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모음

공동체 고백 -김양재 목사 2

열국의 어미 2010. 5. 12. 01:49

 

세상의 주인공은 ‘나’

 

어느 여성도가 어렵게 이런 고백을 한다. 남편이 예수님을 안 믿는데 직업상(?) 뇌물을 받는 것이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단다. 그렇게 남편이 자신을 먹여 살리기 때문에 “뇌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같이 교회에 가자.”는 이런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누구라고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뇌물을 안 받아서 손해를 보고 일을 못하게 된다면 당장 누가 먹여 살리겠는가 말이다.

구약시대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전,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멸망의 메시지를 외치게 하셨다.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망하기 전에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눈물로 호소하게 하셨다. 그러나 다른 유대 선지자들은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면서 백성들을 안심시킨다. ‘괜찮아. 괜찮아. 뇌물 좀 받는다고 큰 일 나는 거 아니야. 다들 그렇게 살아.’ 하면서 예수님을 믿어도 ‘적당히’ 믿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적인 지도자들이 그렇게 말을 하니 속이 편해진다. 그래서 그 성도처럼 ‘남편이 퇴직하면 교회에 가자고 해야지. 그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해야지.’라고 스스로 타협할 수밖에 없다.

날마다 성경을 읽어도 순종하려고 읽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생기지만 가르치려고 읽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안 생긴다. 그것을 실제로 삶에 적용시키는 것 빼고는 안 해보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순종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고 설명한다. 이렇게 많은 공부를 해도 뇌물 하나를 안 받는 것이 힘든 것이다. 뇌물을 안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지만 남편의 돈이 주는 거짓 평안에 나도 속고, 남도 속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고 싶은 생각에 더욱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고 싶고 보이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러나 위장된 평화는 힘든 사건이 오면 금세 무너지기에 삶에서 능력이 되지 않는다.

 

 

대단한 신분

 

“주 야훼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사람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겔 5:5~6).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가운데 두시고 열방으로 둘러있게 하셨다. 세상의 중심에 예루살렘을 두고 멸망의 본보기를 보여주신다. 세상의 중심은 예루살렘, 예수님을 믿는 ‘나’이다. 예루살렘을 망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를 버리고 율례를 행치 않는 사람들에게 외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다. 망하고 병들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내가 온 집안의 주인공이 되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쳐야 한다. 뇌물을 안 받아서 직업을 잃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먹여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하나님의 규례를 거슬러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걸 보여줄 책임이 나에게, 우리에게 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신분임을 알고 하나님의 규례를 원칙으로 놓고 갈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 나를 사랑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감독 하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나를 위해 온 우주와 온 세계가 돌아가고 있다.†

 

 

복 받는 비결

 

한 달에 직원 월급으로만 1억여 원을 지출하던 사업체의 사장님이 말 그대로 ‘폭삭’ 망해서 우리들교회에 왔다. 만만치 않은 경력이 있으니 누구 도움을 받아서라도 회사를 일으켜보고 싶었을 텐데, 사장님은 금세 망한 환경에 순종하게 되었다.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어느 집사님의 ‘컨설팅’을 받으며 포장마차 떡볶이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힘든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에 “열심히 모아서 다시 사업하셔야죠.” 하고 인사를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한다. 떡볶이 장사가 너무 좋다고, 앞으로도 그 일을 계속 하고 싶단다. 그러더니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손님들을 마주하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고 전도를 하게 됐어요. 목사님, 제가 전도인의 사명을 갖고 장사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하고 기도 부탁을 했다.

“할렐루야, 야훼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시 112:1~2).

