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방

[스크랩] (말아톤) 하나님이 나를 미치게 하신다-여름수련회

열국의 어미 2008. 11. 21. 15:27

제목 : 하나님이 나를 미치게 하신다

 

♣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5장 3절~7절.

♣ 주제 찬양 : 나로부터 시작되리, 아버지 당신이 있는 곳에, 내 너를 위하여(186장).

 

S.1 오래 오래 같이 살아 (CD 1 / 2:23~6:58)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가끔 혼자 있을 때 이렇게 물어 봅니다. ‘과연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도 던져봅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쉽게 떠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시편 기자의 편에 서 계신다고 고백하며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래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내가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장경동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는 정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몸 찢고 피 흘리심으로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영화 속 주인공 초연이는 20살 청년입니다. 자폐증에 걸려 비록 정신 연령은 5살 수준이지만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을 보면 20살 청년과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창 혈기 있고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부풀어 올라야 할 나이에 자폐증에 걸려 가족들을 아픔으로 몰아가는 모습 속에서 측은함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초원이 엄마가 초원이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몸매는 끝내줘요!”라고 늘 세뇌시키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는 이 모습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러실 것입니다. “누구 누구 영혼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영혼, 몸매는 끝내줘요~”, “누구누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S.2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CD 1 / 9:10~13:08)

 

초원이 어머니에게 있어서 초원이는 최고의 즐거움이었고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초원이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다 말고 나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춤추는 모습을 사람들은 미친 사람 쳐다보듯이 바라보지만 어머니는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어유 신났어요”라고 말해주며 행복해합니다. “왜 힘든 마라톤을 시키려 하나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매우 태연하게 “판검사는 하기 싫다네요”라고 대답하는 어머니는 분명 미쳤습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왜요? 초원이를 너무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초원이의 달리는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엄만 아이의 표정을 보면 기분을 알 수 있거든요 달릴 때만큼은 표정이 달라요 그건 마치… 하여튼 굉장히 멋있어요.” 마치 어머니도 자폐증 환자마냥 비정상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3자가 볼 때 그렇지 당사자들은 전혀 비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왜냐? 너무 사랑하면 미친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S.3 굉장히 멋있어요(CD 1 / 16:31~19:58)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 관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볼 수 있습니까? 명석한 두뇌를 가져서 공부를 1등하는 것도 아니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탈렌트 처럼 좋은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초원이 어머니는 다른 자식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기준으로 초원이를 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초원이 어머니는 초원이를 존재 그 자체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3)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정말 최고의 작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작품으로 보지 아니하고 상품으로 봅니다. 사람을 외모와 능력으로 평가합니다.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상품과 작품은 근본적으로 바라보는 기준이 다릅니다. 상품은 비교해서 가치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작품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그래서 상품은 교환가치가 있지만 작품은 존재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있는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떻습니까?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작품으로 대합니까? 상품으로 대하지 않습니까? 조건을 걸고 사귀고 조건을 걸고 이용하고 조건을 판단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조건을 가지고 교제하지 않습니까?

현대 사회의 문제점

 

현대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을 상품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외모주의(Lookism)’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외모 콤플렉스’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뜯어고치는 성형외과는 잘 되고 뜯어 부치는 정형외과는 잘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가 너무 비열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정글에 온 것 같고 우리는 모두다 약육강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동물들 같습니다. 인간미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품가치가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점점 우리 사회에 외모주의가 보편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사회는 너무 외모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10대 아이들은 연예인들을 너무 좋아합니다. ‘오빠~’ 그러면서 옷에 오줌 쌀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런데 연예인들 쫓아가다보면 인생 망치게 됩니다. 남는 게 없습니다. 소비자 밖에 더 됩니까. 너무 좋아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연예인 중에서도 지성을 갖춘 연예인, 인간미가 있는 연예인,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연예인, 신앙의 덕이 있는 연예인이 있다면 도전이 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연예인은 거의 없습니다. 얼굴만 반지르르하게 생겼지 머리는 텅텅 비어있는 경우가 거의 다입니다. 연예인이 우상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연예인들을 쫓아가냐는 말입니다. 이유가 뭐지요? “자기가 작품인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기가 상품인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얼굴이 더 예쁘다는 이유로, 더 잘생겼다는 이유로, 더 인기있다는 이유로, 그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쫓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상처럼 생각하고 흠모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들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은 상품이 아닙니다. 작품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모든 사람들을 작품으로 바라보게” 하는 곳입니다. 오히려 집에서 느끼지 못하는 포근함, 따뜻함, 평온함, 세워줌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교회는 지상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 속 초원이 엄마는 자폐증에 걸린 자기 아들, 정신 수준이 5살 밖에 안 되는 아들을 정상적인 아들처럼 품고 돌보아줍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 자기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 짜리! 몸매는 끝내줘요!”

