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에 이르게 하는 설교
제 1 부 준 비
제 1 장 그들이 왜 내말을 들어야 하는가? (팀 티몬스)
텅 빈 교회 좌석과 멍하니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위대한 설교들은 널리 듣고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설교자가 사람들을 확신에 이르게 하는 과업을 성취하기 전에 가장 먼저 제기해야 하는 질문- 그들이 왜 내 말을 들어야 하는가-를 말하려고 한다. 가장 큰 비극중 하나는 청중이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청중을 알고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보다 더 효과적인 연사는 없다. 청중과 함께 하고자 하면 어떤 모양으로든 그들과 호흡할 수 있다. 함께 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과 삶의 모양을 인식하게 하고 이해를 가져다준다. 상대를 이해 할 때 그들에게 필요한 메세지를 탐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나의 과업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만일 내가 나와 연관된 세상과 관련을 맺지 않는다면 나의 세계는 결코 나의 하나님과 연관을 맺지 못할 것이다. 세상과의 연관을 위해서는 먼저 장애들을 결정함으로 시작한다. 먼저, 세상이 다른 것을 듣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온통 혼란과 고통이 난무함을 알아야 한다. 성도는 그 가운데 표류한자들이고 그 가운데 복음은 전해지고 있다. 이 혼란 가운데 성경은 현실적인 메세지를 요구한다. 청중에게 증거 되는 말씀에는 반드시 나의 호소를 담아야 한다. 청중이 말씀을 들으며 반문한다. “내가 당신을 신뢰할 수 있는가?” “당신이 내게 관심을 갖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이것은 나의 호소가 윤리적이며, 감정적이며, 논리적인 설교인가? 를 청중은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적용이다. 목사인 우리들의 과업은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간격을 메꾸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효과적인 간격을 메꾸는 방법은 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만들고 그들이 만족스러운“아하!” 반응을 나타내게 만드는 것이다.
제 2 장 창조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가? (프레드 스미스)
사람은 창조성을 바란다. 창조성이 없다면 설교가 공허해지고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삶들의 생각이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창조적이라는 말은 상투적인 문구가 되었다. 창조성은 광고 카피라이터와 패션 디자이너 못지않게 목사들에게도 요구된다. 최근 한 교회목사들의 수명이 18개월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는 18개월이 지나면 설교가 바닥나 더 이상 전달 할 메세지의 고갈상태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적이 되려면 여덟 가지 필수적인 특성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먼저, 폭넓은 교제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다른 창조적인 사람들과 접촉을 갖는다. 또, 어떤 삶의 전문영역에서는 그 사람이 독주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뉘앙스와 세부사항들을 알고 있다. 또한 그 영역 내의 문제들은 그를 흥분시킨다. 자기들의 삶의 큰 문제들 때문에 힘을 잃고 있는 기독교자도자들은 그들이 강점을 갖고 있는 영역 내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오늘날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방식들이 최선의 방식들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들끓고 있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만족이 없는 불만족! 어떤 이들은 이것을 고상한 불만족이라고 한다. 만족은 안일을 가져 올 수 있다. 위대한 설교자들과 신학자들은 불만족하고 있다. 다음은 경외심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세상에 대한 폭넓은 개념이 창조성의 또 다른 부분이다. 불만족이 우리를 변화로 인도하는 반면에 경외심은 우리를 탐구로 인도한다. 그 분을 점점 더 알게 됨에 따라서 그 개념은 내가 더 창조적이 되게 만들어 주었다. 일부 창조적인 사람들은 너무나 노력하는 나머지 인생의 초기에 탈진한다. 에너지는 갖추어야 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탐구할 에너지는 결여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다. 여섯 번째는 원칙에 기초해 생각하는 능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에 기초해서 생각한다. 다만, 10%의 사람들만이 원칙에 기초해서 생각한다고 한다. 나 스스로는 이것을 다른 말로 자연법칙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신적능력으로 섭리하고 역사하시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전통에 포위되게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우리 자신을 제한한다. 내게 있어서 성경은 언제나 나침반이 되어 왔다. 아무리 길을 벗어나 헤맨다 할지라도 언제든지 숲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평가다. 성경은 우리가 가능한 한 폭넓게 생각하면서도 안전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구비시켜 준다. 그분은 자신의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세상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이것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제 3 장 청중들에게 귀를 기울이라 (해돈 로빈슨)