 

만나는 사람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주고받는 새해를 맞았다. 사람에게 복 받으라는 소리를 들어도 기분이 좋은데 하나님의 말씀에 “복이 있도다!” 하니 자다가도 정신이 번쩍 나지 않는가? ‘복(福)’이라는 글자만 봐도 좋아서 숟가락에도, 밥그릇에도, 베갯잇에도 복(福)자를 새겨놓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복’, ‘복’을 외친다고 복을 받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있는 자의 조건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냥’이 아니라 ‘크게’ 경외하고 ‘크게’ 즐거워하라고 하신다. 우리의 고통과 즐거움은 순간적이고 작은 것이다. 사업을 하다 망해도, 60평 아파트에서 반 지하 방으로 내려가도,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도 그 고통은 언젠가 사라진다. 반대로 돈을 벌어도, 큰 집을 사도, 암에 걸렸다가 나아도 그 즐거움 역시 허무할 정도로 순간적인 것이다. 영원하고 크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돈과 출세와 건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에게 크고 영원한 즐거움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신학을 하고 성경지식을 많이 안다고 계명을 즐거워하는 건 아니다. 20여 년 큐티 사역과 교회를 통해 날마다 확인하는 것은 고난당한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 크게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듯한 회사 사장님일 때는 전도를 못하던 그분도 포장마차 사장님이 되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이다.?

돈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망한 환경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떡볶이 포장마차에도 기름을 부어주셨다. 장사도 제법 잘 되고, 그분과 가족들의 삶이 방송에 소개되는 일도 생겼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영육의 복을 허락하신다. 당장 환경이 나아지지 않아도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은 모든 고난을 축복으로 바꿔주신다. 날마다 큐티 하는 자의 복, 여호와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의 복 있는 인생으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축복하신다

 

 

보기에도 아까운 내 아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이삭의 출생, 야곱의 방황, 눈물로 침상을 적신 다윗과 예수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역사에는 고난의 사건이 배후에 있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신 세례 요한의 탄생도 힘든 기다림과 수치의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세례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눅 1:6)이라고 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아버지 사가랴는 유대 사회의 지도자인 제사장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식이 없는 것을 저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제사장으로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자기 직분을 물려줄 아들도 없이, 날마다 성전에서 남의 자식들을 축복하고 있으려니 사가랴가 얼마나 속이 탔겠는가.???

 

그런데 그토록 힘든 기다림 끝에 하나님께서 아들 요한을 허락하셨다. 주의 천사를 보내셔서 “네 아들이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많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리라.”(눅 1:15~16)고 엄청난 약속을 주셨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눅 1:66)하며 기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이 많아 얻은 자식인데다가 하나님의 약속까지 받았으니 아들 요한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역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기대만이 약(藥)”이라고 했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기대하면서 부모는 자식을 쳐다본다. 잘난 자식에게는 “네가 엄마 아빠의 소원을 이뤄야 된다.”면서 기대하고, 못난 자식에게는 “넌 장차 뭐가 될래. 군대나 가라. 시집이나 가라.”고 하면서 조용히 살아주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사가랴가 요한에게 가진 기대는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아들 요한이 우리 집안을 위해, 나를 위해 주신 자식이 아니라 주의 일을 위해 보내신 자식임을 알고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래서 보기에도 아까운 아들이지만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눅 1:80) 빈들의 훈련을 받게 했다.

 

 

빈들의 훈련

 

온 나라가 열병을 앓는 입시철이다. 빚을 져서라도 학원비, 과외비로 돈을 투자하고, 아침저녁으로 자가용 태워 다니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스트레스 받을까봐 말도 제대로 못 붙이면서 나의 인내를 투자하고… 내가 기대하고 투자한 만큼 두렵고 떨리는 시간일 것이다. 이 기간이 부모와 자녀에게 빈들의 훈련이 되기를 바란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녀를 통해 내 욕심과 기대를 버리는 것이 부모가 거쳐야 할 빈들의 훈련이다. 자녀 입장에서는 부모의 뒷바라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내 장래를 보장하신다는 걸 깨닫는 것이 빈들의 훈련이다. 그래서 자녀가 속을 썩이는 가정일수록 최고의 빈들이다. 가출을 하고, 학교로 경찰서로 불려 다니는 자녀를 보면서 명문대학이고 뭐고 상관없이 ‘저 아이가 예수님만 믿었으면….’하고 저절로 하나님의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눅 1:76~78).