 

하나님은 우리를 작품으로 보신다

 

놀라운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작품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3).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이요 최고의 작품입니다. 모두 다 예외 없이 존귀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공동번역 / 엡 2:10).

 

그런데 하물며 피조물이 피조물을 무시하고 왕따 시키고 저울질해서 점수를 매겨서 되겠습니까. 사람을 마치 도마 위에 생선처럼 칼질을 해서 되겠습니까. 이런 망할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비극이지요.

 

학생들이 학교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성적과 등수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평가받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 달란트, 자기 비전, 자기 성격에 맞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찾아주고 작품인생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 우리 사회는 획일화된 제도권 안에 갇혀서 입시 위주의 공부에 치우쳐 있습니다. 마치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공부인간’을 찍어내는 것입니다. 학교와 학원이 상품 만드는 공장이 돼버렸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고등학교 때까지는 잘 팔리다가 대학교 이후부터는 잘 안 팔리는 것입니다. 왜냐? 공부가 미치도록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작품으로 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집착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끝까지 붙듭니다. 여러분, 고래 힘줄 보다 더 강한 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 찾기 비유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라는 표현입니다. 나머지 한 마리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리 양에게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흔 아홉 마리를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미치도록 사랑하십니다. 한 마리가 얼마나 귀중하기에 그렇게 행동했겠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미친 사랑은 우리를 위해서 죽는 것까지 계획하시고 실행하게 하신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치 초원이 어머니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죽는 거에요”라고 대답한 것처럼, 하나님의 소원은 외아들 독생자를 죽기까지 내버려두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초원이의 엄마처럼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S.4 하루 먼저 죽는 거에요 (CD 1 / 20:37~23:18)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눅는 거에요” 초원이 엄마의 이 사랑이 바로 우리 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가슴 찡한 사랑입니까? 초원이를 향한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이 마침내 초원이를 미치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우리를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도 주님을 위해 미친 듯이 살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 차리고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미쳐서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미치십니다. 미치도록 사랑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일에 열심이면 하나님은 우리 일에 열심이다!”

 

저희 부모님이 교회를 안 다닐 적에 제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하도 믿음이 극성스러웠는지 저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너무 미친 듯이 믿으면 안 돼!” 적당히 믿어야지…” 그렇게 말씀하셔서 더 미친 듯이 교회 다녔습니다. 매일 새벽재단을 쌓았고 저녁에는 친구랑 오토바이를 타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거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낮에는 학교에서 점심시간 때 전도했습니다. 학교 음악실을 빌려 미션 스쿨을 열었습니다. 정말 그 때는 열심이 특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으면 미친 듯이 살아가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면 다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미쳐보세요. 미치도록 사랑해 보세요. 자신이 변화된 것을 자신이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미치지 못해요? 왜 미친 듯이 힘써 일하지 못하고 공부하지 못해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들은 주님의 사랑에 미칠 때입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가들은 모두 다 자기 분야 미친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미쳐야 미칠 수 있습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철칙입니다. 공부에 미쳐야 공부를 잘 할 수 있고, 노래에 미쳐야 노래를 잘 할 수 있고, 연기에 미쳐야 훌륭한 연기자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에 미쳐야 탁월한 설교자가 되는 것이고, 사업에 미쳐야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미쳐야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도 미치십시오. 그러면 주님도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시고 은혜의 날개 아래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초원이 엄마가 초원이를 미치도록 사랑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프리카의 사자는 아침부터 신선한 사냥감을 찾아 나섭니다. 들소 떼는 대평원을 누비며 역시 신선한 풀을 찾아다닙니다. 사자와 들소 떼가 만나면 사자는 사냥감을 위해, 들소 떼는 사냥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질주합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미친 듯이 달립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마귀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달려야 되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도 달려야 합니다. 자전거가 멈추면 넘어지듯이 우리들 역시 쉬면 안 됩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달려야 합니다. 미친 듯이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S.5 나를 위로하는 도구로 (CD 2 / 24:00~30:59)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실 영화 속에서 초원이를 달리게 한 것은 어머님의 욕심입니다. 그래서 초원이 엄마가 그것을 인정하고 나서 나중에 아이에게 달리는 것을 더 이상 요청하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라는 말을 반복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 동안 강요했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마라톤을 시키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분명 초원이가 어머니의 욕심에 이끌려 그 동안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초원이가 어렸을 때 동물원에서 속상했던 어머니가 초원이를 버릴 마음을 품은 채 손을 놓았던 것을 초원이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잃지 않기 위해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초코파이를 주면,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겠다고 하면 으레 조건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여하튼 처음에 초원이는 초코파이 때문에, 짜장면과 탕수육 때문에, 어머니를 놓치기 싫어서 어머니 말씀을 따랐습니다. 물론 나중에 초원이의 엄마가 이것을 깨닫고 난 이후 더 이상 마라톤을 시킬 수 없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초원이 역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를 향한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초원이는 어머니를 위해서 살고 싶어진 것입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말처럼 열심히 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으로 초원이에게 마라톤을 만류하는 어머니를 향하여 도리어 자기가 달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어머니 앞에서 자기 스스로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 짜리”라고 말을 꺼냅니다. 세뇌되었던 말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당당히 표현한 말입니다. 어머니가 초원이에게 미친 것처럼 초원이 역시 어머니에게 미친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한 초원이는 더 이상 짜장면이나 탕수육 때문에 달리지 않습니다. 더 이상 초코파이 때문에 달리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달립니다. 그래서 초원이가 마라톤 도중 쓰러졌을 때 한 사람이 건네 준 초코파이, 그것이 그를 달리게 하는 동기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내던지고 달립니다. “사랑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드디어 초원이는 미쳐서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S.6 미친 듯이 달리는 초원이 (CD 2 / 48:20~54:59)

