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일 - 박 목월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도마뱀을 따라 꽃밭으로 가 보고,
잠자리처럼 연못에서 까불대고,
물 위에 뱅글뱅글
글씨를 쓰고,
그렇지, 진짜 시(詩)를 쓰지.
아침나절에는
이슬처럼 눈을 뜨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매미가 되어
숲으로 가지.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상 앞에 붙어 있을 줄 알아.
책에 씌인 것은
벽돌 같은 것.
차돌 같은 것.
그렇지, 살아서 반짝반짝 눈이 빛나는
그런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지.
내가 만일 너라면
조잘대는 냇물과 얘기를 하고,
풀잎배를 타고,
항구로 나가고,
무지개가 뿌리 박은
골짜기로 찾아가 보련만.
이제 나는
도리가 없다.
너무 자라버린 사람이기에.
어른은 어른은
참 따분하다.
그렇지, 내가 만일 어린 소년이라면
나는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