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은 일 좀 못해도 된다는 회사, 가지 마라"
감혜림 기자 kam@chosun.com
美 월가의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씨
9세 때 시력 잃어- 서울맹학교 다니다 15세 유학… 하버드대 거쳐 MIT로
장애인에 장벽 있는 직업 연구-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연구하려 했지만 사례 없어… "내가 첫 성공사례 되자" 결심
월가 회사들에 수십차례 전화- 채용 거절당해도 전화 또 전화… JP모간, 1시간 면담 후 "OK"
실현 어려워 보이는 꿈 가져라- 장애인에 대한 인식 바꾸는 건 장애인 스스로의 열정… 노력·의지로 사람 감동시켜야
"제가 걸어온 길 중에 처음부터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13일 대전 유성구의 한 호텔 행사장. 미국 월가(街)에서 일하는 시각 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45)씨는 '꿈과 현실, 법과 사람의 마음'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날 강연의 청중은 전국의 맹학교나 특수학교, 복지관 등에서 근무하는 시각장애인 교육 담당자 150명이었다. 청중 중엔 시각장애를 가진 교사도 있어 책상에는 점자가 찍힌 종이나 음성 변환 기계 등이 놓여 있었다.
▲ 13일 오후 대전 유성구 인터시티호텔에서 미국 월가의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씨가‘꿈과 현실, 법과 사람의 마음’
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신씨의 강의는 1시간여 동안 이어졌다. 미국 하버드와 매사추세츠공대 (MIT)를 나왔으며,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 재무분석사(CFA)인 신씨는 장애인들에게 꿈을 이뤄가는 자신의 경험담을 간절히 설명했다.
신씨는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본인의 노력과 의지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장애인이니까 일을 조금 못해도 된다'고 하는 회사는 사정이 어려워지면 장애 직원을 가장 먼저 해고한다"면서 "장애인 고용할당제 등 법과 제도 외에도 장애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바로 장애인 스스로의 열정과 의지"라고 했다.
신씨의 인생은 '좌절'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선천적 안구 질환으로 9세 때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일본 출판사의 점자 악보까지 구해다 준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를 배웠다.
신씨는 서울맹학교에 다니던 15세에 미국 필라델피아로 유학을 가게 됐다. 시각장애 학생 중창단 반주자로 미국 공연을 갔다가 한 선교사의 초청을 받게 된 것이다. "점자 악보를 하루 종일 외우는 게 힘들어 피아노가 끔찍하게 싫었는데 피아노 덕에 미국에 갈 수 있게 됐으니 그야말로 새옹지마였다."
미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맹학교에 다녔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우울증까지 생겼다. 처음 미국에 도착해 만났던 데이비드 부부가 "우리와 함께 살자"고 했다.
뉴저지로 옮긴 신씨는 일반 고교에 진학했다. 데이비드 부부와 학교 교사들은 신씨를 친아들처럼 돌봤다. 졸업 당시 학교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학생회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미국 영주권이 없어 대학에 진학하려면 재정증명 서류가 필요했다. 서류가 필요 없는 학교를 찾아보니 아이비리그의 명문대밖에 없었다.
그는 착실히 쌓은 학교 성적과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내세워 1988년 하버드대에 합격했다. 정신과 의사를 꿈꾸며 심리학과에 진학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진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법이 바뀌어 꿈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애널리스트로서 제약회사에 대해 분석할 때 의대 준비를 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더군요."
대학 졸업 후 학자가 되기 위해 MIT 경영학 석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성별·인종·장애 등 진입 장벽이 있는 직업을 연구했다.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를 연구하려고 보니 전무(全無)했다. "내가 첫 번째 사례가 되자"고 결심했다. 수십 군데가 넘는 투자은행과 증권회사에 지원서를 냈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채용 여부를 확인했다. 번번이 거절당하던 끝에 뉴욕에 있던 JP모간에서 연락이 왔다. 신씨는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할 정도의 끈기와 고집이 통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인사과에서 인턴을 했다. 한 달 뒤 자금분석팀장이 신씨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장애에 대한 이야기는 빼고 업무 얘기만 해보자"고 했다. 1시간의 면담이 끝나고 신씨는 애널리스트는 아니지만 대출심사역으로 채용됐다. 이후 4년간 JP모간에서 일했고, 결국 애널리스트의 꿈을 이뤘다. 1998년 미국의 프라이빗뱅크(부유층을 위한 전문은행)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에 애널리스트로 채용됐다.
"실현하기 어려워 보이는 꿈을 가지세요. 대신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몇 배의 노력을 하세요. 무엇보다 지금 당장 좌절을 겪어도 불행해하지 마세요. 무엇이든 언젠가는 쓰임이 있습니다. 제가 그 증거입니다." 그의 강연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출처 : chosun.com 경제>핫경제인-입력 : 2012.08.14 03:04 | 수정 : 2012.08.1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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