우리도 초원이처럼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남이 뭐라고 하던 어머니만 인정해주면 행복해하던 초원이처럼, 남이 뭐라고 하던 하나님만 나를 인정해주면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처음에 3년 동안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부터는 왜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나요? 왜 재미없게 느껴지나요? “하나님께 계속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세상 문화에 미쳐 있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계산하고 조건적으로 믿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3-15).

 

주님은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당신의 사랑에 미치지를 못합니다. 이제는 미쳐야 합니다. 주님께 보답해야 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찬송가 186장).

 

안디옥교회에서 들었던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탈레반 정권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란과 이슬람 교리에 미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코란의 가르침에 위배되면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슬람 종교는 굉장히 극단적인 종교입니다. 그래서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 칼 모양이 그려져 있잖아요. 무력을 통해서 포교할 수 있는 종교가 이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한국이 기독교 역사 100년 만에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기독교가 급성장한 이유도 동일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미친 자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80년대 이후로 미친 성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너무 정상적이고, 너무 합리적이고, 너무 계산적이고, 너무 정신 차리고 믿으려는 사람들만 무성합니다. 이것이 능력을 상실한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한 미친 성도란 가정과 직장을 내팽개치고 신비주의자로 살아가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신 주님의 그 은총에 미치는 믿음, 보답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쌍방통행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해 지금도 애통해 하십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이왕 믿을 거 확실히 믿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미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미치도록 달려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영화 속에 등장하던 말과 초원이가 미친 듯이 달리던 것처럼 우리도 미친 듯이 달려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땅에 진정한 부흥과 회복이 바로 나로부터, 우리로부터 시작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은 마라톤

 

여러분, 징기스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한 이유가 무엇인지 압니까? 기동력에 있었습니다. 그는 적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무찌르는 지름길은 ‘기동성’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손이 많이 가는 가축대신 말의 효용성에 주목했습니다. 말의 가축화에 성공한 그들은 보병과 보급선을 두지 않는 간편한 기병체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투식량인 육포(보르츠)를 개발하여 군수품의 무게를 경량화했습니다. 소 한 마리 분의 고기를 말린 보르츠는 소의 방광에 넣어 운반하는데 병사 한명의 1년 식량으로 충분했다고 합니다. 이 시스템은 놀라운 행군속도와 신속한 전투체계를 창출하여 최단 시일에 세계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장거리 경주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뛰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인생에 꿈과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뛰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도 뛰어야 합니다. 내 직업, 내 달란트, 내 끼를 통해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뛰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들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달리기 하는 데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얻습니다. 버려야 이깁니다. 버려야 빨리 갑니다.

 

솔직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했기 때문에 못 뜁니다. 너무 배가 불러서 못 뜁니다. 너무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 뛰는 것입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아니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뛸 때만큼은 최대한 가볍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원하는 목표에 미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미친 듯이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스위치를 꺼야” 합니다. 평소에는 세상을 등지고 살 수 없으므로 세상을 향한 스위치를 켜고 살아야 하지만, 수련회에 있는 만큼은, 공부하는 만큼은 세상을 향한 스위치를 끄십시오! 그게 살 길입니다. 그러면 원하는 목표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인생 마라톤을 완주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
글쓴이 : DMpasto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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