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책

시 마당: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이해인

열국의 어미 2010. 6. 6. 11:14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연탄  한장-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을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어리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어 주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식탁 -  유 병 근

   

 

그가 바다구이를 집는다

 

젓가락으로 살을 헤집고

 

아가미를 뒤집는다

 

숨은 잔뼈를 발라낸다

 

등 웅크린 둥근 접시에 깔린

 

바다의 괄약근을 발라낸다

 

도다리 같은 가자미 같은

 

원형질 속으로 잠든

 

쥐라기의 바다를 발라낸다

 

숯불에 석쇠를 걸쳐놓고

 

다시 바다와 화해한다

 

불에 달구어야만 꽃 피는

 

바다의 몸에 젓가락을 댄다

 

누릇누릇 만개한 바다

 

잘 여민 접시에 담아낸다

 

 

 

 

 

「채송화- 김 윤현」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꽃을 나즈막히 피우겠습니다

꽃판을 달고 향기도 풍기겠습니다

제이름을 달지 못하는 꽃도 많습니다

토담 위라고 불만이 있을 리 없구요

속셈이 있어 빨강 노랑 분홍의 빛깔을

색색이 내비치는 것은 아닙니다

메마르고 시든 일상에서 돌아와 그대

마음 환히 열린다면 그만이겠습니다

몸을 일으켜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해도

마음 낮추어 세상 살아갑니다 .

 

 

 

 

 

 

 

 시의 집- 이해인  

 

 

나무 안에 수액이 흐르듯

내 가슴 안에는

늘 시가 흘러요

 

빛깔도 냄새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어

그냥 흐르게 놔두지요

 

여행길에 나를 따라오는 달처럼

내가 움직일 때마다

조용히 따라오는 ......

 

슬플 때에도

힘이 되어주는 시가 흘러

고마운 삶이지요

 

 

 

 

 

 

파도의 말 -이 해인

 

울고 싶어도

못 우는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울어줄게

마음놓고 울어줄게

 

 

오랜 나날

네가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받은

모든 기억들

행복했던 순간들

 

프르게 푸르게

내가 대신 노래해줄게

 

일상이 메마르고

무디어질 땐

새로움의 포말로

무작정 달려올게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이해인

 

 

나는 문득

외단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 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해질 무렵 어느 날 -이해인

 

 

꽃 지고 난 뒤

바람 속에 홀로서서

씨를 키우고

씨를 날리는 꽃나무의 빈집

쓸쓸해도 자유로운

그 고요한 웃음으로

평화로운 빈손으로

 

나도 모든 이에게

살뜰한 정 나누어주고

그 열매 익기 전에

떠날 수 있을까

 

만남보다

빨리 오는 이별 앞에

삶은 가끔 눈물겨워도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는

해질 무렵 어느 날

애틋하게 물드는

내 가슴의 노을빛 빈집

 

 

 

 

장미를 생각하며- 이해인

 

 

우울한 날은

장미 한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내어 울면

나의 눈물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다시 겨울 아침에-  이해인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갓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를 웃으며

하늘을 보네

 

 

 

 

 

 

봄 햇살 속으로  -이해인

 

 

긴 겨울이 끝나고 안으로 지쳐있던 나

봄 햇살 속으로 깊이 깊이 걸어간다

내 마음에도 싹을 틔우고

다시 웃음을 찾으려고

나도 한그루 나무가 되어 눈을 감고

들어가고 또 들어간 끝자리에는

지금껏 보았지만 비로소 처음 본

푸른 하늘이 집 한 채로 열려있다

 

 

 

  꽃샘바람 - 이해인

 

 

속으론 나를 좋아하면서도

만나면 짐짓 모른체하던

어느 옛친구를 닮았네

 

꽃을 피우기 위해선

쌀쌀함 냉랭함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얄밉도록 오래 부는

눈매 고운 꽃샘바람

 

나는 갑자기

아프고 싶다

 

 

 

 

 

삶과 시- 이해인

 

시를 쓸 때는

아까운 말들도

곧잘 버리면서

삶에선

작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욕심이

부끄럽다

 

열매를 위해

꽃자리를 비우는

한그루 나무처럼

 

아파도 아름답게

마음을 넓히며

열매를 맺어야 하리

 

종이에 적지 않아도

나의 삶이 내 안에서

시로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맑은 날이 온다면

 

나는 비로소

살아 있는 시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

 

 

 

 

버섯에게 -이해인

 

 

햇볕 한 줌 없는

그늘 속에서도

기품 있고 아름답게

눈을 뜨고 사는 너

어느 디자이너도

흉내낼 수 없는

너만의 빛깔과 무늬로

옷을 차려입고서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멋진 꿈을 펼치는 구나

 

넌 이해할수 있니?

기쁨 뒤에 가려진 슬픔

밝음 뒤에 가려진 그늘

웃음 뒤에 가려진 눈물의미를?

 

한 세상을 살면서

드러나는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너는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겠니?

 

 

 

 

이별 노래 -이해인

 

 

떠나가는 제 이름을

부르지마십시오

이별은

그냥 이별인게 좋습니다

 

남은 정 때문에

주저앉지 않고

갈 길을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움도

너무 깊으면 병이 되듯이

너무 많은 눈물은

다른 이에게 방해가 됩니다

 

차고 맑은 호수처럼

미련없이 잎을 버린

깨끗한 겨울 나무처럼

그렇게 이별하는 연습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앞 치마를 입으세요-  이해인

 

삶이 지루하거든

앞치마를 입으세요

 

꽃밭에 물을 줄땐

꽃무늬의 앞치마를

 

부엌에서 일을 할 땐

줄무늬의 앞치마를

 

청소하고 빨래할 땐

물방울 무늬의 앞치마를

입어보세요

 

흙냄새 비누냄새 반찬냄새

그대의 땀냄새를 풍기며

앞치마는 속삭일 거예요

 

그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조금 더 기쁘게

움직여 보라고

 

앞치마는 그대 앞에서

끊임없이 꿈을 꾸며

희망을 재촉하는

친구가 될 거예요

 

때로는

하늘과 구름도

담아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