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방

[스크랩] (쉰들러리스트)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환: 정준호 전도사

열국의 어미 2008. 11. 21. 15:27

제목: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환(영화설교3-쉰들러리스트)

본문: [행 9:1-행 9:9]

(1)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 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3)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서론

1. 동영상 1(쉰들러의 비인간성, CD1 10:58-14:53)

2. 영화소개


본론

1. 동영상 2(재산을 팔아 쉰들러 리스트 작성, CD2 36:26-42:18)

2.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환

3. 동영상 3(컬러 소녀등장, CD1 1:08:21-1:10:30)

4. 사도바울의 전환(어거스틴, 루터, 웨슬리)


결론

1. 동영상 4(CD2 1:15:29-1:17:57

2. 전환 이후의 열매와 실천













서론

1. 동영상 1(쉰들러의 비인간성)

2. 영화소개


오늘은 3번째 영화설교 시간입니다. 오늘 본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리스트’입니다. 쉰들러리스트는 2차대전 당시 폴란드에서 나찌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있을 때 폴란드에서 군수업품 공장을 운영하며 1200명의 유대인을 살린 실존인물 오스카쉰들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스필버그 감독은 자신이 영화감독이 된 이유가 바로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 기사를 처음 제가 접했을 때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솔직히 스필버그가 영화 광고를 위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통해 스필버그는 엄청난 흥행을 했고, 처음으로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감독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위해서 10년을 준비했다는 점과 이 영화를 위해 자신이 준비중이던 ‘케이프피어’ 작품을 포기하고, 엄청난 블랙버스터 ‘쥬라기 공원’에 대한 주도권을 포기했을때, 그리고 영화를 완성한 후 한푼의 연출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스필버그가 단순히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구나...’

 

이 영화는 도입부 2분과 마지막 엔딩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흑백으로 찍은 영화입니다. 처음에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는다고 했을 때 제작자들이 엄청나게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별로 호감이 가는 내용도 아닌데, 영상까지 흑백으로 만들면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겠냐는 겁니다. 이 영화를 위해 투자된 돈이 2300만 달러인데 어떻게 이런 거액의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 수 있냐는 지적은 사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흑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흑백으로 만들었기에 단순한 나찌의 만행을 고발하는 시사영화로 끝나지 않고 역사에 길이 남을 영화가 되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평가합니다.   


이 영화는 독일이 폴란드를 2주 만에 점령한 1939년 9월부터 1945년까지 6년간의 이야기입니다. 그 6년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내려 갈 수 없는 절망의 기간이었습니다. 그 6년은 유대인들에게 흑백 그 자체였고 거기에는 조금의 생기도, 희망도, 소망도 없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흑백으로 밖에 만들 수 없는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가 본 장면은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조금도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히틀러의 광기에 수천만이 죽어가는 세계2차대전이라는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쉰들러는 이 처참한 상황을 기회로 삼아 군수사업에 뛰어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업을 하는지 아십니까? 더 이상 타협할 능력이 없는 유대인 갑부들에게, 유대인들의 위기를 이용해서 그 갑부들에게 투자를 받고, 뛰어난 유대인 회계사 스턴을 통해 사업을 벌입니다. 그리고 그 수입은 쉰들러가 모두 챙깁니다.

쉰들러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로 유대인들만 고용합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나찌들에게 학대받는 유대인들이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을 고용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몸값이 폴란드인들의 몸 값보다 싸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고용한 겁니다. 폴란드인들의 몸 값이 5마르크였는데 그것보다 더 노동비를 아끼려고 유대인들을 고용한 겁니다. 물론 그 노동비는 유대인들이 받는 것이 아니고 나찌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처럼 쉰들러는 절대로 도덕적이거나, 선량하거나, 유대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쉰들러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5마르크의 가치도 안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아낌 없이 포기하기 까지 합니다.


본론

1. 동영상 2(재산을 팔아 쉰들러 리스트 작성)

2.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환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독일 전역에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을 모두 아우슈비츠 감옥으로 보내라는 겁니다. 그리고 쉰들러가 있는 크라코브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그나마 쉰들러의 공장이라는 안전지대가 있었기에 300여명의 유대인들이 그래도 목숨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유지하면서 살 수있었는데 이젠 모두 아우슈비츠로 떠나야만 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아우슈비츠가 어떤 곳입니까? 유대인 학살의 상징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 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화 후반부의 쉰들러는 영화 처음에 제가 소개했던 그런 파렴치한 쉰들러가 아닙니다. 지금의 쉰들러는 유대인을 하나의 노동력, 하나의 물건으로 보는 쉰들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 그 자체로 보는 쉰들러입니다. 유대인 한명 한명은 공장의 한 부속품이 아니라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는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쉰들러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쉰들러는 크라코브의 담당자인 아몬괴테 소장과 협상을 합니다. 유대인 한명당 100마르크를 지불 할테니 내 공장의 노동자들을 여기에 남겨 달라는 겁니다. 100마르크,,,,,,,5마르크가 아까워서 유대인을 고용했던 쉰들러가 20배되는 100마르크를 유대인의 몸값으로 주겠다는 겁니다. 결국 아몬괴테는 쉰들러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쉰들러는 그가 고용할 유대인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

영화 중간에 보면 나찌들은 어린 아이들을 모두 가스실로 보내서 학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나찌들이 보기에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노인과 병든 사람, 건강하지 않은 사람 역시 그 자리에서 총으로 사살해 버립니다.

