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모음

상상할 수 없는 장학금으로 캐나다에서 공부하기

열국의 어미 2010. 5. 9. 18:02

 

상상할 수 없는 장학금으로 캐나다에서 공부하기

 

 

채성태: 이랜드에서 '아름다운정상' 편집장을 맡으면서 국내에 존재하는 사보수상 단체에서 '대상'을 모두 휩쓸었다. '아름다운정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신명나는 '직장인 문화!'를 만드는게 그의 늘 푸른 꿈이다!

어제 오후 두 아이들을 캐나다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 기쁜 나머지 당시에는 내색조차 못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잠자리에서 뭉클 뭉글 솟아 올라 잠을 도무지 이룰 수 없었다.

 

* 첫 단추를 바로 꿰어야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두 아이를 100% 맡길 수 있는 ‘드림아이 에듀’를 만난 것도 안심이다. ‘드림아이 에듀’는 큰 아이가 다니는 안산동산고와 연결된 유학원이다. 소개 해준 분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하여도 믿을 수 있는 분으로 큰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해주시는 큰 아이 학교의 선생님이시다. 선생님께서 큰 아이와 상담을 하면서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아이에게 듣고서 드림아이를 소개 해주었다.

 

* 오늘 내가 나에게 다시 하고 싶은 말

오늘 내가 그 많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그 흥분에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러면서 내 자신에게 내가 다시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제한되어 있지만 피조세계 앞에서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사람의 가능성은 크게 달라진다. 역사는 자기를 신뢰할 줄 아는 사람들이 주도해 왔다. 역사는 도전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제한 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제한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꿈을 꾸는 것~, 그 꿈을 위하여 개척하고 희생하는 것 말이다”

이 사랑과 이 은혜들은 이 세상을 향해 더 나누어주고, 더 섬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 들였다. *. 오늘 칼럼은 여기까지 보아도 된다. 바로 위 내용이 핵심이니까.

 

상상도 하지 않았던 교환학생

나는 아이를 외국에서 공부시켜야 한다는 것은 ‘안감생심(安敢生心), 언감생심(焉敢生心)’으로 생각이나 마음조차도 먹지 않았다. 작년에 큰 아이가 안산동산고에 가면서도 생각지 않았던 천사와 같은 ‘강석기-박귀숙’ 가정을 만났는데, 그 집의 아들 병완이가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었고, 매주마다 만나는 찬정 형제의 아이 영규가 캐나다로 유학을 갔지만 우리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비용에 대한 부담도 있었고, 그 분야에 입력된 정보가 없어서 생각 조차하지 않았다. 난 상상이 안 되는 장학금 소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지난날의 나래 속으로 들어가보니 벌써 내가 수 많은 장학금과, 수 많은 사랑과 수 많은 은혜를 이미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창시절 9년 동안의 장학금

그러면서 나의 지나온 날을 뒤돌아 보았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장학금을 받은 것은 고등학교 이전 대구직업 훈련원에서 1년, 대구공고와 서울공고에서 3년 합쳐서 4년 동안 100%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입학하여 휴학까지 5년 동안 대학 학자금의 500%도 넘는 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대학 때는 학교에서 방도 주고 월 30만원씩 나왔으니 말이다. 이 모두가 공부를 잘해서가 결코 아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이다.

 

* 상상이 안 되는 이랜드 장학금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이랜드에서 20년을 보내고 있는데, 이랜드에서 받은 장학금은 그야말로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이랜드에서 처음 입사했을 때 그분께서 30만원을 빌려 주셨으니 -30만원으로 시작한 셈이다. 이랜드에서 받은 장학금은 단순히 돈으로만 책정할 수가 없다. 아내를 만나 18년째 살고 있는 것, 두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 그리고 현재의 내 자신의 위치와 신앙을 지키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남다른 가치관과 세계관 이런 것을 다 헤아린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을 말로다 할 수 없다.

