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비/ 고은
조선시대 양반 녀석들 딱한 것들
폼잡기로는 따를 자 없었다
그것들 우는 일조차 천한 일로 여겼것다
슬픔조차도 뒤에 감추고 에헴에헴 했것다
그래서 제 애비 죽은 마당에도
아이 아이 곡이나 한두 번 하는둥마는둥
하루내내 슬피 우는 건 그 대신 우는 노비였것다
오늘의 지배층 소위 오적 육적 칠적 역시
슬픔도 뭣도 모르고 살면서 분부를 내리것다
울음 따위는 개에게도 주지 말아라
그런 건 이른바 민중에게나 던져주어라
그 민중이나 울고불고 아이고 대고 할 일이다
그런 천박한 일 귀찮은 일은 내 알 바 아니야
하기야 슬픔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
울음이 말단이나 노동자에게만 머물 때
그런 것들이 다만 천박한 것으로만 보일 때
시인아 너야말로 그 민중과 함께
민중의 울음을 우는 천한 곡비이거라 곡비이거라
감옥의 무기수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 인생을 노래해 주시오
그 말씀 잊어버릴 때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아니다
곡비/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엄마는
곡을 팔고 다니던 곡비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 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고 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 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 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곡비/ 안도현 |
울다가 다 못 울고 죽은 것들이
살아도 괴로운 것들이 곡비(哭婢)가 되었다.
실상사 귀농학교 계곡에서 책을 읽다가
곡비들이 몰려와 우는 통에 두 귀를 빼앗겨 버렸다.
저렇게 순간도 쉬지 않고 우는 까닭은
한 잔의 술 때문이 아니라 강의 등뼈를 물소리로 채우기 위한 것
계곡 물에 발 담근 억새들의 발목을 뜯어먹으며
어디 가서 울어줄 데 없나, 짐승처럼 두리번거리는
물소리여, 사람이 죽어도 고요한 세상을 꿰차고 가는 물소리여,
내가 밑줄 그어 놓은 모든 책의 페이지를 하얗게 지우는구나
얼음장 밑에서 엎드려 울다가 오늘은
물길을 아랫마을로 서둘러 내려보내 놓고 자진(自盡)하는구나
같이 울어주는 게 아니라, 울음마저 탕진하기 위해
곡비는 죽어서 물소리가 되었다.
곡비(哭婢)란 왕이나 양반의 장례식에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哭(소리내어 울 곡)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대개 왕실의 장례인 경우 궁인이 담당했고 사대부의 경우에는 여자 종을 시켰으나, 여의치 않을 때는 민가의 여자를 고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문화에서는 장례를 치르는 동안 상주들이 구슬프게 우는 것이 예의 였다. 그러나 장례 내내 곡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를 중시하던 시절 상주를 대신해 구슬피 울어 주고 품살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곡비는 다른 사람 대신 울어 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다.
곡비의 울음은 지극한 슬픔이 담겨 있지만, 슬픔을 치유하는 힘을 지니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의 울음은 슬픔을 넘어 요염하게 보인다. 곡빈ㄴ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으나 그들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기도 한다. 그들은 슬픔을 통해 슬픔을 치유하는 예술가들이었고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모두 곡비의 후예들인 셈이다.
문정희 시인의 곡비에는 시인과 같은 예술가의 모습으로 곡비가 소개된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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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정화시키는 곡비의 시
정우영(시인)
1. 내가 만난 곡비들
요즈음 내 삶은 뒤숭숭하다. 한동안은 한국과 미국 간에 진행되는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의 FTA가 나를 괴롭히더니 지금은 ‘북핵’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의 PSI가 내 꿈자릴 어지럽힌다. 난 정말 이런 것들과 관계 맺고 싶지 않다. 그저 내 생각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몽상임을 나도 안다.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런 것들은 이미 아주 굳건하게 나를 포위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산으로 들어가라고.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라고. 그게 뜻대로 될까. 산이라고 안전할까? 마음속을 비운다고 불안이 잠식되나? 전지구를 뒤흔드는 권력 앞에서 도대체 무엇이 자유를 구가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도피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 자락 안으로 들어가서 평생을 비굴하게 살아가거나(오, 저 숱한 수구들처럼! 친미 사대주의자들처럼!) 아니면, 아예 정신을 놓아버리거나, 한 생을 두고 괴로움을 만지작거리면서 오들오들 춥게 살거나 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문학판에서 부쩍 정신을 놓아버린 자들이 늘어났다는 소리가 들린다. 평생을 비굴하게 살겠다고 선언한 자들이 많아지는 것은 인간의 기회주의적 속성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정신을 놓아버리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다르다. 안타깝고 비감스럽다.
