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책

[스크랩] 윤준경의 시를 읽다 / 이향아 -시 같은 연애와 연애 같은 시

열국의 어미 2018. 4. 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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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경의 시를 읽다-

시 같은 연애와 연애 같은 시

 

이 향 아 (시인, 호남대 명예교수)

 

윤준경 시인은 자신의 네 번째 시집을 펴내면서시와 연애의 무용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는 윤시인의 원고를 읽으면서 제목을 달리 하면 어떻겠느냐고 의향을 떠보았다. 다소 과격한 제목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바꿀 의향이 없는 것 같았다. 오죽 깊이 생각하고 결정했으랴, 그의 뜻이 확고한 것을 보니 나도그러면 됐다안심이 되었다.

시와 연애의 무용론이라는 시집의 제목이 심상치가 않다. 무용론을 거론하기까지 그는 연애에 몰두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과감하게 무용론을 들고 나올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감히 근접하기 어려운 경외심을 가지게 된다.

그 열정의 지극함과 치열성에 대하여, 그 궁극에서의 처절한 절망에 대하여, 그리고 단호한 선언에 이르기까지의 번민과 결심에 대하여 나는 지금 엄숙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싶다. 아마도 그는 시와 연애의 무용론을 선포한 이 시집으로부터, 시와 연애에서 등을 돌리든지 다시 부활하듯 새로운 힘을 얻든지 양단간에 결정이 나지 않을까 짐작하면서.

내가 윤준경 시인을 처음 대면한 것은 1900년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 김한순 시인이 이끌어가던 <문학의 즐거움>이라는 문학 사이트에서였다. 인터넷이 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 그 인터넷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다가왔을 텐데도 우리는 아무런 거부감이나 이질감을 모르고 거기 열중했었다.

피차 주변을 돌아다보고 따질 겨를도 없이 각자는 각자의 시를 등재하는 일에만 열중했는데 둘 다 속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인력(引力)을 느끼면서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음에 틀림 없다. 얼굴과 얼굴로 만나지 않고 오로지 시의 호흡과 시가 내뿜는 향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야말로 시 외의 잡것은 끼일 겨를이 없었다. 왜 있지 않은가, 글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문맥이라는 핏줄을 타고 마음을 이어가는 것.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후 서울 인사동 모 시낭송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사회자가 그날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소개하기가 무섭게 우리는 서로를 확인하였으며, 나는 그의 몇 마디 안내로 <공간시낭독회>에 가기로 결심까지 하였다. 윤시인은 <공간시낭독회>의 오래된 회원으로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공간시의 창립 멤버 중 한 분으로 몸이 불편하신 고 박희진 선생님을 성심껏 모시고 왕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러 번 감동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왜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윤준경 시인과 따로 만나서 오붓하게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었으니 속내를 터놓은 적은 더구나 없었다. 오랜 지기처럼 생각하며 믿은 것은 서로의 시를 읽었다는 이유뿐이었다. 문학으로 사람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게 한다.

 

윤준경 시인을 보고 있으면 에너지를 전달 받는 것 같다. 그만큼 그는 역동적이어서 빨리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는 일에도 빠르다. 그는 이 시간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을까? 나는 그에게서 완전 쉼표가 없는 진행형, 정지해 있을 때도 그것은 정지가 아니라 잠시 쉬고 있을 뿐이며 도약을 위한 숨고르기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는 올 여름 느닷없이 수십 편의 시를 전송해 왔다.

칭찬 일변도는 싫어요. 혹독하게 말씀해 주세요.”

나는 그가 원하는 내 진심을 다스리면서 끌리듯이 그의 시들을 읽어 내려갔다.