 

*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비결

그렇게 장학금을 끝없이 받고 또 받을 수 없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이 정답이라고 밖에 약속이 없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내가 이렇게 성경 말씀을 인용을 하니 내가 믿음이 좋고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기억력보다 편집자적인 사고가 있어서 이 성경말씀도 쉽게 찾았을 뿐이다.

 

*나의 신음~, 징징거림~. 그리고 칭얼거림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나는 요즘 매우 신실한 두 분을 통하여 ‘신음(呻吟)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찾아보았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신음하다 지쳐서, 나는 뼈와 살이 달라붙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녁에, 아침에, 한낮에 내가 신음하며 호소하오니 이 울부짖음을 들어주소서, 주님,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의 신음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하시어~”

신음과 관련한 성경 말씀이 이렇게 많은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러면서 두 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징징’거림에도 응답하신다고 했다. 이 말은 자식을 키워 본 어머니들은 다~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징징짜고, 칭얼거릴 때마다 어머니는 해결사가 된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단지 아이가 징징짜거나 칭얼거림에만 응답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다가도 아이가 살며시 뒤척이는 소리에도, 아이에게 혹여 열이 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자다가도 몇 번이나 아이 머리를 만지면서 아이를 키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두말 할 나위가 없으시다.

 

나의 마음과 생각 나의 상태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러고 보니 나의 하나님은 적어도 내 기도에 응답하거나, 내 신음에 응답하거나, 내가 칭얼거리고 징징짜면 그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과 더더욱 나의 모든 상태를 알고 계시고, 나의 필요를 그 때 그 때마다 채워주신다는 그 사실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 나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성적은 꼴찌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망막했다. 우선 내가 자랐던 문경 산양은 전기도 차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었다. 산과 들과 강이 나의 전부였다. 더더욱 어머니의 모습까지 희미하게 남을 정도로 어머니는 언제인지 하늘나라로 가셨다. 나의 어린 시절은 천방지축(天方地軸) 그 자체였다. 집안에는 엄한 유교적인 가풍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체면과 형식 허례의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계시 읍내로 왔지만, 나는 즐겁지 않았다. 정확히 내 성적을 나는 모르지만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 분명한 것은 나는 공부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성적은 꼴찌라고 생각한다.학교에 준비물을 가지고 가는 것은 나에게는 사치였다. 돈 때문이 아니라 나는 그렇게 알량한 자존심으로 자랐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새엄마가 그렇게 잘해주었지만, 나는 새엄마가 그렇게나 싫었다. 그래서 나는 아쉬운 소리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점심 시간 때 물을 마실지언정 도시락을 싸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어리석은 자존심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 몰래 임성일이라는 친구와 함께 아이스케끼 장사를 하였다. 난 그 때 임성일보다 4배 이상 많이 팔았다. 그 이유는 나는 많이 돌아다니지 않고, 적어도 6명에서 12명이었던 그 시절에 5개를 사면 1개를 덤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는 진학지인 합격생을 팔았는데, 그 때도 전국에서 3번이나 가장 많이 팔아서 등록금을 3학기나 낼 수 있는 장학금을 받았다. 합격생을 많이 팔았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20%를 할인하였고, 또한 외상을 주었다. 나는 외상을 끝까지 다 받을 수 있었던 비결 또한 학생회장이자 의리파인 치과의사 아들 홍성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성적은 주로 꼴찌였다. 아마 60명 중에 5,60등 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 돈을 엄청 벌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돈을 벌면 쓰지 않았다. 우체국 통장에 그대로 입금 하였다. 우체국 직원이 어린 내가 돈이 많은 것을 보고 훔치지 않았나 의심하기도 했었다. 중학교 때는 그 돈도 관리하지 못해 우표를 사 모았다. 우표는 나중에 가치가 상당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표를 전지로, 시트로 엄청 많이 모았다. 우표 책이 13권이나 되었다. 그것은 10년 이상 나 홀로 살았을 때도 내 몸과 함께 늘 함께 따라 다닌 친구였다. 지금 그 우표를 팔면 3,4천만 원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그런데 87년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었던 김형모 십대들의 쪽지 발행인이 이랜드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그분의 청소년 센터 등의 비전을 듣고 가뿐이 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분도 그 우표를 받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지 12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 큰 아이가 자라면 그것을 돌려주겠다’고 지난 6월 11일은 물론 그 이전에도 몇 차례나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아이에게 재산도, 우표도 줄 마음 없으니까 바로 돌려달라, 그러면 여의도 렉싱턴 호텔의 디스플레이처럼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서 만들어 가치를 높이겠다.그러면 그 곳에서 수익이 나면 87년 전도사님 그 초심 그대로 사용하겠다 라고 하였다. 아무튼 나는 문경중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종합고등학교 가장 점수가 낮은 광산과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 당시 매형이 문경에서 탄광을 하고 있었는데, 광산과 나와 그곳에서 일하라고 했다. 그 때는 그 일자리는 문경에서 가장 좋은 일자리였으니까 말이다.

