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밥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호 박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하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장 찍어 본 적 없는 나(我)라 소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 본 밤 호박은 방안 가득 넝쿨을 뻗고 코끼리 귀만한 잎사귀 꺼끌꺼끌 호박 한 덩이 속에 든 호박들 그새 한 마을 이루더니
흰곰팡이 피우며 최선을 다해 물컹쿨컹 썩어 들어가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네
빨래집게
내 몸을 매달아본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 다무는 일이 일생인 나를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르고 훑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샐러리맨 예찬
오래된 잠버릇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날개 휘젓던 공간밖에 믿을게 없어 날개의 길밖에 믿을 게 없어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 추락하다 잠이 깨면 곧 비행할 포즈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착륙하는 파리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저 사내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지구의 밑 부분에 집이 매달리는 시간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발 붙이고 사는 땅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중력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잠드는 저 사내는 슬프다 어떤 날은 저 사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기도 한다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보다
만찬(晩餐)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 한 상
달의 눈물 고단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노루들의 잠자리나 되었을 법한 산속으로 머리를 눕히러 찾아드는 곳 힘들여 올라왔던 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몸 더럽히고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더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 아직 잠 못 이룬 사람들 많아 하수도 물소리 골목길 따라 흘러내린다 쇠철망 틈새로 들려오는 하수도 물소리 누가 때늦은 목욕을 했는지 제법 소리가 커지기도 하며 썩은내 풍길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또 비린내가 좀 나면 어떠랴 그게 사람 살아가는 증표일진대 이곳 삶의 동맥처럼 새벽까지 끊기지 않고 흐르는 하수도 물소리 물소리 듣는 것은 즐겁다 쇠철망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면 달의 눈물 하수도 물소리에 가슴이 젖는다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집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라면을 먹는 아침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쫙 펼쳐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면의 양념으로 팔팔 끓인 스포츠면 찌개에 밑반찬으로 씀바귀 맛 나는 상계동 철거 주민들의 눈물로 즉석 동치미를 담그면 매운 고추가 동동 뜬다 거기다가 똥누고 나니까 날아갈 것 같다는 변비약 아락실 아침 광고하는 여자의 젓가락처럼 쫙 벌린 허벅지를 자린고비로 쳐다보기까지 하면 나의 반찬은 너무 풍성해 신문지을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
[사진출처 내 영혼의 깊은 곳] 함민복 1962년 충북 청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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