 

침묵은 꽤 오랜 시간

유리파편 위를 걸었다

폐허의 블랙홀로 빨려드는 탁류처럼

검고 냄새나는 침묵

 

침묵은 깨지지 않고

우리의 데이트는 싱거운 듯 끝났다

 

침묵은 금이라는데

침묵은 칼이고 오만이고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의 신호다

 

유리파편 위에 쓰러지는

쓸쓸한 분노

 

금이라는 말의

반대의 의미들을 수집하며

돌아서는 길

 

인생은 가끔 헛발질에도 넘어진다

허공을 짚고 일어서는 것도

인생에 대한 예의라서

휘청거리는 예의에

독한 모르핀을 주사한다

-<침묵의 칼> 전문

 

침묵은 꽤 오랜 시간/유리파편 위를 걸었다로 시작되는 시 <침묵의 칼>, 걷고 있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문맥상으로 볼 때 침묵걸었다로 이어지는 것이 틀림없어야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폐허의 블랙홀로 빨려드는 탁류처럼/검고 냄새나는 침묵에 이르는 과정이 안이한 이해의 흐름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는 터질 듯한 답답함을 견디면서 꽤 오랜 시간” “유리파편 위를걷듯 불안한 마음으로 침묵의 위를 걸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블랙홀로 빨려드는 탁류처럼 검고 냄새나는 침묵의 실체를 체득했을 것이라고 파악하고 싶은 것이다. 시가 어디 문맥으로 이해하는 것이던가, 문맥 이전의, 문맥 이후의 잠재된 정서와 정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던가. 침묵이 아니라 시의 화자인 내가 꽤 오랜 시간 유리파편같은 침묵의 위를 걸으면서 스스로 침묵의 일부가 된 것이다. 윤준경의 시에서는 스스로 일어서는 아픈 반전을 만난다.

침묵 위를 걸으면서 화자가 직감한 것은 답답하고 아슬아슬 위험하고 냄새나는 침묵이었다. 화자는 후각으로 냄새를 느끼지 않고 지각으로 알아채었다. “냄새가 난다함은 예감이며 조짐이다. 불길하고 불온하며 불쾌한 예감, “폐허의 블랙홀로 빨려드는 탁류같은 예감이었다.

누가 침묵을 금이라고 했는가. 침묵은 칼이고 오만이며 단절이 아니겠는가. 침묵은 거절이며 배신이며 도주가 아니겠는가. 화자는 침묵이 금이라는 종래의 말을 뒤집을 만한 그 반대 의미들을 수집하며 돌아섰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침묵이 깨지지 않은 채 싱겁게 끝난 데이트에 휘청거리면서 화자는, “인생은 가끔 헛발질에도 넘어진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허공을 짚고 일어서는 것도 인생에 대한 예의라며 자신의 존엄성을 추스른다.

그러나 그 예의가 느낄 통증에 대비하여 독한 진통제(모르핀)를 주사하는 화자의 돌올한 고독이 아프게 전달된다. 그는 침묵의 블랙홀에서 의연하게 일어서는 도도함과 분명함으로, 결단과 자존으로, 전혀 쓸쓸하지 않게 존재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후로도 조급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득하니 기다릴 것이다. 다음의 시 <2>가 말해주듯이.

 

1부가 끝나고

관객들이 우르르 출구로 몰려나간 뒤에도

나는 앉아 있었네

나와 몇몇 사람은 2부를 기다렸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하나 둘 또 출구로 갔네

 

나는 기다렸네,

기다림은 약간의 인내와 침묵과 교양을 요하는 것

뜨거운 차를 후루룩 마시지 않고

살짝 입술로 핥아 음미하듯

기다린 보람처럼

당연히 2부가 열릴 것이네, 분명히

2부는 있을 것이네

(그건 연극의 뻔한 기획이니까)

여유 있게, 조급하지 않은 듯

미소를 머금고

 

기다린 2부는,

없었네

어이없다는 듯 사람들, 그러나 잘못 된 상식을 감추려는 듯

꼿꼿이 버틴 자존심으로

출구를 찾았네

 

나의 새로 산 코트는 구겨져서 펴지지 않았네

믿었던 2부는 나타나지 않고

설명도 없이 막이 내렸네

‘2부는.....?’