이런 생각으로 지난 가을호 문예지를 뒤적거려서 그런지 나는 곡비(哭婢)를 여럿 만났다. 정신 놓은 시 대신에 삶을 울어주는 시들, 인정(人情)을 길어 올리는 시들을. 뒤숭숭한 내 삶자리에 찾아와 나를 위무하던 곡비의 시들과 함께 나는 이 겨울을 나고자 한다. 춥게 살망정 다사로운 꿈을 간직한 곡비의 시들을 만나 보자.(‘곡비’는, 원래 ‘장례 지낼 때 상주를 대신하여 울어주거나 장례행렬 맨 앞에서 울고 가는 종’을 일컬으나, 나는 여기서 ‘세상을 대신하여 울어주는 존재’의 의미로 ‘곡비’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
2-1. 침묵(沈黙)의 곡비
침묵은 때로 소리보다 무겁다. 착 가라앉은 침묵은 천지를 제압한다. 대개 기겁하게 놀라는 것은 침묵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때이다. 김경윤에게서 나는 침묵의 곡비를 만난다. 울지 않는 곡비의 곡진한 침묵 속에서 오히려 세상의 “조등은 꽃처럼 붉다.” 김경윤은 온전하게 느낀다. 침묵은 힘이 세다.
나무들에게 가고 싶어서
속살 깊이 침묵의 나이테를 키우는
나무들에게 기대고 싶어서
한지韓紙에 먹물 번지듯
어둠이 산 아래 마을로 번져오는
이 가을 저녁, 나는
침묵 하나 거느리고 억새밭을 지나
뒷산 가시나무숲을 오른다
적막한 숲 속에서
허공에 파문을 내며 날아오르는 갈가마귀떼
꽃치자빛 노을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진
서편 하늘이 일순 먹먹하다
서늘한 초저녁 별들이 안부를 묻는
숲으로 가는 이 가을 저녁
저 산 아래 마을에선 또 누가 이 세상을 떴는지
마을 초입에 걸린 조등弔燈 하나 꽃처럼 붉다
어둠이 나를 지울 때까지
나무들의 침묵에 기대어 이승의 길을 묻는
나의 말은 아직 너무도 서툴고.
-김경윤, 「숲으로 가는 가을 저녁」, 《문예연구》 2006년 가을호
어느 날 김경윤은 번다한 마을을 벗어나 “뒷산 가시나무숲을 오른다.” “속살 깊이 침묵의 나이테를 키우는/ 나무들에게 기대고 싶어서”이다. 왜 그는 침묵의 나무들에게 기대고 싶었을까. 마을이 너무 분주하거나 시끄러운 소음 속에 빠져 있어서일 것이다. 그에게 마을과 숲으로 이어진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지친 삶을 벗어나 위무를 얻는 충전의 길이다. 그는 적막한 숲과 침묵의 나무를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그가 “나무들의 침묵에 기대어 이승의 길을 묻는”다고 할 때 그 물음은 새로이 생성된 삶의 좌표이다. 침묵을 통해 새로운 삶이 생성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을에서의 삶은 소비이며 숲의 침묵이야말로 생산과 생성이다.
우리가 잊고 있어서 그렇지 우리는 사실 숲의 복원력에 우리 삶을 숱하게 의탁한다. 숲은 침묵을 통해 우리를 포용해주는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숲에 들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의 몸을 띄워 봐라. 통통거릴 것이다. 숲과 나무가 자신의 에너지를 통해 나를 살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게 빌려준 것이라는 점이다. 때가 되면 우리도 숲과 나무에게 그 에너지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처럼 침묵의 곡비는 침묵함으로써 슬픔의 조등을 붉게 하기도 하고, 침묵함으로써 지친 삶에 새로운 생성 에너지를 북돋워주기도 한다.