 

자녀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기대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효도를 하건, 날마다 문제를 일으키건 하나님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눅 1:75) 하시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 집안이 대단하고, 자녀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나와 내 자녀를 통해 그 사명을 이루신다. 그 약속을 믿으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하는 하나님의 기대로 입시생의 빈들, 학부모의 빈들의 훈련을 잘 받고 자라가기를 기도드린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왜?’가 없다

 

인도에서 선교를 하던 핀란드인 여선교사가 폐병에 걸려 사역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휴양하며 농사일을 돕던 중에 이번에는 탈곡기에 팔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오른쪽 팔을 잃고 이 선교사님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주님, 폐병으로 사역지를 떠나고 이제 오른 팔을 잃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왜 제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이 선교사는 ‘왜?’라고 하지 않았다. ‘왜’라는 물음 대신 ‘무엇을’이라고 기도함으로써 고난의 현실을 극복했다.

나이가 들어서 죽건 병으로 죽건, 선교사님처럼 불의의 사고를 당하건 죽음과 질병은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삶의 과정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음과 부상을 겪을 때 우리는 억울함과 분노로 더 큰 아픔을 느낀다. 왜 나에게, 내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조차도 그 뜻을 알 수 없어 절망할 때가 있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새벽기도에 다녀오시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뺑소니 사고였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범인을 찾지 못했다. 사고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새벽기도 때마다 교회 청소를 하느라 작업복 차림이던 주름이 조글조글하시던 어머니의 시신 아래에는 ‘30대 여인’이라는 푯말이 걸려있었다. 외상도 없이 돌아가신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 모습을 통해 가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지 않던 친정아버지도 바로 그 주일부터 교회에 가시고 장로님으로 섬기다가 돌아가셨다. 물질로 남겨주신 것이 없어도 생전에 보이신 믿음의 모습이 큰 유산이 되어 나와 가족들을 살린 것이다.

 

 

‘왜’ 대신 ‘무엇을’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 2:11).

엘리야 선지자가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고 승천할 때의 말씀이다. 어쩌면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가 떠난다는 불안함과 함께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는 불말과 불수레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철없는 나이에 맞았던 어머니의 죽음도, 삼십대 후반에 겪은 남편의 죽음도 불말과 불수레 같은 갑작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의 본질은 엘리야의 승천과 같은 구원의 사건이었다.

끔찍한 불수레와 같은 일도 말씀으로 해석해 주시면 구원으로 이어지는 사건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과 다른 것이 있다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왜?’가 아니라 사건을 통해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물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100% 옳으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왜’가 없다. 두려운 불수레의 사건이 찾아올 때 예수님을 믿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어머니 한 분의 믿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와 가족들을 살렸다. 남편이 죽음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것이 나의 간증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했다. 고난 속에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한 사람이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살린다고 믿는다.

 

갑작스런 병이 찾아왔는가? 배우자가 외도를 했는가? 자식이 집을 나갔는가? 원망과 분노와 연민으로 내 삶을 낭비하지 말자. 고난의 종류와 크기가 어떠하든지 그 사건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무엇을 할까 묻자. 날마다 말씀으로 내 삶을 해석하며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할 때 불말과 불수레 같은 모든 사건이 구원의 사건이 된다. 힘든 사건이 도리어 자녀들에게 남겨줄 가장 귀한 유산이 된다.†

 

 

인간은 100퍼센트 죄인입니다

 

2003년 11월 미국 시애틀에 사는 54세의 백인 남성 게리 리지웨이가 48명의 여성을 살해한 연쇄살인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가 살해한 사람들은 대부분 매춘을 하는 여성이었고, 리지웨이의 전 부인들은 그가 성중독자라고 증언을 했다. 지칠 줄 모르는 성욕으로 길을 가다가도 행위를 요구했고 그 문제로 세 번의 이혼을 경험했다. 이혼 후 욕구를 해결할 길이 없던 리지웨이는 매춘부와 관계를 맺고 돈이 없어서 그들을 죽였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48명을 죽였다는 것보다 놀라운 이야기는 리지웨이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는 사실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성경을 읽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봤다고 이야기했다. 어디를 봐도 그렇게 쉽게 살인을 저지를 사람으로 안 보였다는 것이다.?