‘2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네

-<2> 전문

 

관객 중에는 1부만으로도 별 유감없이 출구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부가 끝난 다음에 2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다. “기다림에는 약간의 인내와 침묵과 교양을 요하는 것이므로 화자는 점잖게 기다리면서 계속될 다음 장을 믿었다. 그 기다림의 보람이 응당 2부를 데리고 나타날 것이라고, 싱겁게 끝난 1부를 보상하듯이 2부는 당연히 있어야 하며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조급하지 않은 듯 여유 있게 미소까지 머금고 기다렸던 결과는 상식 밖으로 마무리 되었다.

새로 산 코트는 구겨져서 펴지지 않고, 막은 아무 해설도 설명도 없이 내려지더니 다시 올라가지 않고, “2부는? 2부는?” 물었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허망함, 아니 절망감. 화자는 지금까지 버틴 자존심으로 꼿꼿하게 출구를 찾는다.

2부가 있으리라는 것은 선명하고 확실한 상식이다.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지라도 아무리 아프고 답답할지라도 우리가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2부가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여러 번 얼마나 무자비하게 현실은 우리를 배신했던가?

날마다 맞닥뜨리는 일들은 흐름을 멈춘 듯이 역류하고, 애인은 변심하여 떠나버렸을 때, 최선을 다하여 1부를 견딘 우리의 선한 주인공이 낙담과 절망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덕이고 있을 때, 우리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2부가 있어요.” 그러나 한 번 내린 막은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슬픈 소설도 다음호에 계속이라는 말로 우리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였거늘, 2부가 없는 인생이 제대로 된 인생인가? 화자는 무너지지 않고 점잖게 일어서서 출구를 찾았지만 그의 가슴의 노여움은 격랑처럼 솟구친다.

시인 윤준경에게는 쌓여있는 말이 밀물 같고 폭풍 같아서, 숨을 고르고 리듬을 정리할 겨를이 없다. 그는 많은 말을 거느린 군사처럼 출동한다. 이번의 시집에 수록된 64편의 시들은 몇 편을 제외하고는 20행을 훨씬 넘거나 그에 육박하는 시들이고, 정서의 미적 과정을 탐하여 실감에서 유리시키거나 실감을 장식하고 보수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오히려 거칠고 돌연한 어조로 처음 선택했던 길로 직진한다. 시에서는 천연의 모습 그대로를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러움과 진실성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인위적인 수식이나 오랜 시간의 작위적 수식은 본질을 왜곡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우선 그에게는 의도적인 포장으로 품격을 높이려고 한다거나 위세를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음과 같은 시 역시 그렇다.

 

나는 나를 늘 싸게 팔았다

아예 마이너스로 치부해 버렸다

내세울 게 없는 집안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에 육십년이나 절었다

그래서 나의 액면가는 낮을 수밖에 없고

때로 누가 나에게 제 값을 쳐주면

정색을 하며 다시 깎아내리곤 했다

자신의 액면가를 곧잘 높여 부르는 이들도 있는데

겉으로는 끄덕끄덕하면서도

속으로는 씁쓸하다

그들의 액면가는

부르는 만큼 상종가를 치기도 하는데

나는 늘 나의 값을 바닥에서 치르며

흘끔흘끔 앞뒤를 곁눈질 한다

깎이고 깎인 액면가가 내가 되었다

이제라도 제값을 받아보자고

큰소리 한번 치고 싶은데

유통기한이 끝나간다

무릎이 저리다 

-<액면가> 전문

 

