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책

[스크랩] 최영미 시 모음

열국의 어미 2018. 2. 7. 10:44
    ●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 최영미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 슬픈 까페의 노래 : 최영미 언젠가 한번 와본 듯하다 언젠가 한번 마신 듯하다 이 까페 이 자리 이 불빛 아래 가만있자 저 눈웃음치는 마담 살짝 보조개도 낯익구나 어느 놈하고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아프지 않고도 아픈 척 가렵지 않고도 가려운 척 밤 새워 날 세워 핥고 할퀴던 아직 피가 뜨겁던 때인가 있는 과거 없는 과거 들쑤시어 있는 놈 없는 년 모다 모아 도마 위에 씹고 또 씹었었지 호호탕탕 훌훌쩝쩝 마시고 두드리고 불러제꼈지 그러다 한두 번 눈빛이 엉켰겠지 어쩌면...... 부끄럽다 두렵다 이 까페 이 자리는 내 姦飮의 목격자 ●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다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내 마음의 지중해 : 최영미 갈매기 울음만 비듬처럼 흐드득 듣는 해안 바람도 없고 파도도 일지 않는다 상한 몸뚱이 끌어안고 물결만 아프게 부서지는 地中海, 내 마음의 호수 너를 향한 그리움에 갇혀 넘쳐도 흐르지 못하는 불구(不具)의 바다. 그 단단한 고요 찾아 나, 여기 섰다 내 피곤한 이마를 잠시 데웠다 떠나는 정오의 햇살처럼 자욱이 피어올라 한점 미련없이 사라지는 물안개처럼 흔적 없이 널 보낼 수 있을까 ● 불면의 일기 : 최영미 어떤 책도 읽히지 않았다 어떤 별도 쏟아지지 않았다 고독은 이 시처럼 줄을 맞춰 오지 않는다 내가 떠나지 못하는 이 도시 끝에서 끝으로 노래가 끊이지 않고 십년보다 긴 하루가 뒤돌아 제 그림자를 지워나갈때 지상에서 마지막 저녁을 마시려 버스를 탄다 밤은 멎었지만 밤보다 더 어두운 저녁에 차창가에 닻을 내린 한숨이 묻어둔,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아직도 낯선 과거를 불러낸다 서로 빠져나오려 싸우는 기억들이 서로를 삼키는 시간 왜? 지나간 것들은... 지나간 것들은... 용서하지 못하는가 잃어버린 삶의 지도를 찾아 그리는 눈동자 속에 흔들리며 떠 있는 나무 한 그루, 병든 잎들이 바람에 몸을 떨며 아우성친다 얼마나 더 흔들려야 무너질 수 있나 우리가 변화시킨 세상이, 세상이 변화시킨 우리를 비웃고 총천연색으로 시위하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멀리 하늘의 별을 비웃고 딸꾹질하듯 저녁에 어이없이 넘어가는데 지난 날의 들뜬 노래와 비명을 매장한 뒷골목을 순례하며 두리번거린다 조각난 상념들을 꿰맞추며 두리번거린다 아, 차라리, 온전히 미치기라도 했으면... 읽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웃어, 넘기라도 할 텐데 ● 꿈의 페달을 밟고 : 최영미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 행복론 :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최대한 몸을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 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에 하지도 말며 확실히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며 특히 시는 절대로 쓰지도 읽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지러진 물도 잘 추수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달팽이 : 최영미 그 찬란했던 시간의 알맹이들은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추억만 남았나 ● 내 편지는 지금 가고 있는 중 : 최영미 불륜은 아름답다고 불륜은 추하다고 카운터의 아가씨들은 저희끼리 돌아앉아 화장을 고치고 수다와 수다 사이 비가 내린다 노래는 흐른다 아, 시간아 멈춰다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에게로 가는 편지가 되돌아오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서교동 Cafe´Havana에서 오늘도 커피잔을 깨뜨리며 오후의 정사처럼 부스스한 추억을 꿰맞추는 밤 창밖에선 허술한 어깨들이 서로 젖지 않으려 어깨를 비비고 우산 하나로 세상의 비를 다 막겠다는 것인지 멀리서 비에 젖는 어느 영혼을 위하여 빌고 싶은 밤 취한 건, 추한 건, 불륜만이 아니었다. ● 사랑의 시차 : 최영미 내가 밤일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고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한 두 세상...... ●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최영미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 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최영미 시모음 1961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1997년 산문집 <시대의 우울> 1998년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출처 : 사랑이 머무는 아늑한방
    글쓴이 : 크레오 파트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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