그런데 쉰들러의 리스트에는 아이들과 노인들, 약한 자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점에서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가족별로 명단을 작성합니다. 그리고 결국 1100명의 명단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야말로 그것은 생명책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마지막때에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터인데 주님의 심판대에는 생명책이 있을 거라고 요한계시록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생명책 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인데 쉰들러의 리스트야 말로 주님의 생명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쉰들러의 리스트 때문에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1100명의 유대인들이 살아남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께 한 가지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쉰들러가 왜 변한 걸까요? 유대인들의 참담한 절망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챙겼던 더러운 장사꾼에 불가했던 쉰들러가 왜 지금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까지 유대인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사람이 된 겁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영화의 앞으로 돌아가 아몬 괴테 소장이 부임하자마자 시행한 나찌들의 ‘크라크브 유대인 학살’ 장면을 봐야만 합니다. 제가 생각  할 때 스필버그는 여기서 등장하는 이 짧은 한 장면을 위해서 이 2300만 달러의 영화를 조금의 망설임 없이 흑백 영화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3. 동영상 3(컬러 소녀등장)

4. 사도바울의 전환


한 소녀가 등장합니다. 빨간 코트를 입은 한 소녀가 등장합니다. 지금 크라코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눈앞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아이의 눈앞에서 부모가 비참해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크라코브의 유대인들이 벌레만도 못하게 죽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시간상 여러분들게 다 보여드리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처참한 상황입니까? 얼마나 기가막힌 상황입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내 가족이, 내 부모가, 내 어린 자식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찌들이 이런 만행을 저지릅니까? 무슨 정치적인 이유라도 있을 것 같은데 영화를 계속해서 관찰하면서 확실하게 느낀 점은 ‘유대인 학살’에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인게 유일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이 처참한 상황이 상상이 되십니까?


그런데 이때 쉰들러의 눈에 ‘붉은 피’와 같은 빨간 코트를 입은 한 어린 소녀가 보입니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 어두워야 하고, 더 흑백이어야 하는 상황인데 쉰들러에게는 이제야 비로서 유대인 소녀가 ‘컬러’로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이때부터 쉰들러에게 유대인은 더 이상 단순한 노동력이나, 물건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붉은 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 똑같이 숨을 쉬는 사람,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눈물흘리는 사람입니다. 쉰들러가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으로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결국 ‘쉰들러의 리스트’이어지고 1100명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살게했습니다. 현재 폴란드에 있는 전체 유대인의 수가 4000천명인데, 현재 쉰들러가 살려준 유대인들의 후손은 6000명이 넘습니다.  이런 놀라운 결과가 어떻게 생긴 겁니까? 쉰들러의 눈에 도망치는 한 가엾은 어린 소녀가 ‘인간’으로 보였을 때 벌어진 일입니다. 흑백의 한 소녀가 ‘컬러소녀’로 눈에 들어올때 벌어진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컬러소녀’가 보인 적이 있습니까? 이 ‘컬러소녀’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이 ‘컬러소녀’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데 앞장 섰던 바울이 왜 사도 바울이 되어 죽기까지 하나님게 충성하다가 결국 순교를 당하셨습니까?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올라가다가 이 ‘컬러소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겨우 계집종 앞에서도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배반했던 그 겁쟁이 베드로가, 어떻게 변하여 로마로 당당히 들어가서 순교자의 길을 걸었습니까?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는데, 자기가 어떻게 예수님과 똑같이 죽을 수 있나며,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겁쟁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후 지금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분입니다. 흑백이었던 그의 인생에서 마침내 ‘컬러소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방탕하고 타락했던 어거스틴은 롬13:14절 말씀에서 이 ‘컬러소녀’를 만나 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을 남겼습니다. 항상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하나님에 대한 공포로 살던 루터 역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 ‘컬러소녀’를 만나 후 전 세계를 뒤흔들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우리가 배운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유관순 열사 모두가 이 ‘컬러소녀’를 보았던 분들입니다. 이런 계기가 있었기에 그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숭고한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양화진에 묻혀 계시는 그 수많은 선교사님들은 왜 이 먼 '오지의 땅‘에 뭍혀 계시는 겁니까? 그 분들이 ’컬러 소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부장님과 선생님들은 자신들의 돈을 써가면서, 시간을 버려가면서, 일년에 한번 있는 휴가를 포기하면서 중고등부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고 계십니까? 선생님들도 ‘컬러소녀’를 보셨기 때문이고 저 역시 이 ‘컬러소녀’를 보았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가끔 다른 길을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제 눈에 ‘컬러소녀’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컬러소녀’를 보는 것, 그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컬러소녀’를 보셨습니까?


결론

1. 동영상 4(마지막 장면)

2. 전환 이후의 열매와 실천


지금의 쉰들러와 영화 처음의 쉰들러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꼭 쉰들러와 같이 인생이 완전히 전환되는 그 ‘경험’을 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목사니 장노니, 삼촌이 유명한 교수니...쓸데 없는 자랑입니다. 여러분들이 ‘컬러소녀’를 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경험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똑 같은 말씀을 가지고 왜 한 사람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데, 왜 한 사람은 그 말씀에서 비난할 핑계만 찾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를 보니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 내용은 제대로 들으려고도 안하면서 ‘목사님 옷이 촌스럽다’, ‘목소리가 마음에 안든다’, ‘생김새가 마음에 안든다’ 그런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 분들의 영혼은 병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헛된 자랑만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일상 가운데 ‘컬러소녀’를 봐야 합니다. 이런 경험이 있을 때 우리의 이름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이름이 정말 주님의 ‘리스트’에 있습니까?

장난을 버리고 진지하게 고민하십시오. 내 이름이 주님의 리스트에 있는가........말로만 들어왔던 주님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직접 주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
글쓴이 : DMpasto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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