설교자들은 자기가 확신에 이르도록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어떻게 아수 있을까? 설교가 끝난 후 이다. 설득력은 설교자가 친밀하게 알고 있는 회중을 위해 설교를 준비할 때 증가된다. 교구민들의 의견과 감정들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그러한 앎이 임한다. 해돈 로빈슨은 청중을 효과적으로 해석하는 몇 가지 길을 탐구하고 있다.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목회연구소가 교인들에게 제기했던 질문이다. 많은 답변 중에서 표본적인 답변은 “분석은 너무 많은데 답변은 너무 적습니다.” 또 “지나치게 비인격적이고, 지나치게 명제적입니다-설교들은 삶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라는 답이 나왔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전문가들은 설교를 “종교적인 독백”이라고 무시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양쪽 방향으로 흘러야 하는 반면에 설교는 한 쪽 방향으로만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회중들이 의심과 반대 의견과 의견들을 답변으로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설교들이 소귀에 경 일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 행위 중에 그렇게 중요한 피드백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듣는 것은 수동적인 일처럼 보인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전형적인 구경꾼의 스포츠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능력 있는 전달자들은 그들의 눈으로 듣는다. 그들은 청중들이 이해하거나 동의 할 때, 또는 의문을 품거나 혼란에 빠져 있는 때를 그들의 표현과 자세를 통해서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설교자들은 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묻는 질문들과 그들이 찾는 답변들을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찰해야 한다. 필요들(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 인정했든, 부인했든), 관계들(개인, 가족, 공동체), 경험들, 태도들, 그리고 흥미들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내용을 메모해 두는 것은 지나가는 행렬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곧 성경적인 자료가 되어 메시지에 접근하는 방법을 채석하고 형성한다. 크든 작든 간에 교회들은 피드백 시스템을 조직할 수 있다. 아이오와의 한 교회는 주중 성경공부 모임의 내용을 다음 주일 설교 본문에 근거시킴으로써 독백을 토론으로 바꾸어 놓는다. 목사가 본문을 설명하는 노트들을 제공한 다음에 사람들이 소그룹으로 나뉘어 스스로 의미와 함의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사전에 본문을 연구하는 것이 설교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키지 않고 오히려 증가시킨다는 데 동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자료를 의식하고 설교자가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이러한 기회들이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상 그 기회들을 통해서 설교를 더 잘 이해하면서, 설교를 더 예리하게 평가하기를 배우게 된다. 그 목사가 주의 깊게 듣는다면 청중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와 무엇을 듣고 듣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을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루어지든 간에 피드백은 활력 있는 전달의 근원이다. 피드백이 없다면 설교는 거의 접촉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초창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교제와 말씀을 나누기 위해 함께 모여 애찬을 나눴다. 교사가 성경을 설명할 때 청중들은 갑자기 질문과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피드백이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바울 같은 신약 기자들은 이러한 교환을 통제하는 기본 규칙들을 기록하였다. 후에 기독교가 헬라와 로마의 수사학의 영향하에 놓이게 됨에 따라서 웅변이 대화를 대체하고, 대화가 독백이 되었던 것이다. 