 

예수님을 만났지만 핍박은 시작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중학교 때 점촌에서 그래도 부촌이었던 국민주택 16호 에서 살았다. 우리 집은 마당도 상당히 넓었다. 국민주택에는 주로 선생님과 읍장 등 공무원들이 주로 살았다. 14호에는 중앙국민학교 현 교장님이 살았고, 10호 우리 집 앞에는 구 선생님이라는 분이 살았다. 그런데 추운 겨울 방학 때 군용담요 한 장 피고 나는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할 때 바로 우리 옆집인 15호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를 왔는데 그 집에서는 노래 소리가 자주 들렸다. 나는 마당에 까치 먹으라고 둔 감 홍시를 바라보면서 ‘저 집에는 어머니도 있고, 거실에는 따뜻한 난로도 있겠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바람결에 들리는 그 노래 소리를 따라 그 집으로 갔다. 그 집은 난생처음 사랑과 정으로 다가왔던 개척교회였다. 나는 그 전도사님의 가르침 따라 성경공부 책을 받아 성경을 찾아가면서 스스로 공부를 하였다. 그러면 전도사님이 채점을 해주셨는데 나는 늘 100점을 받았다. 그 시험은 나에게 처음 있었던 OPEN BOOK TEST였다. 그 때 나는 그 개척교회를 통하여 처음 창조주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내 구주이시다 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장손인 내가 절대 교회를 갈 수 없다는 엄명이다. 더더욱 고등학교 시험도 떨어진 나를 보면서 늘 측은히 여겼다. 아버지는“모르지기 사람이면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좋아야 사람인데, 네가 몸이 성하냐, 말을 잘하냐, 공부를 잘하냐, 집안이 좋거나 뻭이 있냐” 하시면서 늘 걱정이었다. 그런데 ‘상놈들이나 믿는 코쟁이 서양 종교를 믿는다고~’하시면서 핍박이 상당하였다. 그래도 나는 교회를 갔다. 피를 흘리면서 까지~.

 

* 대구직업훈련원에서 국비로 훈련을 받고

그래도 교회는 가야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나는 아버지 말대로 잘하는 것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문경 가은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계신 시인 김시종 선생님이 점촌에서 신실한 침례교회 교인이셨는데, 그분이 대구직업훈련원을 가면 나라에서 국비로 기술을 배우고 공고 3년 과정에서 따는 자격증도 딸 수 있다고 하면서 소개를 해주었다. 기숙사비 월1만원만 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기숙사비는 우체국 통장에 그 정도는 넉넉했기에 가뿐 마음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출 아닌 가출을 하여 대구 평리동에 있는 대구직업훈련원 전자과에서 훈련을 받았다. * 대구공고와 서울공고에서 등록금 모두 면제

