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문학

[스크랩] 2017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당선작 <초록 안경의 소원>

열국의 어미 2018. 1. 28. 23:39

■ 2017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동화부문 당선작


초록 안경의 소원

 

유진희

 

 

한 눈에도 작고 오래된 안경점의 가장 구석진 자리는 늘 초록 안경테의 차지였다. 햇살이 가장 늦게 찾아들었다 가장 먼저 떠나는 곳. 그 자리에서 수많은 안경테가 사람들을 만나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름다운 당신을 위한 특별한 안경.

안경점 창에 붙어 있는 홍보지 문구를 바라보며 특별한 안경이 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빛바랜 홍보지처럼 초록 안경테의 꿈도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안경점 맞은편에 대형 안경점이 생기면서 안경사 아저씨의 얼굴도 생기를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안경사 아저씨가 큰 결심을 한 듯 초록 안경테가 있는 진열장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단번에 초록 안경테는 물론 다른 안경테들까지 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안경테들은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를 버리려는 거야.”

요즘 계속 손님이 뜸했잖아.”

저마다 불안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초록 안경테도 두려움이 앞섰다.

버려지다니!’

이미 마음을 비운 초록 안경테였지만, 버려지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걸까?’

그런데 흔들리던 바구니가 갑자기 멈추었다.

뭐지?’

안경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에 초록 안경테는 눈이 부셨다. 온몸을 휘감는 겨울바람이 시원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보니 바깥이었다. 그동안 구석 자리 답답한 곳에서 따사로운 햇살도, 세찬 겨울바람도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다. 그제 서야 초록 안경테는 다른 안경테들과 함께 쓰레기통이 아닌 안경점 앞길 진열대에 놓였다는 걸 알았다.

와아, 저건 뭐지?’

밖이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만 있었던 초록 안경테는 낯선 풍경들이 흥미롭고 궁금했다. 안경사 아저씨가 맞은편 안경점을 바라보며 점포 정리, 재고 처리따위의 문구가 적힌 종이를 붙이는 동안에도 초록 안경테는 주위를 둘러보느라 바빴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데 나를 선택해 주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초록 안경테 마음에서는 그동안 묻어두었던 특별한 안경이 되는 꿈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안경점 구석 자리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소리에 초록 안경테는 주위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자신과 똑같은 색깔의 불빛이 대낮인데도 도로에서 당당히 빛을 내고 있었다.

이야, 나랑 똑같은 색이야.”

초록불이 켜지자 사람들은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기 시작했다. 초록불이 깜빡이자 사람들은 발길을 재촉했다. 초록불이 꺼지자 멈춰있던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단한 초록색이야! 그런데 난.’

초록 안경은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잠시 살아났던 꿈도 금세 고개를 푹 숙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신호음에 맞춰 켜진 초록불에 다시 차들은 멈추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틈에 맞은편에서 엄마의 손을 잡아끌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순간 초록 안경테의 가슴은 쿵쾅대기 시작했다.

초록색 눈동자라니!’

아이의 왼쪽 눈동자는 초록빛이었다.

저 아이의 안경이 될 수 있다면.’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초록 안경테는 자신도 초록불처럼 멋진 초록색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말이 맞지? ‘점포정리라잖아. 아직 이 정도는 보인다니까.”

안경점 앞에 선 아이는 보란 듯이 으쓱하며 엄마에게 말했다.

맞은 편 안경점에 멋진 안경이 더 많을 텐데.”

엄마는 못내 아쉬운 듯 아이를 바라보았다.

엄마 수술 끝나고 병 다 나으면, 그때. 난 잘 보이기만 하면 상관없어.”

아이는 초록눈을 반짝이며 엄마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엄마가 얼른 건강해져서 우리 시우 눈동자 닮은 초록 바다도 보러 가야지.”

창백한 얼굴의 엄마도 환한 웃음을 보였다.

초록 바다?’

초록 안경테는 아이의 눈동자를 닮았다면 초록 바다도 분명 멋질 거라고 생각했다.

제발, 꼭 너와 함께 하고 싶어.’

