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책

[스크랩] 이준관 시인의 시 5편

열국의 어미 2017. 5. 3. 17:09

이준관 시인의 시 5편입니다. 

 

부엌의 불빛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이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구부러진 길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캐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오이꽃 피다

 

 

담장 너머 넘어다 보면

담장 안에 오이꽃 피었어라.

오이꽃 피면

오이꽃처럼 그리운 밤들이 많아진다.

그리운 밤들이 많아져서

밀잠자리도 눈을 뜨고 잠이 들었어라.

옻오를 듯, 옻오를 듯,

맑게 갠 날에

오이꽃 피었어라.

오이꽃 속에는

초사흘달의 이쁜 손톱자국이 박혀 있어라.

오이꽃 옆에 가면 종아리가 가려워,

종아리를 긁으면 내 손끝에 돋는 푸르른 핏줄

오이꽃,

오이꽃 피면

오이꽃에 엎드려 첫 가을 벌레 소리 들어라.

 

 

 

거리에 가을비 오다


노란 우산 아래로 장화의 물방울을 튀기며
나는 거리로 나선다
비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 나는 들으마, 너는 말하라.
나는 외로운가 보다.
나는 누구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은가 보다.
풋내기 시인처럼 앞뒤 이 맞지 않은 네 말소리에
나는 열중한다.
얼간이처럼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나는 외로운가 보다.
길가에는 젖은 발들이 흐른다.
젖은 발들이 내 쓸쓸한 발등을 밟는다.
나뭇잎들이 비의 말을 따라 흉내를 낸다.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따먹으며, 나뭇잎은 나보다 더 외로운가 보다.
항상 나에겐 낯설기만 한 비의 알파벳.
異國 처녀의 눈처럼 파란 비 오는 가을 풍경.
나는 누구를 방문할 일도 없는데
꽃집에 들러 꽃을 산다.
주정뱅이처럼 꽃을 보고 혼자 지껄이는 나는
형편없이 외로운가 보다.

 

 

 

여름 별자리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에 가서
별을 보았다.
감자밭에서 돌아온 어머니 호미 같은
초승달이 서쪽 산자락으로 지고
감자꽃 같은 별들이 돋아났다.
어미곰과 아기곰이 뒹굴며 노는 큰곰 작은곰 별자리
은하수 물방울을 퉁기며 솟구치는 돌고래 별자리
나는 어렸을 때 배웠던 별자리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았다.
그 이름에 대답하듯 별들이 온 하늘 가득
뽕나무 오디 열매처럼 다닥다닥 열렸다.
별똥별 하나 저 멀리 밤나무 숲으로 떨어졌다.
저 별똥별은 가을에 밤 아람으로 여물어
밤송이 같은 아이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리라.
아내는 세상에나! 별이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여기 다 모여 있었네 하면서 별처럼 눈을 빤짝거렸다.
그리고 옥수수를 따서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듯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세상에나!
우리는 낮이나 밤이나 아름다운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살고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외양간이 딸린 민박집 방에서
별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송아지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미 소는
가끔 깨어 송아지를 혀로 핥아주고
그때마다 별들은 잠을 깨어
딸랑딸랑 워낭 소리를 내곤했다.

 

 

 

 

 

출처 : 사라㉤
글쓴이 : 백우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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