게리 리지웨이 기사를 보고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수 있어. 저런 인간은 죽어야 돼.” 이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매춘하는 여자들이 더 문제야. 아무하고나 그런 짓을 하니 죽어도 할 말이 없지 뭐.’ 이런 생각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와서 “당신도 리지웨이하고 똑같은 죄인이다.”라고 말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죄인이라고 회개하지만 적어도 나는 살인은 하지 않았다. 리지웨이나 살해당한 여인들처럼 음란하게 살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리지웨이와는 달라.”라고 말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신다. 성경을 통해 “너도 똑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9~12).

 

‘우리’는 사도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들, 크리스천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좀 나으뇨?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세력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목사도, 선교사도, 장로도, 집사도, 누구도 죄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죄인임을 인정하자

 

가끔 교도소에서 말씀 전할 기회가 있는데 가서 보면 외모가 이상하게 생긴 사람은?없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말씀을 전하면 교회에 모인 성도들보다 더 진지하게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수감자들에게 “여러분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느냐?”고 물으면 모두가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아멘”하고 답한다. 나는 어떤 교회에서도 그런 “아멘”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교수, 지도자들의 모임에 가서 “여러분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시느냐?”고 물으면 가만히 있거나 “내가 왜 죄인인가?” 물어본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떤 사람이 예뻐 보이실까. 누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까.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그들은 고난 속에서 본능대로 행해서 법을 어겼다는 것뿐이다. 교도소 밖에 있는 우리는 본능대로 행하기 직전에 교양이 가로막았다는 그 차이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순간적으로 미워서 살인하고, 좋아서 간음하고, 거짓말을 남발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다. 그런데 내가 겁이 많아서, 더럽고 치사하게 교양이 있어서 살인을 안 하고 참고 사는 것뿐이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은 돈과 출세에 대한 가치관이 안 변하고, 어떤 사람은 술을 못 끊고, 담배를 못 끊고, 음란을 못 끊고, 미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죽어도 해결이 안 되는 죄들을 끌어안고 모두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런 내 자신을 볼 때 한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내 죄에 대해 아파하는 그 마음을 귀히 여기신다. 내 힘으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눈물의 고백을 기쁘게 받으신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서로가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보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없다.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한 믿음을 가진 신앙 공동체로 들어가자. 나와 타인에 대한 판단과 정죄를 버리고 서로의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의 강력(强力)이 굳게 얽힌 죄의 사슬을 끊으신다.†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갈지어다

 

1990년, 아직 개방이 되지 않았을 때 중국을 방문했었다. 전화도 없는 곳에서 집집을 다니며 말씀을 전하는데 어떻게들 연통을 하는지 매일 장소가 바뀌어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아 모두 십리, 이십리를 걸어서 모인 사람들이다. 그래도 늦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성경공부를 해도 오래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다. 밤 11시 집회를 마치고 숙소로 가는데 “우리는 멀리서 서른 시간을 걸려 왔기 때문에 잘 시간이 아깝다. 잠이 안 온다. 숙소에 같이 가서 말씀을 더 들어도 되느냐.”고 나를 찾아왔다.

 

밥이라고 제대로 먹었겠는가. 밥도 아닌 고구마, 옥수수 삶은 것을 식사로 주는데 시간을 아끼기 위해 먹어가면서 집회를 했다. 당시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철밥통’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철로 된 밥통에 배급을 받아 연명하는 사람들이 그 철밥통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으니 그 열심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신 부르심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눅 10:1~2).

공생애 6개월을 남겨두고, 예수님은 미움 받는 사마리아, 멸시 받는 갈릴리, 무시당하는 베뢰아 요단 저편, 소외된 땅들을 찾아가신다. 예수께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 각 지역’은 그렇게 무시받고 힘든 땅이었다.