2-2. 해원(解寃)의 곡비
나는 가끔 하느님께 묻고 싶다. 그 착한 사람들 도대체 왜 그리 빨리 모셔 가시는가 하고. 좀더 계셔도 좋을 사람은 데려 가고 이젠 그만 데려가 주셨으면 하는 사람은 악착같이 곁에 머물게 한다. 원망의 곡비가 고개 쳐드는 순간이다. 이홍섭은 “폭우가 휩쓸고 간/ 강원도 인제군 한계령 산간 마을”에서 허탈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하느님은
이 골짜기 착한 어르신들을 다 어디로
데려가신 걸까
폭우가 휩쓸고 간
강원도 인제군 한계령 산간 마을
주인 없는 뜨락에서
눈을 가리고 누워 버린 원추리꽃 앞에
쪼그려 앉아 생각해 보느니
아무리 물어보아도
하느님은, 하느님은
너무 멀리 왔다 가신 것이다
-이홍섭, 「원추리꽃」, 《시인시각》 2006년 가을호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느님은 “너무 멀리 왔다 가”셨다. 그리 하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멀리 와서 너무 심하게 난장을 치셨다. “주인 없는 뜨락에서/ 눈을 가리고 누워 버린 원추리꽃 앞에/ 쪼그려 앉아 생각해” 본다. 원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척박한 땅 땀 흘려 일군 이들 순식간에 데려가고, 인정이 피어나던 아담한 집은 자갈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연재해라고 체념하기엔 “이 골짜기 착한 어르신들”의 순박한 목숨과 살가운 손길이 참으로 애틋하다.
그러나 이홍섭은 흥분하지 않는다. “눈을 가리고 누워 버린 원추리꽃”처럼 조근조근 읊조린다. 원망의 곡비는 이 점이 불만스럽다. 최소한 하느님 앞에 삿대질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망가뜨릴 삶이라면 조금은 느슨하게 살게 했어야 한다고. 저 산고랑 한 줄 개간하면서 이 골짜기 착한 어르신들 주름살 한 줄씩은 늘어났을 터이다. 그러니 아마도 해원(解寃)하지 않는다면 그 착한 어르신들이라 할지라도 구천을 떠돌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여 나는 이홍섭의 시를 갑자기 오독하는 것인데, “아무리 물어보아도”가 자꾸 “아무리 울어보아도”로 읽히는 것이다. 심중에 들어앉은 곡비가 내 눈을 어지럽히는 것인가.
2-3. 인정(人情)의 곡비
우리 감정 영역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게 이것 아닐까. 인정(人情). 사람다운 사람이 드물어지는 것처럼 인정도 메말라 간다. ‘각박하다’라는 말이 훨씬 더 실감난다. 그런데 유강희는 캄캄한 골목 끝에 나와 있는 이불 한 채에서 아름다운 인정을 읽는다. 인정의 곡비를 통해 애잔한 슬픔과 따스한 정감을 회복하고자 한다.