나는 직업훈련원을 수료하고 취직을 하였는데, 주일을 지킬 수 있는 기독직장인 아리아악기에 입사를 하였다. 아리아 악기는 전국 교회와 학교에 풍금을 보급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교회에 전자 오르간이 보급이 막 시작 되던 시절이라 나는 전자오르간 파트로 들어갔다. 내 통장에 있는 돈으로 월세가 가능한 쪽 방은 구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 돈을 깰 수 없었다. 나는 돈을 아끼려고 독서실 생활을 하였다. 독서실에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엎드려 자기 위해서 말이다. 독서실비도 총무대행으로 청소 등을 해주고 무료로 지냈다. 그것도 근로장학생인 셈이다. 나는 독서실 입소 4개월 만에 정신을 차리고 진학을 하기 위하여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든 때가 있었다.그런데 중학교 책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전과를 사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래서 대구공고 기계과 산업체 과정을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과정 역시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의 부강을 위하여 기술이 필요하다면서 기능사 자격증이 있으면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만 응시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이 과정 역시 나라에서 모두 학비가 지원이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세계적으로 석유파동이 났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다. 아버지는 그래도 장남이 사는 대구로 오신다고 해서 오셨다. 그러나 장남이 교회 다닌다고 또 핍박을 하였다. 나는 또 대수롭지 않게 서울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 당시 인구정책상 서울로의 전입이 억제가 되었고, 가족이 전부 이사를 하여도 전학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나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서울로 왔고, 서울공고 전기과로 전학이 되었다.나는 전자기능사 자격증이 있었기에 대학을 갈려면 동일계열이어야 하고, 또 나는 기계보다는 전자 쪽이 맞았다. 그래서 나는 동일계열 혜택을 받아 전자공학과가 있는 대학을 가고 싶었다. 아무튼 서울공고를 졸업할 때가지도 산업체 과정이어서 학비가 모두 면제였다. 그리고 정규 과정인 서울공고 아이들과는 실력을 비교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산업체이지만 졸업 때 서울공고에서 평점이 가장 높았다. 그래서 졸업 때 서울시 교육감상과 우등상장을 받았다.

 

“목사님! 입학등록금 한번만 도와주세요

그 때 나는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주경야독으로 대학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내 본래 실력으로는 대학을 간다는 것이 웃기는 소리였다. 내가 들어갔을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내신 성적을 30%나 반영을 하였고, 정원 초과 외 130%의 대학생을 뽑았다. 입학은 자유롭게 졸업은 엄격하게 한다고~. 아무튼 나는 동일계열 특혜, 산업체 특혜 등 대한민국의 어느 대학도 갈 수 있었다. 그 당시 서울공고는 서울대도 120~180명 특혜를 받아 갔으니까 말이다. 나는 서울공고 다닐 때 학비는 면제를 받았지만 홀로 공부하면서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고생이 무진장 많았다. 왕십리 자개 집 점원에서부터 소위 공돌이 등 별의 별 직업을 다 가져보았다. 심지어 7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있었던 때도 있었다. 아무튼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나는 어느 대학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대학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입학등록금과 학비 그리고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 대학은 야간도 없는데~. 그래서 내 생애처음으로 그 당시 내가 다녔던 교회 목사님을 용기를 내어서 사택으로 찾아갔다. “목사님! 입학등록금만 빌려 주시면 제가 휴학을 내서라도 졸업 전까지 갚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침묵하시고 사모님 왈,“성태야, 너 신길6동 주변을 보아라,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아이들이 수두록 하단다. 너는 고등학교라도 나왔으니 감사해라~”나는 그 때까지 살면서 알량한 나의 자존심으로 누구에게 손을 내 밀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나는 사모님의 그 말에 귀를 먹었고, 나는 너무나 창피하여 아무 말없이 조용히 사택을 빠져 나왔다.

 

* 마침내 대학졸업 때까지 월 30만원씩 나오는 장학금을?