나에게 선한 것이 없음에도 목회를 하면서 힘든 사람들을 만나고 찾아가게 된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사마리아, 갈릴리, 베뢰아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유대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도 말을 안 들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만났던 분들, 재수생 아이들, 빚지고 환난 당한 자들은 추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전하는 대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은혜를 받는다.

 

교양, 지위 좋아할 것 없다. 100년 전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정, 노비, 기생… 이런 사람들 전도하느라고 얼마나 속이 터졌겠는가. 그러나 이 땅에서 낮고 천한 사람들이었기에 저절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안 받아들이는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힘 빼지 말고 힘든 사람, 무시 받는 사람에게 가서 그들의 갈급함이 예수 그리스도로 해결 받도록, 거기에 힘을 쏟아야 한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 10:3).?

“갈지어다.”는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북한, 아랍 지역 모두가 영적으로 열악하고 힘든 곳이다. 내 나라에서도 열악한 곳에는 가기 싫은데 남의 나라, 특별히 힘든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소명은 목사, 선교사,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 말씀을 보는 나, 기도하는 나에게 주신 부르심이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30대부터 선교헌금을 드렸다. 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남편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던 때였는데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아낌없이 드렸다. 내 열심으로 앞서가지 않고 환경에 순종하여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기도했더니 점점 지경이 넓어졌고, 이제는 교회를 통해 세계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

오늘 주님께서 “갈지어다.” 하시는 그곳이 어디인가. 멀리 중국, 아프리카가 아니어도 좋다. 말이 통하지 않는 배우자, 힘든 시댁, 너무 가난하고 초라해서 외면하고 싶은 형제, 친척… 그들을 찾아가는 것이 이리 가운데 가는 것과 같을지라도 주님의 명령이기에 주님이 책임지신다. 열악하고 무시 받는 환경, 소외된 그곳에서 주님의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

 

 

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우리나라처럼 종교성이 많은 민족이 없다고 한다.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기복 신앙이 저절로 바탕에 깔려서 하나님을 믿어도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믿고 싶은 것이 우리 신앙의 본성이다. 아마도 유난히 한과 설움이 많은 우리 역사의 굴곡도 그런 기복성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한 민족 간의 전쟁, 또 전쟁 이후 겪어야 했던 가난과 기근과 이산의 고통 속에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찾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많은 풍요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리고 아시아의 용으로 불리며 위력을 떨치던 한국의 급성장에는 한국 교회의 성장도 함께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양적 성장의 이면에는 말씀으로 거듭남이 없이 여전히 복(福)만 부르짖는, 물질을 우상화하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그릇된 신앙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망하기 직전,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 이사야 같은 선지자를 허락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호소하신다. 이제라도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땅에 거하게 하리라(렘7:7)고 하시는데 기복 신앙에 젖은 이스라엘은 “우리가 망하긴 왜 망해?” 하면서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여호와의 전에 거하고 있노라고(렘7:4), 나는 교회 잘 나가고 십일조 잘 내고 있다고 그래서 회개할 것이 없다고 부르짖는다.

 

지금의 우리 모습과 너무 똑같지 않은가? 선교사 파송수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 1000만이 넘는 크리스천, 세계가 주목하는 대형 교회들이 존재하는 나라이지만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망하기 직전의 이스라엘과 너무도 닮아있다.

고난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교인이 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또 말씀으로 죄를 지적하고 환경에 순종하라, 십자가 지라고 하면 교인이 아무도 남지 않는다고 씁쓸한 소리가 들린다. 선교세미나, 전도세미나는 아무리 홍보를 해도 자리가 안 채워지지만 자녀교육 세미나, 입시생을 위한 기도회는 홍보를 따로 하지 않아도 자리가 넘쳐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할 수 없고 옳은 소리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멸망 직전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강조하며 복 받기만 구하는 설교는 거듭남이 없어도 들을 수 있는 설교다. IMF라는 국가적 고난, 올 한해 아프간 사건 등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타락을 꾸짖으시는데 여전히 ‘복 주시는 하나님’만 외치는 무익한 거짓말에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된다.