내가 사는 작은 동리
어느 집 대문 앞에
오래된 이불 한 채 나와 있다
이불은 제 몸을 둘둘 말아 모지락스런 세월도
층층으로 골고루 펴 떠받들고 앉아 있었는데
안으로 접힌 주름이 켜켜이 그늘을 만들어
무슨 꽃 자글자글 피우고 있는 게
적이나 내겐 마음 깨끼는 일이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할라치면
어디서 붉은 접시꽃이 걸어와 입을 가로막고
지금 내 앞의 한 채 이불이란
고스란히 저 옛집의 대소사를 올올이 새기고 있을 거였다
첫날밤 족두리 푼 신부의 두근거리는 호롱불 그림자가 다녀갔으리라
그리하여 밤이면 젊은 내외가 서로 살을 섞어
청대 같은 자식도 연년으로 놓았을 거였다
아니면 평생 골골 앓는 사내의 피고름 다 받아낸
한숨 덕지덕지 괸 누더기 꽃자리였거나
혹은, 시어미 구박에 못 견딘 며느리 속울음까장
자분자분 이겨서 저 비단 위 색색이 수놓은
목단의 꽃잎으로 다시 피워냈을지도 모를 거였다
또 밤에만 활짝 깃을 펴는 공작은 제 깃털의
호사스러운 빛깔에 맞는 울음 한 번
제대로 속 시원하게 뽑아내지 못했을 것인데
간밤엔 누가 이승의 고흔 숨 몇 올
머리맡 은가락지처럼 향그러이 풀어놓았는지
저 한 채의 소슬한 이불,
살아서 누구보다 외로웠을 영혼 하늘로 모시고
이제는 세상 구경이나 한번 실컷 해보겠다는 듯
장롱 속보다 캄캄한 골목 끝에 나와 있는데
이 세상 누구의 슬픔 하나
따뜻한 이불 한 채 되어 덮어준 적 없는 난
그저 행인처럼 무심함을 가장하지만
그 옛집의 대문 앞을 쉬이 떠나지 못하네
-유강희, 「이불 한 채」,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제 몸을 둘둘 말아 모지락스런 세월” “떠받들고 앉아 있”는 저 이불은 꾀죄죄하다. 그러므로 “적이나 내게는 마음 깨끼는 일”이다. 유강희에게 이불은 늙고 낡은 노인네 하나가 골목 끝 캄캄한 응달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된 이불에서 옛집에 올올이 새겨진 대소사를 읽는다.
그렇지 않은가. 이불만큼 살갑게 사람들을 받아주는 대상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저 이불은 “젊은 내외가 서로 살을 섞은” 꽃자리이기도 하고, “평생 골골 앓는 사내의 피고름 다 받아낸/ 한숨 덕지덕지 괸 누더기 꽃자리”이기도 하다. 뿐인가, “시어미 구박에 못 견딘 며느리 속울음까장/ 자분자분 이겨서 저 비단 위 색색이 수놓은” 꽃자리이자, “간밤엔 누가 이승의 고흔 숨 몇 올/ 머리맡 은가락지처럼 향그러이 풀어놓았을” 그런 꽃자리이다.
노인네가 그 넉넉한 품안에서 여러 사람들을 기르듯이 인간사 모든 애환을 함께 한 것이다. “살아서 누구보다 외로웠을 영혼 하늘로 모시고” 난 저 이불은 그러나 지금 캄캄한 골목에 버려졌다. 아마 시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쓸모로 세상을 재단하는 현대사회에서 저 이불은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 인정의 곡비는 추억에 호소하지만 누가 저 삭아가는 노인네를 안방에 고이 모시려 하겠는가.
‘이불 한 채’는 말한다. 나와 함께 사람살이의 정겨움과 살가움도 사라지리라고. 인정의 곡비는 그 황폐함을 연상하면서 눈자위 붉어지는 것이나 어쩌랴. 사람들이 인정보다는 각박을 스스로 선택한 것인데.
2-4. 간구(懇求)의 곡비
독거노인을 생각하면 참 스산하다. 삶과 죽음을 체념한 듯 비를 바라보는 눈빛을 떠올리면 울적해진다. 그 모습에서 뒷날의 나를 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낡아가는 것의 비명이 들리기 때문일까. 박형준은 “시멘트 마당 쪽으로 개발사슴처럼 다리를 내놓고/ 방턱에 앉아, 장맛비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독거노인”한테서 고라니를 본다. 나는 “부서진 나무 피리에서 간절히 음계를 꺼내고 있”는 간구의 곡비를 본다.