마이너스로 깎고 깎아서 자화상을 내보이는 모습이 너무나도 떳떳하다. 전혀 구차하지 않게 정직을 넘어서서 위악에 가까운 자기폭로가 역으로 그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화자는 유통기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무릎이 저리다는 말로 간단히 맺었다. 유통기간도 끝나 가는데 이제 새삼스럽게 액면가를 높일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어머니는 왜, “내세울 게 없는 집안이라고 했을까, 어머니는 왜 화자의 귀에 그 말이 육십 년이나 절도록 마치 당연한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믿게 하였을까. 그것을 시에서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화자 역시 구태여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당신의 액면가를 제대로 산정해 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아버님 곁에는 안 가시겠다는/시퍼런 한을/어머닌 너무 부드럽게 말씀하셨어요//어머니 그래도 아버지 곁이 나아요/아버지도 이젠 죽은 목숨이잖아요”(<어머니의 한>)에서 짐작이 가능해진다.

윤준경 시인은 굳이 시적인 압축을 시도하지 않았다. 특히 고백적인 시에서는 산문적 구어로 풀어냄으로써 보다 진실성에 근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시인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타고난 원래의 호흡대로 이끌어 가다가, “이제라도 제값을 받아보자고/큰소리 한번 치고 싶은데/유통기한이 끝나간다/무릎이 저리다로 종결한다.

마지막 구절 “무릎이 저리다는 다시 나는 나를 늘 싸게 팔았다/아예 마이너스로 치부해 버렸다라는 시의 첫 구절과 환상(環狀)을 이루면서 순환할 것이다. 마치 궤도를 도는 듯한 이 시는 속도가 빠르지 않고 천천한 그만큼 독자를 끌어들이는 폭이 넓어질 것이다.

시에서건 산문에서건 자칫하면 겸손을 앞세우려다가 오히려 자신을 부풀리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시인 윤준경은 처음부터 자신을 철저히 해체하고 폭로한다. 미화하거나 과장하거나 변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점이 독자들에게 시인을 신뢰하게 하는 힘을 주는 하는 것 같다.

 

내 힘으로 걷지 않았다

 

인생을 위해 내가

설사 수고한 것이 있다 해도 헛수고였을 뿐,

나 인생에게 술 한 잔 사 준 적 없이*

인생은 나를 견뎌주었다

 

섣달 초열흘, 어머니 나를 윗목으로 밀어내셨지만

살려달라고 우는 나에게

이내 젖을 물리셨다

 

작은오빠는 피난길에 나를 버리라고 애원했지만

용케도 나는 버려지지 않았다

 

한 남자의 등에 나를 업히시던 날

어머니 속으로 우셨다

 

삶은 언제나 미지수였다

내 힘으로 걸을 새 없이

시간이 나를 업고 달렸다

내일에 대해서는 말해준 적 없이

내 인생을 밀고 당겼다

*정호승 시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에서 차용

-<시간의 등> 전문

 

위의 시에는 응당 있어야 할 것 같은 부모나 형제에 대한 원망이 배제되어 있다.

화자는 자신이 태어나면서 버려질 뻔했던 목숨이었음을 토로한다. “어머니 나를 윗목으로 밀어내셨지만/살려달라고 우는 나에게/이내 젖을 물리셨다고 어머니를 옹호한다.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윗목으로 밀어내셨지만”, (나를 향한 절절한 모성애로)-“이내 젖을 물리셨다고 하여, 젖을 물리신 어머니에 대한 화자의 고마움이 윗목으로 밀어내셨던 야박함을 열 번 압도하고도 남게 하였다.

, “작은오빠는 피난길에 나를 버리라고 애원했지만/용케도 나는 버려지지 않았다라고, “작은오빠를 직접 거명함으로써 작은오빠에 대한 섭섭함이나 원망의 잔사(殘渣)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 보인다. 이러한 말들은 물론 화자가 직접 들은 말이 아닐 것이고, 자라면서 어른들을 통하여 전해 들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딸에게, 작은오빠가 누이동생에게 지난 시절의 아픈 추억담으로 털어놨을 것이다.