처음으로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엄마, 이것 좀 봐! 초록색이야.”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초록 안경테를 집어 들었다. 어느새 초록 안경테는 아이의 둥근 콧등에 걸쳐 있었다.

우리 시우, 정말 멋지다!”

엄마는 아이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시우, 시우, 시우.’

초록 안경테는 시우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시우는 초록 안경테를 들고 안경점으로 들어갔다.

여러 눈동자를 봐왔지만, 초록 눈동자는 나도 처음이구나. 참 예쁜 눈동자야.”

시력 검사를 마치자 안경사 아저씨는 초록 안경테에 맑고 반짝이는 안경알을 끼워주며 말했다.

엄마도 그러셨어요. 예쁘다고. 하지만 친구들은 제 눈이 이상하대요.”

시우는 잠시 시무룩하다 안경사 아저씨가 건네는 안경을 쓰자마자 다시 밝아졌다.

안경 쓰니까 엄마 얼굴이 환하게 보여. 이 안경 쓰고 꼭 초록 바다 보러 가는 거야. 약속!”

시우와 엄마는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초록 안경테가 초록 안경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초록 안경은 세상 누구보다 특별한 안경이 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도착한 시우네 집은 초록 안경이 살았던 안경점보다 좁아 보였다.

엄마, 추웠지? 이불 깔아줄게. 누워서 몸 좀 녹여. 보리차 따뜻하게 해서 올게.”

시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를 끌어 앉혔다.

엄마가 해도 돼.”

난 엄마를 지키는 기사잖아! 엄마의 심장이 튼튼해질 때까지 내가 지킬 거야.”

시우는 해맑게 웃으며 이불을 펴고, 보리차를 데웠다.

참 착한 아이구나.’

초록 안경은 시우를 바라보는 내내 괜히 뿌듯한 마음에 자꾸 웃음이 물렸다.

쟨 눈치도 없이 왜 저렇게 웃어 댄대?”

느닷없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걸린 둥근 거울이 초록 안경을 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의 벽시계 할아버지도, 서랍장도 모두 우울해 보였다.

오늘 와서 뭘 알겠어?”

서랍장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초록 안경을 바라보았다.

시우 엄마가 곧 수술이 있어서 내일 입원하거든. 다들 그게 걱정이 되어 저러는 거야.”

묵묵히 시곗바늘을 움직이던 벽시계 할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수술하고 다 나으면 초록 바다도 보러 간대요.”

초록 안경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거울과 서랍장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다 다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엄마의 손과 다리를 주무르던 시우는 초록 안경을 벗고 얕은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엄마는 이불을 끌어 올려 시우의 목까지 덮어주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엄마는 우리 시우 꼭 지켜줄게. 아빠처럼 갑자기 떠나지 않을게. 약속해.”

한참 후 자리에서 일어난 엄마는 시우 얼굴처럼 거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남편이 처음 널 이 방에 걸어주었을 때만 해도 나도 젊고 예뻤는데.”

지금도 너무 예뻐요.”

거울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서랍장을 칸마다 열어 양말이며 속옷들도 다시 정리했다.

시우 배냇저고리, 남편이 선물해준 스카프 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알았지?”

엄마는 크게 숨을 뱉으며 서랍 마지막 칸을 닫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에게도 모두 소중한 것들인 걸요.”

초록 안경이 서랍장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닮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이, 엄마는 벽시계 할아버지를 올려보았다.

우리 집 터줏대감, 벽시계 할아버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집 잘 부탁해요.”

그러고는 초록 안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꼭 바다에 같이 가자.”

그날 밤, 엄마는 시우 얼굴을 바라보느라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엄마의 마음을 담은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병원 갈래.”

다음 날 시우는 아침 내내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학교 가야지. 이따 외할머니 오실 거니까 하룻밤 자고, 내일 학교 끝나면 엄마한테 와줘. 그때 활짝 웃는 얼굴로 맞아줄게. 엄마 믿지?”

시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집을 나서면서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기사는 항상 옆에서 공주님을 지켜줘야 하는데.”

그러나 학교에 간 시우는 더는 기사가 아닌 모양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몰려들어 시우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 짝짝이 눈 좀 봐.”

