한 마디만 들으면 벌벌 떨곤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악마라는 말만 들으면 그렇게 무서워하였습니다. ?왕보다도 악마가 더 강하구나?라고 생각이 되어 악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나를 써 주십시오. 내가 목숨을 걸고 충성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오헬로를 제자 삼아 데리고 다니면서 얼마나 못된 일을 다 시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강자의 제자라는 것 때문에 서슴없이 충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악마도 무엇인가 보기만 하면 도망을 치곤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십자가를 보기만 하면 도망을 합니다. 자세히 알아보니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 즉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만날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어디에 계실까?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예수님이 지나가시겠지??라고 생각하고 큰 나루터를 지키면서 사공 노릇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지 오시는지 만나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비가 억수로 쏟아 졌습니다. 큰 강인데도 강물이 불어났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어느 소년이 문이 부서지게 두드렸습니다. "왜 그러느냐?" "내 어머니가 지금 위급하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에 강을 건너야 합니다.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배를 가지고는 그 빠른 물결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럼 할 수 없지. 내 등에 업혀라?고 하였습니다. 소년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갑니다. 처음에는 가볍더니 강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무거워지는데 이제는 한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오헬로가 "야 이놈아 너는 도대체 무엇을 먹었길래 그렇게 무겁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소년이 "내가 세상 죄를 모두 걸머져서 그렇노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요?하고 돌아보니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이 사람 오헬로가 죽은 다음에 이름을 바꾸어서 성자라는 칭호를 주면서 크리스토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업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렇게 성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 하나님께 감사!
1. 입으로 고백
2. 물질로 고백
3. 삶으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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