한 남자의 등에 나를 업히시던 날/어머니 속으로 우셨다, 화자는 속으로 우는 어머니의 눈물을 감지했다. 드러내지 않고 혼자 우는 어머니의 눈물을 알고 있는 딸은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을 것이다.

내 힘으로 걷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감사하게 여기는가를 알게 한다. 자신은 스스로의 인생을 위해서 수고한 바가 없다고 설사 수고한 것이 있다 해도그것은 헛수고였을 것이라고, 내 인생이 나를 참아주고 견뎌주고 도와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고 사람의 힘도 아니었다고, 알 수 없는 절대의 힘이 나를 업고 달려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시인. 그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음은 물론, 절대자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이 시의 요체이며 이 시인이 지니고 있는 덕성일 것이다.

그러나 윤준경이 겪은 삶은 윤준경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역사의 공통적인 수난이었고 고통이었다. 현재도 모르는데 내일을 알 수 있으랴, 미지수인 채 시간의 등에 업혀 우리 모두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만일 시인만의 일이라면 넋두리가 되었을 것이지만 우리 모두의 공통의 인자를 시인이 대변하여 시로 완성되게 한 것이다.

 

벽난로가 있는 저녁이었네

내가 한때 꿈꾸던 벽난로였네

 

너른 창문에는

여인의 스카프가 커튼처럼 걸려 있고

벽난로는 태우지 못한 가시나무 다발을 물고

차갑게 식어 있었네

 

시를 읊는 저녁이었네

시를 모르는 당신도

뜨거운 청춘은 저만치 가고

뒤늦게 시가 찾아왔을까

 

활활 불꽃을 태우는 벽난로 앞을 서성이며

녹색스카프에 목매던 한때를 기억할까

녹색스카프의 여인 앞에서

다시 벽난로를 꿈꾸게 할까

 

시는 안개 속에서

러시아풍의 눈보라를 일으키는데

차갑게 식은 벽난로,

억센 가시나무를 입 안 가득 물고만 있네

 

불타지 않는 저녁이었네

-<벽난로가 있는 풍경> 전문-

 

툇마루와 온돌방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벽난로가 있는 풍경은 이국적(Exotic)인 생활을 꿈꾸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막연히 동경하던 평화와 풍요의 그림이었다. 이 시의 화자 역시 벽난로가 있는 저녁이었네/내가 한때 꿈꾸던 벽난로였네라고 우리의 기대를 대변하면서 시를 시작한다. 특히 저녁은 흩어졌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벽난로의 불꽃이 가족애를 상징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리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그러나 차갑게 식어 있는 벽난로”, “뜨거운 청춘은 저만치 가고”, “시를 모르는 당신”, “벽난로 안의 태우지 못한 가시나무 다발들등 일연의 부정적인 어휘의 묶음들이 꿈꾸던 벽난로”, “여인의 스카프”, “시를 읽는 저녁등 밝은 이미지의 어휘들과 충돌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충돌은 연소하지 못한 욕망을 대변하는 듯 분규를 일으키고 있다.

<벽난로가 있는 풍경>이라는 한 편의 시는 벽난로가 암시하는 화려한 불꽃의 온기, 그것을 중심으로 모여 앉은 사람들의 사랑과는 거리를 둔 풍경이라는 점에서 독자의 기대를 반전시키고 있다. 이것이 <벽난로가 있는 풍경>의 중요한 의미인 동시에 특성이다. 아무런 장애가 없이 불타오르는 벽난로였다면 평범하고 단순한 풍경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벽난로는 태우지 못한 가시나무 다발을 물고/차갑게 식어 있었네”, “시는 안개 속에서/러시아풍의 눈보라를 일으키는데/차갑게 식은 벽난로,/억센 가시나무를 입 안 가득 물고만 있네에서 이 시의 특성은 극대화된다. “불타지 않은 저녁을 토로하는 화자의 음성은 수분이 증발되어 버린 듯 다급하게 들리기도 하고 어느 벽에 부딪힌 듯 암담하게 들리기도 한다.

