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모음

예화-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열국의 어미 2010. 5. 9. 17:51

 

 

 

믿음 - 나눔의 토스트맨 “ 희망을 팝니다”

 

 

길거리 스낵카로 연 1억대 매출 김 석 봉 사장

 

# 희망을 굽는 사나이

 

새벽 4시50분. 한 사나이가 거울을 보고 3뻐(기뻐 나뻐 예뻐)를 외치며 미소 연습을 한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라면 꼭 해내고야 말거야.”라고 말한 그는 성경 잠언을 읽은 후 “주님! 이 손에 솜씨와 맛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서울 무교동 코오롱 본사 옆 1.5평의 스낵카에서 매일 아침 토스트를 굽는 ‘석봉토스트’의 김석봉(48․반석성결교회 협동전도사) 사장의 출근 풍경이다. 그의 연 매출액은 1억여원. 외한위기 때보다 더한 불황이 계속되고 있는 지난해 체인점을 60여개 늘렸고 무교동 효령빌딩 12층에 11명의 직원을 둔 회사까지 설립했다.

 

그러나 연간 억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그는 9년째 구청 단속반의 살벌한 단속 가운데 여렵사리 스낵카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며 서울 남가좌동의 전셋집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 가족 생활비를 제외한 수익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오전에 장사를 하고 오후에는 장애인복지관 천사원 등을 방문해 따끈한 토스트로 사랑을 전하며 독거노인과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고 있다. 그가 억대 매출의 기적을 이루기까지에는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5세 때부터 자동차정비소 세차장 과일행상 웨딩촬영기사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유치원 교사였던 아내 하영숙씨를 만난 후 그녀의 뒷바라지로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1997년 아내가 셋째 아이를 출산한 후부터 아내에게만 가정경제를 떠맡겨 좋을 수 없었다.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봉사할 수 있는 토스트 장사를 시작했다. 단속반에게 쫓기고 멱살을 잡히며 서러움을 눈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도 가난했고 나도 가난하다. 분명히 나의 아들들도 가난할 텐데 내 대에서 가난을 끊어야지. 열심히 일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졌다. 토스트하면 ‘석봉’이란 이름이 떠오르게 하리라고 다짐했다. 요리사 가운과 모자를 착용하고 토스트에 대해 공부했다. 야채로 맛을 낸 소스를 개발했다. 성공이었다. 그의 스낵카는 어느새 무교동의 5대 명물로 자리 잡았고 관광가이드북에까지 상세히 소개됐다. 그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토스트를 판매할 정도로 프로의식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는 일본 매스컴에 소개돼 ‘석봉 토스트’의 맛을 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는 일본인 관광객들도 생겨났다.

 

# 상처가 아닌 약속

2002년 11월. 몸무게가 급격히 줄었다. 병원에서 ‘급성위암’이란 진단을 받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당시 아내는 넷째 출산을 앞둔 만삭의 몸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수술을 하면 괜찮대..”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만삭인 아내, 어린 자식들 셋, 신앙이 유일한 생명의 동앗줄이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기도하자. 아빠는 해낼 수 있어.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있을거다.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자.”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라며 울먹였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포옹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해 12월 위 75%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몇 개월 요양한 후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항암제 때문에 몇 차례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가족을 기억하며 이겨냈다. “가족의 기도는 내 삶의 응원가입니다. 요즘엔 운전을 하다가 감격해서 혼자 잘 울어요. 다시 살려주셔서 감사하고 가족과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기 때문이지요.”

그의 몸의 수술자국은 ‘내가 너를 붙들어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또렷한 약속이었다. 김씨는 요즘 특별한 기도를 한다. 어린이 사역을 위한 전문 캠프장 설립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 사역에 대한 비전을 품고 있는 그는 이제 푸른 복음의 꿈을 버무리는 희망 전도사로 살길 원한다.

 

 

 

 

 

두 팔 없는 구족화가 교수됐다

 

어린 시절 두 팔을 잃은 소녀가 두발로만 그림을 그리며 당당히 대학 강단에 진출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지난 9월 단국대학교(총장 김승국) 예술대학 동양화 전공 초빙교수로 임용된 오순이씨.

 

세살 때인 1969년인 경남 마신시의 집 앞 철도에서 놀다 기차에 치여 두 팔을 절단한 오씨는 이후 2년동안의 집중 치료로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오씨는 초등학교 4학년때 미술을 전공한 담임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갖게 됐다. 이제부터 두 발을 이용해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두발을 이용한 붓의 사용이 자연스럽고 정확해질 때까지 수없이 화선지와 싸웠다.”는 오씨는 “화선지에 먹물이 퍼지지 않도록 일정한 속도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허리가 끊어지고 발이 퉁퉁 붓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다행히 이런 사연이 1978년 TV프로그램에 소개된 후 오씨는 단국대측의 지속적인 격려와 후원 속에 86년 단국대 동양화과에 입학, 4년간의 학업 끝에 90년 수석졸업의 영예를 안았다.오씨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대만으로 건너가 어학연수를 마친 뒤 93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미술계의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중국미술학원에 진학했다.

 

실기 능력을 의심한 심사위원들 앞에서 집적 실기능력을 보여주는 등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도 싸워온 오씨는 오는 14일에는 중국 오나라 남종화의 대가형호에 대한 ‘형호의 필화법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단국대 관계자는 “산수화를 주제로 한 오씨는 박사학위 논문은 동양화 예술 창작 이론을 실기에 정통한 전문가가 완성했다는 점에서 중국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씨는 “구족화가의 실기지도가 낯설어 학생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신중하게 반응을 살피고 있다.”며 “오랫동안 격려와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는 학교측과 평생 나를 뒷바라지해준 친언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12일 오후 서울 한남동 단국대학교 총장실에서 정식으로 임용장을 받은 뒤 매주 화요일 오전 3시간씩 단국대 천안캠퍼스에서 동양화 실기를 가르치며 별도 연구실을 없으나 정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 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삽니다 -

 

 

 저는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을 쓰면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1인 10역을 해내는 엄지손가락을 온전히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여과 없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사람에게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았고 막대기 같아져 버린 오른팔을 쓰면서 왜 하나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손이 귀까지 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온전치 못한 오른쪽 귓바퀴 덕분에 귓바퀴라는게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이 정교하게 만들어주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잠시지만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절뚝 걸으면서는 다리가 불편한 이들에게 걷는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낄 수 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피부가 얼마나 많은 기능을 하는지, 껍데기일 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피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남겨주신 피부들이 건강하게 움직이는 것에 감사했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얼마나 정교하고 세심한 계획에 따라 만드셨는지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백만분의 일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얼굴도 이름도 없는 초라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 기분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 누구도, 그 어떤 삶에도 죽는 게 낫다 라는 판단은 옳지 않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장애인들의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그런 생각은, 그런 말은, 옳지 않습니다. 분명히 틀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추운 겨울날 아무런 희망 없이 길 위에 고꾸라져 잠을 청하는 노숙자도, 평생을 코와 입이 아닌 목에 인공적으로 뚫어놓은 구멍으로 숨을 위어야 하는 사람도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에 자라나는 이름 모를 들풀도, 하나님이 생명을 허락하신 이상 그의 생명을 충분히 귀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삶입니다.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네, 이러고도 잘 삽니다.

몸은 이렇지만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임을 자부하며, 이런 몸이라도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품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몸이라도 사랑하고 써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감사드리며... 저는 이렇게 삽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지선 ‘지선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