예레미야와 이사야 선지자가 목숨을 걸고 멸망을 부르짖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뤄주실 회복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서의 결론은 멸망-포로-회복이다. 우리를 돌이키시려고 멸망과 포로의 시기를 허락하시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용서와 화해와 평안을 회복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 계획을 신뢰하기에 고난과 십자가 설교, 멸망과 포로의 메시지도 축복으로 받는 것이 성도의 특권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중다한즉 더욱 이 땅으로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라고 믿고 있을 때, 에스겔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겔33:24~25)고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

숫자적으로 중다(衆多)하다고 하나님의 기업을 받는 것이 아니다. 대형교회가 많다고, 선교사 파송을 많이 한다고, 크리스천의 수가 많다고 이 나라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과 이 나라를 영적 기업으로 받기 위해 구해야 할 것은 양적 축복이 아닌 영적인 회개와 돌이킴이다.

 

예수 믿는 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내 안에 진정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성경을 통해 복에 대한 개념이 거듭나고, 성경적 가치관으로 삶이 변화되는 나 자신의 개혁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나의 모든 삶이 예수를 전하는 본보기가 되는 것이 진정한 종교 개혁이고, 사회 개혁이다.

 

 

얼마쯤은 감추고 싶은 욕심

 

교회 일군인 어느 집사님에게 갑자기 땅이 생겼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벌써 수년이 지났는데 전혀 모르고 있던 땅이 자식들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평소 돈이 생기면 건축헌금을 하기로 서원했던 집사님은 자기 몫을 팔아서 헌금을 드릴 생각이라고 남편 집사님에게 의논했다. 그런데 당연히 찬성할 줄 알았던 남편이 ‘지금 그 땅을 팔아서는 안 된다. 가지고 있으면 땅값이 오를 텐데 그 때 더 많은 헌금을 드리면 좋은 것 아니냐’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왔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으로 건축헌금을 하게 됐다고 기뻐하던 집사님의 마음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땅 값이 많이 오르면 내가 과연 다 드릴 수 있을까? 감추고 싶을 것 같았다. 이 시점에서 기다려서 ‘더’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더’ 많이 기뻐하실까? 이런 갈등으로 돈이 없을 때보다 고민이 늘어났다.

사도행전 5장에는 유명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초대교회 당시 모두가 어렵던 시절에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통용하며 서로를 돕고 살았다. 그런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들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는데 다 드리지 못하고 얼마를 감춘 것 때문에 부부가 함께 징계를 받은 것이다.(행5:1-11) 그런데 바로 그 앞 4장 마지막을 보면 레위족인 요셉이 밭을 팔아서 드린 일이 나온다.(행4:36-37) 요셉은 사도들에게 바나바(권위자)로 일컬어지는 훌륭한 지도자인데 그런 사람이 밭까지 팔아서 헌금을 드리니 더욱 많은 이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후에 바로 아나니아가 자신의 소유를 판 것은 바나바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베드로는 땅값 얼마를 감춘 아나니아의 행위가 그의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매섭게 질책한다. 헌금을 드리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사단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고 동기가 순수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바나바를 보면서 아나니아도 그만큼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비교와 시기심이 동기가 되어 헌금을 드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속이는 무서운 죄를 짓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돈이 없을 때는 괜찮다. 아무 것도 없을 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돈만 주시면, 사업만 잘되게 해주시면, 취직만 시켜주시면, 이번에 대학에 합격만 시켜주시면’ 얼마든지 헌금을 하고 주의 일을 하겠다고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막상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저절로 ‘얼마를 감추매’ 이렇게 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으로 돈과 성공을 구했다면 어떤 것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기에 자꾸 얼마를 감추고 싶어진다. 늘 ‘조금 더’를 외치면서 돈이 ‘조금만 더’ 생기면, 대학에는 들어갔지만 취직이라도 하고 나면 그 때 드려도 괜찮다고, 그 때 더 많이 드려야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거라고 합리화한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하나님이 결코 속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정말 무서운 합리화로 내 자신을 속일 수 있을 몰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속지 않으신다. 기도와 예배를 드리고 헌금과 구제를 할 때 내 마음이 사단의 통치를 받는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지 하나님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100%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은 은혜 중의 은혜다. 내가 감추고 싶은 시기심, 감추고 싶은 욕망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그것을 낱낱이 드러내셔서 아나니아나 삽비라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돌이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다.