벽난로라고 하는 아름다운 사물이 라고 하는 아름다운 추상과 연합하지만 그들은 동질의 흐름을 거부하고 부정한다. 그것은 시인이 말한 대로 억센 가시나무를 입 안 가득 물고만 있는 차갑게 식은 벽난로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끝끝내 불타지 않은 저녁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벽난로는 아름다운 불꽃을 일으키면서 타올라야 하고, 시는 안개 속에서 러시아풍의 눈보라를 일으키면서도 훈훈한 실내의 온기에 눈물처럼 녹아야 한다.

벽난로가 있는 풍경은 다만 풍경으로 끝남으로써, 기대하던 시선에 공허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시가 독자에게 주는 것은 충만감이나 성취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허망에 가까운 미흡감과 상실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추구하던 꿈, 바라던 세계를 잃어버린 쓸쓸함, 그 소멸의 정서로 독자의 공감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여름, 나는 시와 연애에 열중했다 시에 더 열중하고 싶었지만 시는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워서 집중할 수 없었다 연애는 달콤하고 황홀해서 밤낮으로 집중할 수 있었지만 지

나간 뒤에 공허가 오래 남았다

 

밤새워 쓴 시는 아침이면 한 줄도 남지 않고 시들어버렸다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거워서

나를 거부한 시, 나의 시는 나의 연애만큼 절실하지 못했다

 

나는 연애 같은 시를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고 시 같은 연애를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

했다 혁명적이라고 믿었던 문장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지고한 사랑은 불륜의 패러디

로 치부되었다

 

시와 연애 사이에서 인생의 여러 페이지를 남용하고 내 감각感覺의 사인死因을 추적하는

것으로 남은 생을 남발하고 있다

-<시와 연애의 무용론> 전문

 

위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쓸데없는 것(혹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무용론은 아무나 가볍게 강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장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려면 타당한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타당한 근거란, 그 분야에서의 오랜 탐구자, 애용자로서의 이력과 체험이다. 주장하는 사람은 그 사물의 품질과 용도, 효용과 영향과 한계에 대해서 이미 선수가 되고 박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용론을 천명하기까지 그가 겪은 실망과 슬픔은 이미 그 정신을 지배하는 신념이 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화자가 "그 여름, 나는 시와 연애에 열중했다"라고 한 시의 첫구절은 비장한 고백처럼 들린다. 어찌 그 여름뿐이었으랴. 그 여름 이전의 그 봄과, 그 봄 이전의 지난겨울과 그에 이어진 많은 세월을 화자는 시와 연애에 열중했을지도 모른다는, 아니 분명히 열중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상상까지 동원하게 한다.

위에 예시한 시구와 연관을 짓지 않더라도 윤준경 시인의 많은 작품들이 시와 연애에 열중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사랑'을 중히 여기면서 사랑에 탐닉하는 시인을 나는 아름답게 여긴다. 그리고 시인은 모름지기 사랑의 찬양자이며 사랑의 창조자인 동시에 실천자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윤준경 시인이 왜 사랑의 무용함을 선언하게 되었을까. 그것이 역설일지라도 쓸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는, "사랑이 밥은 먹여줬을지 몰라도/밥보다 더 많은 것을/토하게 했네"(<객관적사랑>)라고 사랑의 무심과 비정을 지적하기도 했고,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으면서도 사랑을 갈구했음을 설파하기도 하였다. 윤준경은 시를 생명처럼 사랑하면서 시와 사랑의 삶을 병행시키려고 한다. “꽃이 피다니/그렇게 오래 기다린 꽃이,/어느새 피다니/피기도 전에/지고말다니//슬프다 사랑이여, 그리도 순한 것이었구나”(<꽃이 피다니>)라고 꽃이 피는 슬픔과 꽃이 지는 슬픔이 다르지 않음을 표명하였다. 안간힘하거나 거부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피고 지는 꽃, 자연스럽게 유로되는 우주의 현상 앞에서 슬프다 사랑이여, 그리도 순한 것이었구나탄식하기도 하는 시인. 윤준경은 시적 대상이 생명을 가진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수많은 사랑이 산재해 있다.