초기 교회는 현대 교회가 반드시 재발견해야 할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제 4 장 열정 대 기술:설교자의 딜레마 (칼빈 밀러)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rn) 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 설교하는 것을 들을 때 그가 싸우는 벌들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넘칠 듯한 기쁨에는 매력이 있다. 설교의 기술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길을 따르도록 움직여지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윤리는 설교를 하나님의 요구의 견지에서 보았다. 초기기독교 교회는 설교들에 의해서 교회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교회는 제도적인 조직이나 프로그램, 또는 건물이 없어도 단순한 예배센터, 즉 설교와 그 설교가 창출한 헌신된 무리들, 신자들의 공동체를 기뻐하였다. 부스, 화이트필드 이들의 한결같은 말은 세례요한의 전통에 속한 것, 즉 기술이 아니라 열정이었다. 자아가 외침의 추진력이 되어 자신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기술일 뿐이다. 기술이 열정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처칠은 사람들에게 우월성이 아니라 희생에 대해서, 정복이 아니라 용기에 대해서, 복수가 아니라 갱신에 대해서 연설하였다. 처칠은 영국에 활기를 찾게 해주었다. 그의 말은 새벽이 오게 하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설교는 듣기 좋은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전달된 모든 설교는 하늘의 법정에서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제 2 부 선 포
제 5 장 복음을 선포하는 법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는 옳은 것을 가르치고 그른 것을 반박해야 한다. 교사는 1.청중들이 교훈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이야기를 수단으로 삼아 진리를 말한다. 2. 청중들이 의심 가는 문제들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논리적으로 증거들을 제시한다. 3. 청중들이 교훈을 받기보다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활기찬 연설이 요구된다. 여기에서는 간청, 경책, 권면, 질책 그리고 그 밖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수단들이 필수적으로 요구 되는 것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최고의 우선순위가 명확성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대화뿐 아니라 공적인 연설의 경우에 더 크게 해당된다. 연사는 질문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데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연사는 자신의 말이 이해되었다고 판단하자마자 연설을 마치든지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키케로는 “가르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고 즐겁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설득하는 것은 승리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처음 것은 말의 내용에 달렸고, 다음과 끝은 말하는 방식에 달린 것이다. 교사의 언어는 때로는 차분하고 때로는 호소력 있고 때로는 온화하며, 장엄한 말로 말에 성격에 따라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사여구 장식이나 꾸밈은 없다. 다만 내용에 충실할 뿐이다. 모든 청중이 설교자의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일부 편협 된 성도나 설교자의 언행일치가 안 된 면을 보았을 때는 스스로 설교자를 업신여기게 된다. 절제된 기도는 설교자를 더 온전케 세워 줄 것이다.
제 6 장 어떤 설교들이 다른 설교들 보다 더 나은 이유
(윌리엄 크루다이너)
설교의 적절한 내용은 회중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설교자는 청중의 눈과 더불어 주제와 기술들을 선택해야 한다. 실패한 설교 뒤에 나타나는 현상을 딛고 생각해야 할 것은 메시지와 그룹 간의 조화와 연관에 대해서이다. 중형과 대형교회의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들의 목적은 예배를 위한 모임이다. 성도와 성도간의 충분한 교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셀(cell)을 조직하고 반을 만들어 공동의 목표를 갖게 해야 한다. 초점이 예배가 아닌 셀에 가 있으면 예배나 교제는 부산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다음과 같은 지침을 만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룹의 초점이 무엇인가? 를 파악하는 것이다. 회중, 축하모임, 셀, 반등 다양한 모임의 성격을 파악하여 이에 맞는 본문을 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그룹을 동시에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많은 평신도 교사들이 지역교회의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 훈련을 받아 쓰임 받는다면 (그룹역학을 필요로 할 경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점은 교회내의 그룹과 예배와, 친밀감, 교제를 알고 그들의 필요를 이해하여 욕구를 충족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역의 의미이다.