그 사랑에 의지하여 내가 감추고 있는 것들을 주님께 돌려드리자. 얼마쯤은 내가 누려도 되겠지 하는 사단의 마음을 속히 벗어버리자. 하나님 앞에 투명해져서 진정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이 가을을 풍성하게 할 최고의 열매요 최고의 선물이다.

 

 

능력의 기도

 

구약시대 개혁자인 느헤미야는 느헤미야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하가랴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하가랴’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방해하셨다’는 뜻이다. 느헤미야가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것은 아버지 하가랴로 인해 인생이 막힌 것 같았지만 사실은 ‘여호와께서’ 막으신 것임을 인정하는 그의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한다. 하는 일마다 막히고 되는 일이 없는 ‘하가랴’를 거쳐, ‘여호와의 위로’라는 뜻의 ‘위로자(慰勞者)’ 느헤미야가 세워지는 것이다.

 

나에게 ‘하가랴의 간증’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된다. 느헤미야는 왕궁의 관원으로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훼파된 고향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고는 슬피 울며 금식했다. 스스로 힘든 하가랴의 때를 거쳤기에 유대 땅에 있는 형제들과 같은 마음으로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아프간 피랍 사건으로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결코 남의 일로 여길 수 없는 훼파된 소식이 뉴스와 신문을 통해 전해진다. 안타깝고 힘든 상황이지만 그런 중에도 느헤미야와 같은 위로자가 있어 힘을 얻게 된다. 자신보다 다른 자매를 보내 달라고 석방의 기회를 양보한 이지영씨, 청년들의 영적 아버지로 사명을 다하고 간 배형규 목사님, 장애 어린이를 돌보며 섬김의 본이 된 심상민 형제가 그들이다.

 

하나님의 전을 세우기 위해 왕궁에서 누리는 개인의 형통을 버리고 훼파된 예루살렘으로 달려간 느헤미야처럼, 각자의 형통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헌신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형통을 구한 이 시대의 참된 위로자라 할 수 있다.

느헤미야가 형제의 어려움 앞에서 간절히 기도한 내용은 ‘나와 나의 아비 집이 심히 악을 행하여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느1:6-7)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힘든 상황을 논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과 선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다. 자신의 능력이나 의로움이 아니라 주의 계명과 주의 언약으로 인해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간구했다.

150년 가까이 훼파된 채로 있던 예루살렘 성벽이 느헤미야의 도전으로 52일 만에 중수되었다. 훼파된 사람들, 훼파된 환경을 회복시키는 능력의 기도는 내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기도다.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다.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성경을 읽지 않고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렸다고, 내가 기도를 소홀히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신30:2-3).

 

전심으로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 포로로 흩었던 자들을 모으신다. 이 일이 육적 포로로 사로잡힌 피랍자들 뿐 아니라, 영적 포로로 세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떠났던 자들도 모으시는 구원의 사건임을 믿는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탈레반까지도 주의 긍휼로 모으시는 사건임을 믿는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영적 시선으로 바라본 느헤미야가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일어나서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다. 아프간 피랍 사건으로 많은 질타가 쏟아지고 눈에 보이는 손실이 있을지라도, 이 일이 엄청난 구원의 사건이 될 것을 믿는 믿음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육신의 성전이 무너질 때 영적 성전이 세워진다. 온 나라와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가 보여줄 것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영적 성전을 세우는 것이다. 세상이 놓지 못하는 형통을 내려놓고 세상이 가지 않는 좁은 길로 가는 것이 결국은 온 나라와 교회, 온 세상을 살리는 길임을 보여주기 원한다. 기독교인들을 본적이 없는 탈레반에게 피랍인들이 두려워말고 눈빛으로, 행동으로 사랑을 전하기를 기도한다. 그것을 위해 같은 마음으로 울고 금식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을 믿는 우리 또한 이 시대의 진정한 위로자로 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권사님의 치마바람