 

기꺼이 네 화살을 받으리라/삼수갑산 지옥 불에 나비가 되어/

훨훨 춤추며 재가 되리라”(<진도 홍주>),

 

입 밖으로 내민 조개의 혀가/나를 유혹해서 나는/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최초의 키스는 이렇게 유래 되었을 것이다”(<유혹의 끝>),

 

상처 하나 없이 모로 누운 채 거품을 문 의자/한마디 사랑의 멘트만으로도

살아날 듯한데/누가? ?냐고 질문을 던지지만/말이 없다……의자를 끔찍이

사랑했던 남자/잠시도 떨어지지 않던 남자/거기서 밥을 먹고 거기서 책을 읽고

거기서 사랑을 하고/거기서 잠을 자고 거기서 깨어나면서……사랑은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벚꽃 잎 장송곡처럼 흩날려/사람의 죄를 덮고 있다

<어떤 사랑의 전말>)

 

축령산, 숲내음숲길을 오르며/아름드리나무의 우듬지를 우러러 사랑인 듯 안아

본다“(<편백 숲의 눈물>)

 

한입에 꿀꺽, 통증을 삼키는 버릇이 생겼다/못 들은 척, 못 본 척/아픔이 가까

이 오지 못하도록/사랑조차 조심조심 두드려본다”(<무통주사>)

 

몸을 섞으면/한 몸이 되었다/미움도 사랑과 섞여 /나눌 수 없었다”(<두물머리에

>)

 

사랑의 말은 먼저 하게 하시고/미움의 말은 끝내 입에 담지 말게 하시며/넘치

되 겸손하게 하시고/모자라되 비굴하지 않게 하소서”(<주여, 새해에는>)

 

시인은 진도 홍주를 마실 때에도 조갯살을 먹을 때에도 사랑하는 대상에게 하듯이 한다. 물가에 버려진 의자를 보거나 숲길을 걸으면서, 무통주사를 맞으면서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사랑이 내왕할 수 있는 길을 닦아놓고 무한한 사랑을 분배한다. 그리고 받아들인다.

시에 더 열중하고 싶었지만”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워서 집중할 수 없었연애는 달콤하고 황홀해서 밤낮으로 집중할 수 있었지만 지나간 뒤에 공허가 오래 남았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절실하면서도 슬프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밤새워 써도 날 밝으면 시들어버리는 시, 나를 거부한 시, 연애만큼 절실하지 못한 시에 실망하는 시인이 어디 윤준경뿐이겠는가. “연애 같은 시를 쓰고 싶었시 같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는 시인의 말에 공감한다. “혁명적이라고 믿었던 문장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때의 절망, “지고한 사랑은 불륜의 패러디로 치부되어 내몰리는 세상, 그것을 개탄하는 시인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시와 연애로 인생을 헛되이 낭비했다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분명 당신의 시는 연애를 생활의 진흙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부축해줄 것이다. 당신의 연애는 시의 윤기를 소생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감각은 시와 연애가 있는 한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 시와 연애의 무용론은 그런 의미에서 부적절하다.

아직은 만개한 꽃처럼 남아 있는 날들, 시인이여! 부디 시와 같은 연애에 돌입하기를, 연애 같은 시를 쓸 수 있기를

윤준경의 시를 깊이 읽으면서 거기 깊이 빠졌던 여러 날의 낮과 밤들, 나는 모처럼 그 맑고도 깊은 사랑의 슬픔에 잠길 수 있었다. 행복한 여름이었다.


출처 : (사) 한국문인협회 도봉지부 (도봉문협)
글쓴이 : jun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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