제 3 부 예 화
제 7 장 오트밀 속의 건포도: 예화의 기술 (마크 리틀튼)
가장 위대한 설득자께서는 이야기들-여자의 잃어버린 동전, 두 마음을 품은 소작인, 신실한 종들-을 가지고 설교하셨다. 예화는 진부한 독백에 신선한 공기를 제공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뿐만 아니라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진리를 삶에 적용하도록 도와준다. 예화의 상자를 가득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용의 문제이다. 예화는 가장 적절한 타이밍과 내용을 필요로 한다. 예화는 필요할 때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예화를 위한 예화가 되어서는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화를 통해 메세지의 전달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화를 통해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먼저, 제안된 행동이 분명해야 한다. 다음으로, 예화는 분명한 권면과 더불어 끝나야 한다. 그리고 목적이 어떤 요점을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면 다른 요소들이 지극히 중요하다. 단순성, 독특성, 유익성, 신뢰성, 무엇보다 현실성이 중요한 것이다. 올바른 예화를 사용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예화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예화로 인해 요점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한 가지, 믿을 수 있고 전정한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잘 사용된 올바른 예화는 설교를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제 8 장 강단의 표절 (제이미 버킹검)
바울은 철학자들과 선지자들로부터 생각들을 빌어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기자들로부터 많은 생각들을 끌어내셨다. 표절! 이것은 올바른 것인가? 저술가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문제라면 설교자들에게는 매주 직면하는 문제가 된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까지 다른 사람의 자료를 설교한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표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표절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 이유는 연사들은 메시지의 중간에서 흐름을 깨기를 싫어한다. 본문에 삽입된 각주를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청중의 혼란을 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의상 감사를 표현할 것을 요구받는다. 예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함께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주일 강단에서 표절하고자 할 때 그 말을 나의 말로 한다면 결국 자신은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최소한 교회의 교역자들에게만은)이다. 가장 좋은 설교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임하신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리는 성령의 생수 외에 세상 것을 의존하여 메시지를 증거 할 때가 있게 된다. 출처를 알려야하고 표절을 밝혀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 중 하나는 매스미디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다. 잡지, 신문, 광고, 텔레비전, 인터넷등 다양한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인데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표절을 나에 것으로 말할 경우, 내용을 알고 있는 성도가 표절자라고 말하지는 않아도 “거짓말장이”라고는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고안한 자료를 사용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 출처를 밝히느냐 아니냐의 여부인 것이다. 종종 우리는 출처를 밝히기를 원치 않는다. 반면에 출처를 밝히는 것은 종종 메시지를 강화해 준다. 그것은 담임자가 독서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알게 하는 것이 된다. 출처를 밝히는 것은 설교를 산만하게 만드는 대신에 종종 여러분의 청중들을 그러한 상황으로 인도한다. 그들은 목회자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수집한 바를 듣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예의는 출처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윤리는 어떤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한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트랄과 히바드가 저술한 『문학 핸드북』은 표절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표절은 문학적인 도둑질이다. 잘 알려지지 않거나 잊혀진 이야기의 구성을 훔쳐서 자신의 이야기에 새 것인 양 사용하는 작가는 표절자이다. 표절은 내용만을 차용할 때보다는 언어를 훔치는 것을 포함할 때 더 발견하기가 쉽다. 생각과 언어 두 가지 모두를 훔친 사실이 드러날 때 표절은 무의식적인 차용, 사소한 요소들의 차용, 그리고 단순한 모방 등과 같은 덜 심각한 것으로 조금씩 희미해진다.” 고 했다. 작가와 음악가들은 이 정의를 이해한다. 즉 그들은 단어와 악보들을 베낄 수는 있지만 아이디어를 베낄 수는 없다. 흑과 백이 합쳐져 희색이 되고, 각 설교자가 불법적인 것과 단순히 비윤리적인 것, 또는 허용 가능한 것의 차이를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 영역이다. 표절에 관한 다음의 규칙은 좋은 규칙이 된다. :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자유롭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보답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빌려 쓰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저작권을 인정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저작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직함을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제 9 장 교회에서 스컹크 이야기를 한 날 (고든 맥도날드)