뭐야, 초록 눈에 초록 안경까지 쓰니깐 개구리 같아!”

초록 안경은 가슴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초록색이 뭐가 어때서!’

할 수만 있다면 짓궂은 녀석들을 혼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곧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초록 안경은 시우가 엄마 수술 걱정 때문에 힘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의사 선생님과 긴 이야기를 나누고 나온 외할머니의 얼굴이 어두웠다.

시우야, 엄마가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는구나.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단다.”

시우는 처음에는 할머니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엄마, 일어나 봐. 아직 낮이야. 벌써 자면 어떡해.”

엄마를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우도 초록 안경도 알게 되었다. 깊은 잠에 빠졌다는 건 아무리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으윽, 내 다리!”

오늘도 시우의 왼쪽 뺨에 왼쪽 다리가 깔린 초록 안경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 그러다 모두 깰라.”

밤에도 낮에도 깨어있는 벽시계 할아버지는 엄한 목소리로 초록 안경을 나무랐다.

어느 날부터인가 시우는 자꾸 초록 안경을 쓴 채로 잠이 들었다.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서 한참을 울다 잠들었다. 그러다 보니 다리가 볼에 깔릴 때마다 쭈욱 쭉 늘어났다. 눈물 자국을 제대로 닦지 않아 안경알은 얼룩투성이었다. 그럴수록 초록 안경도 점점 힘이 없어졌다.

문제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더 커졌다. 아이들은 시우를 더욱 심하게 놀려대기 시작했다. 다리가 늘어나 힘을 줄 수 없으니 초록 안경은 자꾸 시우 코끝으로 미끄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아이들은 시우 할아버지라고 놀려댔다. 매일 밤 울다 잠이 드니 눈이 퉁퉁 부어 개구리가 두꺼비가 되었다고 손가락질해대는 아이들도 많아졌다. 그래도 시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매일 당하기만 하는 거냐고!’

초록 안경은 날이 갈수록 시우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두꺼비 개구리. 넌 울 때도 개굴개굴 울지?”

가장 심술궂은 표정을 한 녀석이 시우의 뒤통수를 치며 빈정댔다.

고개 좀 들어! 그러다 안경 떨어지겠다. ?”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시우가 반응이 없자 녀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고개 들라고! 내 말 안 들려?”

그제야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 그러다 눈에서 초록 레이저 나오겠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니네 엄마 맨날 잠만 잔다며?”

그 순간이었다. 시우의 주먹이 녀석의 얼굴에 날아들었고, 녀석은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맞은 녀석도, 주위에 있던 아이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초록 안경은 오랜만에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 녀석이 반격하기 전에 한 대 더 날려봐! 다시는 할아버지고 두꺼비 개구리고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게 날려? 갑자기 왜 이렇게 어지럽지?’

다시 보니 어느새 바닥에 엎어져 있는 건 시우였다.

일어나, 시우야. 일어나서 진정한 기사의 용맹함을 보여주라고!’

초록 안경은 진심으로 시우를 응원했다. 그런데 시우는 반격은커녕 갑자기 으아아아아아!” 소리를 질렀다. 두 주먹으로는 땅을 쳐대기 시작했다.

뭐야? 미쳤냐?”

상대 녀석도 주위 아이들도 당황했다.

시우야.’

초록 안경도 갑작스러운 시우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잠시 후 녀석도 아이들도 하나둘 주위를 떠나기 시작했다. 시우도 점차 조용해졌다. 그런데 초록 안경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초록 안경은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건, 설마?’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것이 보였다.

설마 내 다리?”

분명 초록 안경의 다리였다. 녀석의 주먹에 맞으면서였는지, 시우가 바닥에 부딪히면서였는지, 어쨌든 초록 안경의 왼쪽 다리가 부러진 것만은 분명했다.

시우는 바닥에서 일어나 초록 안경과 부러진 왼쪽 다리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은색 쓰레기통이 햇살에 반짝이는 게 보였다. 초록 안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꼼지락대는 시우의 손가락만 계속 느껴질 뿐이었다. 초록 안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

뭐 하는 거지?’