고개를 숙이고, 주방 창문턱에 놓고 기른
제라늄 화분을 살피다가
아랫집 지층에 멈춘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시멘트 마당 쪽으로 개발사슴처럼 다리를 내놓고
방턱에 앉아, 장맛비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독거노인
등뒤로 모시로 짠 발이 누추한 살림살이를 가리느라
방안에 빗금을 긋고 있다
벌겋게 녹이 스는 우산을 당신 쪽으로 받쳐들고
노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시멘트 마당 한 쪽에는 장판을 씌운 평상이 놓여 있다
노인은 평상에 파문 이는 비를 보고 있다
나는 이사 가는 집마다 볕이 들지 않아 창턱에 식물을 놓고 길렀다
새로 이사 온 집에도 주방 창문에 제라늄 화분을 하나 놓고
빨간 꽃망울이 맺히는가 싶어 며칠 가슴을 졸이다가
꽃잎 맺힌 자국이 떨어져 창 아래를 내려다본 적 있다
가난한 집에는 저녁에 볕이 다 모여든다
다세대 건축물 사이로 환한 저녁 햇살이 내리고
노인이 평상에 앉아 나무 피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사나흘 장맛비는 그칠 줄 모르고 노인의 생각은 하도 깊어
머릿속에서 비는 몇 십 년째 쏟아진다
평상에서 파문 이는 빗방울들
그 저녁에 본 피리 구멍에서 쏟아지는 음계 같다
번개가 치고 우주의 힘줄이 불거진다
그리운 사람 하나 음계의 계단을 밟고 하늘에서
내려올라나 내려올라나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제라늄 화분을 살핀다
저 아래, 지층의 잡목림 속에서 고라니가 넓적한 발을 내밀며
부서진 나무 피리에서 간절히 음계를 꺼내고 있다
-박형준, 「피리」, 《한국문학》 2006년 가을호
“가난한 집에는 저녁에 볕이 다 모여든다.” 이 구절만으로도 이 시는 빛난다. 맞다, 가난한 집은 대체로 볕에 돌아앉아 있어서 다 저녁에나 잠시 볕이 머물다가 간다. 그래서 가난한 집은 대체로 춥고 음울하다. 그런데다가 장맛비까지 내리고 있다면 을씨년스러움은 갑절 더해진다. “노인은 평상에 파문 이는 비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노인의 생각은 하도 깊어/ 머릿속에서 비는 몇 십 년째 쏟아”질 것 같다.
그런데 박형준은 “평상에서 파문 이는 빗방울들”에게서 “피리 구멍에서 쏟아지는 음계”를 듣는다. 이때의 음계는 단순히 음의 계단이 아니다. “번개가 치고 우주의 힘줄이 불거”지도록 만드는 하늘 계단이다. “그리운 사람 하나 음계의 계단을 밟고 하늘에서/ 내려올라나 내려올라나” 간구하는 천상의 계단인 것이다. 그럴 때 노인은 “지층의 잡목림에” 사는 고라니가 된다. 그런 간절함을 시인은 고라니 눈빛에서 읽었던 모양이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어 보자. 고라니가 된 노인은 어디로 갔을까. 답은 ‘승천했다’이다. 자유로워진 고라니 노인은 아마 하늘 계단을 통해 내려온 그리운 사람과 함께 하늘로 돌아갔을 것이다. 마치 비 오는 날에 승천하는 이무기처럼. 이것이 간구의 곡비가 노인을 위해 올리는 간절한 바람이다.
2-5. 순응(順應)의 곡비
정말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고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흥할까. 그 역 아닌가. 살다 보면 이 세상이 하늘을 거스르는 자들 것임을 뼈저리게 확인할 때가 많다. 극히 최근까지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는 자들이 오히려 ‘악의 축’임을 우리는 아랍의 숱한 주검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도 김신용은 순응을 말한다. 순응의 곡비가 감자꽃처럼 다소곳하다.