설교에 있어서 회중을 끌어들이는 최선의 시간은 시작 부분이다.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그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전압 저하가 이러난 전등처럼 희미해진다. 불꽃이 튀는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 싸움의 절반이다. 사실상 예화들은 스스로 말을 한다. 그런 주일은 축복된 주일이다. 반면에 예화들이 설교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고든 맥도날드는 이장에서 예화를 제공하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해 주고 있다.『 나는 내 고향 매사추세츠 주 랙싱톤의 한적한 거리 그랜트 가의 한중간에서 처음 그 스컹크를 발견했을 때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 스컹크는 머리에 박스를 뒤집어쓰고 앞을 보지 못한 채로 미친 듯이 이쪽저쪽으로 난폭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치자니 강도를 만난 제사장이나 레위인같이 그냥 지나치는 느낌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결국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나는 그날 주일아침 사리에 닿는 서론을 준비할 수 없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설교자의 장애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스컹크를 그냥 지나치며 가졌던 죄책감같은 무거운 마음으로 단에 올랐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스컹크의 고난 받는 상황은 머릿속에서 지워졌는데 아직도 나는 어떻게 그들의 주의를 끌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예배가 계속되는 동안 점점 더 마음이 괴로워졌다. 스컹크의 곤경이 매 마음속에 다시 떠오른 것은 헌금 시간동안이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정말 궁금했다.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범을 따랐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나는 스컹크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컹크가 초콜릿박스를 발견하여 그 박스 안으로 머리를 넣으려고 했으나 좁은 공간이어서 주둥이를 넣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불행한 결과를 묘사했다. 내가 차를 몰고 갈 때에 스컹크는 상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해 날뛰고 있었던 때였다. 나는 몇 초 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의 입에서 그리고 곳곳에서 웃음소리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웃음 뒤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이제 제가 중대한 도덕적 딜레마에 봉착하고 있었음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회중은 이제 나와 함께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권태와 선입관, 그리고 피로를 헤치고 나아갔다. 서두를 여는 이야기가 그렇게 좋다면 설교의 나머지 부분은-적절히 준비 되었을 경우-설교자와 청중을 신속히 감동시킬 수 있다. 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말을 이을 때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이것은 청중이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나는 말하기를 “이 스컹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는 “나도 모릅니다. 경찰이 와서 총으로 쐈을지. 지나가는 사람이 잡았을지, 여전히 어려움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실망어린 한 숨을 자아내고 있었다. 결정의 순간에 다시 한 번 멘트를 했다. “여러분과 제가 무방비의 상태의 동물에게 동정을 느끼는 것은 비교적 쉽게 생각하면서도 비슷한 위기에 처한 인간들을 무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깊숙이 새겨졌다. 스컹크의 곤경은 나의 요점이 되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돌봄을 보게 되었다.
제 4 부 결 론
제 10 장 행동에 이르는 다리를 놓으라 (데이빗 메인스)
매혹적인 서론이 사람들을 설교로 끌어들이듯이 효과적인 결론은 정곡을 찌르고 사람들이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가도록 추진한다. 나는 대개 내가 듣는 설교들의 주제를 결정한다. 그러나 종종 나는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 혼란을 겪게 된다. 그것은 좌절스러운 일이다. 종종 나는 학생 설교자들과 함께 일하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두 가지를 주의하라고 말한다. 주제와 요구되는 반응이 그것이다. 평신도가 어떤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내게 “오, 그 설교자는 정말 훌륭했어요”라고 말할 때 나는 이렇게 응수한다. “기쁘군요, 그의 주제가 무었이었죠?” 더 나은 설교를 하는데 필수적인 주요한 요소는 내가 믿기에 ‘명령’-설교 분문 자체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행동에 대한 요구-이다. “서기관의 병”이라 불리는 말은 정보에 매혹되어 있던 서기관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설교라는 단어는 추진력을 의미하는 자들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정보는 많지만 마음에 담고 가야할 말, 메시지는 없는 것이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과 그만두어야 할 일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교회 예배를 떠난다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내가 아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많은 정보나“더 깊은 진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손톱만큼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사람들이 전달된 내용에 반응할 수 있도록 제시할 수 있는 실제적인 제안들이 무엇인가?” 우리 설교자들은 설교와 함께 실제적인 다리를 놓아야 한다. 암송할 성경 구절들을 제공하고, 사람들이 지갑 속에 갖고 다닐 설교주제 카드를 인쇄하고, 어떤 텔레비전 프로의 세속적인 또는 기독교 또는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평가하라고 제안하며, 사람들이 주일 저녁 식사에 대화할 질문을 게시판에 붙여라-이처럼 다리들은 다양하다. 설교의 진정한 완성은 성도들로 하여 그 분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제 11 장 정직한 초청을 하는 법 (레이튼 포드)
사람들은 의자들을 창고에 넣고 완벽한 기회가 낭비되기 전에 메시지에 반응할 기회를 필요로 한다. 어떻게 정직하게 초청이 이뤄질 수 있는가? 초청은 설교를 마치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과 관심과 더불어 사용되어야 한다. 목적이 뚜렷한 도구인 것이다. 진정한 초청을 위해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선포이자 명령이다.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19-20)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호소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메시지와 부르심을 신실하게 제시해야 한다. 내가 할 일은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할 일은 열매를 생산하시는 것이다. 정직을 위한 냉철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정직한 신실함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실 하나님앞에 부름 받은 청지기의 모습이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초청을 하는 유일한 타당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결정을 내릴 것을 명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청중에게 정직해야 한다. 