결국은 ‘내신 성적이 3%이내인 자가 입학전형에 합격한자는 입학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주겠다’는 인하대를 찾았다. 그래서 자신 있게 동일계열인 전자공학과 지원을 하였다. 합격 발표일 날 가보니 합격은 되었는데 장학금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특혜를 받아 입학한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다.  “선생님! 그런 조항이 입시요강에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합격자 발표 후 7일 이내에 수속을 밟지 못하면 합격이 취소 된다. 그래도 혈육이라고 아버지를 찾았다. 갑작스런 아버지가 돈이 준비 될 리가 없었다. 대구에서 신앙 생활하였던 교회 목사님을 찾아갔지만 가능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중재로 삼촌과 고모들이 10만원씩 내 놓았다. 그리고 대구 교회 목사님 나서서 그 교회 장로님이 보증을 서서 국민은행에서 학자금을 내 이름으로 대출을 받았다. 그래서 결국 입학 등록금과 책 값 등으로 무사히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밑져야 본전, 입시요강 원칙대로 따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편지로 말이다. 그러면서 입학요강에 ‘내신 성적이 3%이내인 자가 입학전형에 합격한자는 입학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주겠다’는 말은 있지만 동일계열로 입학 전형에 합격하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지만 그것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 나의 사연이 총장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법대로 하면 입학등록금을 주어야 하는데, 나를 주면 상당수 학생을 주어야 한다.결국 학교에서 결정하기를 공대 건물 수위들이 사용한 10여 평 되는 방 하나와 거실 겸 부엌이 방을 주었다. 그곳은 전기 장치가 되어 있어서 춥지도 않았다. 결국 대학교에서 나를 위하여 학교 총무과 소속 임시직으로 졸업 때까지 채용을 하였다. 그래서 매월 월급이 30만원이 나왔다. 매일 내가 할 일은 운동장 주변을 1시간 정도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청소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총무과장님이 ‘너는 공부나 하라’고 늘 들어가라고 하였지만 나는 적어도 내게 주어진 시간과 일을 지켰다. 분명 그들은 입시요강에 단서를 넣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하지만 그 실수는 하나님 편에서는 분명 뜻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 학원복음화를 위한 도구

사실 그 이전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축복이 있었지만 나는 그 때 비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당시를 생각 해 보았다.  내 뜻대로 내가 원하였던 대학을 갔다면? 내가 다녔던 교회 목사님이 입학등록금을 주었다면? 그러면 잠자리는? 야간도 없는 그 대학에서 돈은 어떻게 벌 수 있었나? 더더욱 전국에서 쟁쟁한 아이들이 모였는데 내가 실력이 많이 부족한데 따라갈 수는 있었는지? 내가 갈려고 하였던 그 대학을 갔다면 난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나는 인하대 전자공학과에 가서 필수과목이 전자기학을 권총을 두 번이나 맞았는데 말이다. 중학교 졸업 이후 쉬지도 못하고, 초지일관 앞만 보고 달려 와서인지, 하도 고생을 하여서인지 피로가 누적이 되었는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그 해 겨울 나는 결국 쓰러져 1년을 휴학을 하였다. 휴학을 하였지만 학교에서 돈이 매월 나왔다.

 

더더욱 나는 예장고신 출신이라 인하대에 SFC(전국학생신앙운동)를 창립하였다. 인하대에 SFC가 세워지는 것은 경인지역에 최초 설립이 되는 교두보였다.나는 학원 선교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였다. 매년 수련회 때마다 선교에 헌신하였는데, 그 당시 대표간사가 현 고신대원 이성구 교수였는데, 이분이 ‘선교지로 가기 전에 학원을 먼저 복음화하라’는 그 메시지에 인하대에 SFC창립과 학원복음화에 매진을 하였다. 학교에서 매월 30만원이 나오는 돈은 학비와 생활비 외 학원선교를 위해 사용하였다. 물론 내 방을 써큼룸으로 하고 말이다. SFC를 설립한지 2년 만에 새로 믿은 사람이 150명도 넘었다. 내 방에는 언제나 커피와 라면이 있었던 것이 비결이기도 하다. 내 방은 아침 8시와 오후 5시에는 늘 찬양과 QT모임, 기도 모임을 가졌다. 그 때 믿었던 형제들이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같은 교회에서 3가정이 있고, 각처에서 믿음 안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면서 교제하고 있다.