시우는 초록 안경의 왼쪽 다리를 원래 있던 자리에 대고 감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안경을 썼다. 초록 안경은 습관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역시나 시우 코끝으로 미끄러졌다.

학교를 나선 시우는 거리에 세워진 자동차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마는 꼭 깨어날 거야.”

시우의 말에 초록 안경도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은 없었지만, 시우와 함께 엄마가 깨어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학교가 끝나고, 할머니와 함께 병원까지 오면서 초록 안경은 왼쪽 다리가 신경 쓰여 조마조마했다. 시우도 습관적으로 안경테를 손끝으로 올렸다. 그래도 다행히 한 번도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놈 꼬락서니 좀 봐라. 새 안경도 싫단다. 아들놈 이래 다니는 거 딱하지도 않니?”

한숨을 쉬며 엄마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할머니 옆에서, 시우는 엄마 얼굴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초록 안경도 마찬가지였다.

시우는 집에 오자마자 안경알을 말끔히 닦아 주었다. 밤에는 초록 안경을 책상 위에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천사가 따로 없지?”

벽시계 할아버지는 시우의 잠자는 모습을 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초록 안경에게 말을 걸었다.

자는 모습이 엄마와 똑같아요.”

초록 안경은 낮에 병원에서 보았던 시우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다 깜짝 놀랐다.

? 시우가 웃어요. 웃는데.”

웃는데 눈물이 흘렀다. 시우의 눈물이 뺨을 타고 베개를 적셨다.

엄마와 행복했던 날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

초록 안경은 시우가 엄마와 초록 바다를 보러 가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우의 꿈속에 내가 있을까요?”

그럴 것 같구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해줄 만큼 시우에게 넌 특별한 존재이니까.”

제가 시우의 특별한 존재라고요?’

초록 안경은 안경점에서 보았던 홍보 문구가 생각났다.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이고, 너는 조금 더 밝은 세상을 보여주는 안경이지. 하지만 알고 있니? 우리는 매 순간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을 하고 있단다.”

벽시계 할아버지의 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물건들은 사람들의 특별한 순간을 간직하고 있지. 시우 엄마가 수술 전에 우리를 쓰다듬고 바라보았던 거 기억나니? 그러면서 힘이 되어줄 좋았던 날들을 떠올렸을 거야.”

초록 안경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우는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겠구나.’

초록 안경을 만난 이후 시우는 행복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엄마가 긴 잠에 빠졌고, 매일 울었고, ‘할아버지개구리같은 별명까지 생겼다. 훗날 초록 안경을 보며 이런 날을 돌이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시우 꿈속에는 제가 없을 것 같아요.”

초록 안경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도 괜찮아. 시우와 엄마의 소원만 이룰 수 있다면.’

잠을 설치던 초록 안경은 자신의 소원을 되뇌다 어느새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이상하다. 어제 분명히 깨끗이 닦았는데.”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시우가 고개를 까딱이며 초록 안경에 묻은 얼룩을 내려 보고 있었다.

설마 밤새 울었니?”

시우가 초록 안경을 보며 물었다.

내가 울었다고?’

초록 안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벽시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눈을 천천히 껌뻑이며 말했다.

시우 꿈을 꾸었나 보구나.”

초록 안경이 밤새 무슨 꿈을 꾸었는지 되살리려는 사이, 시우는 초록 안경을 호호 불어가며 깨끗이 닦아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의 벨 소리가 집 전체에 울렸다. 따 다다 다다, 따 다다 다다.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시우도, 벽시계 할아버지도, 거울과 서랍장 그리고 초록 안경까지도 모두 숨을 죽이고 주방 쪽으로 온 신경을 기울였다.

, , . ? 정말이요?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의 기쁨과 물기가 함께 묻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시우는 얼른 초록 안경을 쓰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서는 초록빛 시우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초록 안경이 시우를 처음 만난 날 보았던 눈빛이었다.

초록 바다 보러 가야지!”

시우는 거울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런 시우의 모습을 바라보니 초록 안경의 마음은 벌써 초록 바다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출처 : 숲속동화마을
글쓴이 : 이글스유진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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