성경은 믿음의 단계를 묘사하기 위해 많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거기에는 오는 것, 따르는 것, 마음을 여는 것,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돌아서는 것 등이 포함된다. 초청은 믿음이라는 영적인 실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받아들여서 나오든 받아들이고 나오지 않든 자신만이 자신의 마음을 안다. 나오지 않아서 영접지 않았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모함이 따른다. “결정하지 않는 것은 결정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사실이 담겨져 있다. 예배마다 초청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이다. 영국과 호주의 교회들은 성도들이 전도한 친구들을 교회에 데리고 오는 예배시간을 한 달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드린다. 모든 초청에는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특별한 기도가 이어야져 한다. 초청에는 규칙이 있다. 미끼를 사용하지 말라, 손만 들라고 해라. 참을 성 있게 기다리라. 확신과 용기와 긴박성과 기대를 가지고 초청을 제시하라. 하지만 성령을 대신하려고 애쓰지는 말라.
제 5 부 숙 고
제 12 장 강단의 다섯 가지 유혹 (벤 패터슨)
설교가 끝나 교회 문이 닫히고 식사가 시작 된 후에 우리는 다음주일 아침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설교는 영향력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강단의 유혹 첫 번째는 강단에서 연기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이다. ‘연기’ 그것은 어떤 면에서 설교할 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연습을 싫어한다면 여러분이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될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받을 것을 받았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연기가 연기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설교될 어떤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교를 위해 말씀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말씀이 가슴에 불일 듯 일어나기에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씀이 내게 갖는 의미를 지나쳐 버리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바울은 “전파한 후에 버림이 될까” 두려워했다. 다음의 유혹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대신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예화와 이야기는 얼마나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려는 지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설교자가 받는 네 번째 유혹은 방금 설명한 것과 정반대가 되는 유혹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선지자라고 자부하되 그들의 제사장이 되기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유혹이다. 선지자적인 입장에서 도도하게 비난하고자 하는 모습으로는 성도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성경을 연관성 있게 만들고자 하는 것 즉, 생생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유혹이다. 자유주의 뿐 아니라, 복음주의적인 교회에서도 피해는 더해가고 있다. 설교에 대한 충고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건전한 충고는 설교를 잘하려 하지 말고 단지 못하지 않도록 만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성경을 연관성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 자체를 입증하는 것이다.
제 13 장 설교는 비길 데 없는 사역이다 (위렌 위어스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교하도록 부르셨다면 여러분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이며, 그리고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필립스 브룩스는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교는 신적인 진리를 인간의 인격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신적인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의 인격은 계속해서 변한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지를 준비하는 사람을 준비시킨다. 마틴 루터는 기도와 묵상, 그리고 유혹이 설교자를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우리의 받은바 메시지를 증거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축소시키거나 정죄하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우리를 드리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어떤 설교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스스로의 메시지를 설교하시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요구된다. 설교의 기술과 과학을 혼동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내 방식대로 설교하도록 나를 부르셨다. 모방이 많은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항목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설교가 여러분의 사역에 있어서 흥분을 주는 체험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자신을 알고 용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결코 다른 설교자를 모방하지 말라. 설교자는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어떤 것도 핸디캡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바울의 육신의 가시를 가지고 행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설교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만들기 원하실 때 인격체부터 만드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은 우리가 사는 삶으로부터 고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세우시고 사용하실 수 없는 사역에 결코 우리를 세우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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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성안토니우스
글쓴이 : 안토니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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