꽃을 따주어야 열매를 더 튼실히 익히는 꽃이 있다
흙 속에서 울퉁불퉁 징소리가 울릴 듯한 구근을 매다는 꽃이 있다
그 꽃은 소박하다 흰 베옷을 입은 듯 담백해 보인다
이미 자신의 구근에 씨눈을 감추고 있어, 受精의
매개체에게 눈길을 줄 필요가 없어서일 것이다
일생을 밭이랑을 흐르며 살아온 아낙의 머리에 얹힌
흰 수건 같은 얼굴이어서, 하루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벌써
지어 놓은 草墳 같은 얼굴이어서, 그 꽃대는 길고 가늘다
낮은 바람결에도 쉽게 꺾일 듯 부드럽다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툭툭 털면 한 생애가 가는
그 순응이, 스스로 목이 꺾이고 싶은 의지처럼 보여
제 손으로의 摘花이듯 비장하게 보여
때로 꽃을 꺾는 손길을 주춤거리게 하지만, 멈추게 하지만
누구의 손끝만 닿아도 자진이듯 꽃대를 꺾는 황홀들로 만개해 보이는
꽃밭, 가닿는 손길마저 눈부시게 하는 감자꽃
오늘, 그 감자꽃밭에서 감자꽃을 딴다
세상에는 이렇게 꽃을 따주어야 더 굵은 열매를 익히는 꽃이 있어
그렇게 꽃을 꺾어주는 손길이 受精의 매개체인 꽃도 있어
-김신용, 「도장골 시편-감자꽃」, 《리토피아》 2006년 가을호
생각해 보니 감자꽃을 보면서 꽃이라고 여겨본 적이 별로 없다. 분명 꽃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감자꽃을 꽃으로 대접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감자꽃은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늘 가까이에 있었다. 그 존재성은 시골 아낙과 흡사하다. 역사의 어느 한 줄기에도 맺히지 않지만 그 무리의 존재로서 귀한 사람들, 시골 아낙. 그래서 김신용은 감자꽃을 일러 “일생을 밭이랑을 흐르며 살아온 아낙의 머리에 얹힌/ 흰 수건 같은 얼굴”이라 한 것인가.
감자꽃은 소박하고 “흰 베옷을 입은 듯 담백해 보인다.” 또 “태어나면서부터 벌써/ 지어 놓은 草墳 같은 얼굴이어서” “낮은 바람결에도 쉽게 꺾일 듯 부드럽다.” 밭고랑에서 일하는 아낙이 그대로 감자꽃이 된 것 같다. 그 모습은 자연 순응 그 자체다. 전혀 거스르지 않는다.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툭툭 털면 한 생애가 가는” 순응이다. 시골 아낙의 일생이 정말 애잔하고 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순응을 순응으로만 바라봐서는 곤란하다. 그 순응의 아낙은 “누구의 손끝만 닿아도 자진이듯 꽃대를 꺾는 황홀들로 만개해 보이는/ 꽃밭, 가닿는 손길마저 눈부시게 하는 감자꽃”이다. ‘자진이듯 꽃대를 꺾는 황홀들로 만개해 보이는 눈부신 감자꽃’의 순응은 체념적 순응이 아니다. 능동의 순응이며 포용의 순응이다.
그리하여 나는 순응의 곡비가 불러내는 저 다소곳함의 내면에서 완고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소박하고 담백하지만 자진의 황홀이 내면에 가득 찬 그런 아름다움이다.
3. 시의 마음, 곡비의 마음
앞에서 보인 ‘침묵’이든 ‘인정’이든 그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간에 곡비는 울음을 머금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기본적으로 울음 위에 펼쳐진다. 그러나 그 울음이 슬픔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정화 작용이 더 크다. 일종의 씻김굿이라고나 할까. 나는 시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각박을 선택한 현대인들에게 시가 주어야 할 것은 또 다른 각박이 아니다. 정신을 놓아 버린 채 더 세고 더 현란하고 더 파편화한 감각과 감정을 전달하려 애쓰는 시는 시라고 볼 수 없다. 마치 질주하는 것처럼 말을 내뱉으며 내달리는 시도 마찬가지다. 시로 질주해서 도대체 무얼 할 것인가. 물러나서 더 넓게 더 느슨하게 세상을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곡비의 마음을 닮자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대신해서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시인의 마음 아닐까.
나는 다시 곡비의 시들을 펼쳐 든다. 맘속으로 잔잔한 울음이 느긋하게 흐른다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각박을 선택한 현대인들에게 시가 주어야 할 것은 또 다른 각박이 아니다. 정신을 놓아 버린 채 더 세고 더 현란하고 더 파편화한 감각과 감정을 전달하려 애쓰는 시는 시라고 볼 수 없다. 마치 질주하는 것처럼 말을 내뱉으며 내달리는 시도 마찬가지다. 시로 질주해서 도대체 무얼 할 것인가. 물러나서 더 넓게 더 느슨하게 세상을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곡비의 마음을 닮자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대신해서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시인의 마음 아닐까.
나는 다시 곡비의 시들을 펼쳐 든다. 맘속으로 잔잔한 울음이 느긋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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