 

                                     

회사에서 안식년이 주어져 여행을 계획하던 중에 '십대들의 쪽지'에서 실시한 '호주언어연수'를 가족과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그 시간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또한 직장인으로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훌륭한 스승과 존경 받는 직장을 만난 덕에 저에게 주어진 일은 탁월하게 할 수 있었던 환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결혼할 자격증은 물론 부모가 될 자격증도 전혀 없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제 모습을 연수기간동안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길어질 것 같아서 언어연수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호주에 도착한 날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의 심각한 현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어를 20여년동안 배워도 외국인 앞에만 서면 말 한마디 못합니다. 그런데 호주에서 몇 일이 되지 않아서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자기소개와 한국 소개 등을 외국인에게 하는 것을 보고 바로 저런 것이 영어의 벽을 깨는 것이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이곳에 참석한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선생님과 의사 등의 직업을 가진 분들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즉 아이들의 수준도 상당한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과 한달 여 같이하면서 충격적인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들을 이렇게 방치하다가는 한국의 미래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아이들에게서 남 중심적인 사고를 찾아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TV에서 몰래 카메라로 교실의 장면을 방영하고 난 뒤 '교실붕괴'라면서 온 나라가 1년여 떠들석 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방송용'으로 생각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과 3주간 24시간을 같이하면서 이들이 '개'와 '십'자로 시작하여 '나', '같은'이란 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우리의 아이들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희 부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아이의 24시를 안다면 부모들은 아마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부모나 선생님들 앞에서의 모습과 아이들끼리만 있을 때의 모습이 너무나 다른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정부의 교육정책의 잘못이기 이전에 부모의 잘못이 가장 크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 부모들은 부모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양육이 아닌 사육을 하였습니다. 사실 아이의 잘못된 행위들은 모두 부모에게 배웠습니다.
'존벌기'는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리 좋은 교육을 가르쳐도 부모가 나쁜 본을 보인다면 자녀에게 음식과 독약을 동시에 먹여주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월리엄 데이비스' 박사는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충고하고 명령하는 그 시간에 비하여 아이들이 변하지 않는 것은 본 받을 모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정체성은 부모의 선택과 행동들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인지적으로 이해해서 형성된 것이라기 보다는 부모의 됨됨이 즉, 부모의 언어와 정직한 삶 그 올바른 기대치에 의해 형성이 됩니다. 부모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배웠고 그것은 제 자신에게도 맞는 말이었습니다.
호주언어연수에서 무엇보다도 특별하였던 시간은 1984년부터 '십대들의 쪽지'를 발행하는 김형모 선생님이 함께 하였다는 사실과 저녁마다 토로하는 그의 전문적인 강의였습니다. 이 강의는 아이들은 물론 저희 부부에게도 실제적인 도전과 변화를 주었고 사춘기에 접어드는 두 아들을 대하는 저의 말과 행동들이 달라지게 함으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주었습니다.
저는 3주간 집중적으로 자녀에 대한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지면을 빌어서 '존 드레서'의 책들과 강영우 박사의 책들과 김형모 선생님의 책들을 모두 추천하고 싶습니다. 많은 책 속에서 공통되는 것들이 '자녀를 안아주라,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 자녀에게 가치관을 심어 주라, 자녀에게 책을 읽게 하라 등'의 내용이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이 시간을 계기로 저희 아이들에게 하나 하나 꼭 실천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가장 큰 스승은 우리 부모들입니다.

채성태 이랜드 사보'아름다운정상' 편집장(ajung@elan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