 

서른을 넘긴 B권사님의 아들이 주말에 선을 보고 왔단다. 키도 크고 예쁘고 직장 좋고 믿음도 좋은 자매라고 한다. 권사님이 바라던 며느릿감이라 아들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아들의 화를 돋울까봐 물어보지도 못했다. 사실 권사님의 아들은 자매와는 전혀 딴판이다. 교회도 안 다니고,술과 담배에 절어 살고,무슨 말만 하면 소리를 지르는 30대 반항아에 ‘엄마처럼 교회 다니는 여자하고는 절대 결혼 안 한다’고 공언하는 불효막심한 아들이다. 남의 말이 아니라 엄마인 권사님의 솔직한 표현이다.

 

선을 보고도 아무 말 없는 아들이 괘씸해서 잠을 못 이루다가 권사님은 상대편 자매를 생각했다. 그렇게 예쁘고 신앙도 좋고,아들보다 학벌도 좋은 자매가 내 아들과 결혼할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아들은 불신결혼 안 시킨다고 하면서 그 자매가 불신결혼하기를 바라고 있구나. 자매가 내 딸이라면 이런 아들과 결혼시키겠는가.’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권사님은 아들에게 가서 이렇게 고백했다. “믿음도 없는 너에게 믿는 여자만 만나라고 한 것은 엄마의 욕심이다. 신앙도 조건도 너보다 나은 사람과 맺어지길 바란 내가 죄인이다. 내 욕심을 내려놓을 테니 너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라. 안 믿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해도 너를 믿음으로 키우지 못한 엄마의 책임이다. 그래서 고통이 따른다면 거룩을 위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주’께 절하며 “주의 나라에서 주의 보좌의 우편 좌편에 앉혀 달라”(마20:21)고 했던 세베대 아들의 어머니가 ‘치맛바람’의 원조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적어도 세상 출세는 구하지 않는다. 입만 열면 ‘주의 나라,주의 보좌,주여,주여’ 하면서 자녀가 성경 읽고,교회에서 봉사하고,믿음의 배우자 만나기를 기도한다. 물론 그것도 구해야 하지만 자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내 욕심부터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명목으로 자식을 달달 볶는 부모 때문에 자녀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권사님의 고백을 듣고 난 다음날 아침,그 아들이 권사님께 말했다. 소개 받은 자매가 마음에 들어서 계속 만나고 있다고, 그런 신실한 자매를 만난 것이 엄마의 기도 응답이라고 했다. 권사님은 아들이 ‘기도 응답’이라는 단어를 쓴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한다. 이제는 아들이 구원받고 스스로 믿음의 결혼을 하도록 기도한다고 했다. 부모의 욕심을 내려놓을 때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내 아들 딸에게 목숨 걸지 말고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섬기는 것이 자녀를 으뜸으로 키우는 고품질 고등 교육이다.

 

 

11시에 부름받은 아들

 

S집사님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는 기술이 있었지만 일년의 절반은 놀면서 지냈고,어머니가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어머니의 고생과 가난이 아버지 탓이라는 생각에 집사님의 마음에는 분노가 자리잡았다.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자수성가를 이루다시피 착한 아들로 살았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결혼 후 태어난 아들에게 쌓였던 분노가 쏟아진 것이다.

모든 면에 능력 있는 아들이라고 생각했으나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집사님은 ‘네가 구실을 제대로 해야 내가 너를 대우해주겠다’고 쉴 새 없이 밀어붙였다. 하지만 아들은 점점 곁길로 가더니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낙오자가 된 것 같은 아들을 보면서 집사님은 몇 년 동안 지옥을 살았다고 한다. 자신은 힘든 환경에서도 열심히 노력해서 이만큼 이뤘는데,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 용납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아들이 보기 싫어서 군에 자원입대까지 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통해 자기 죄를 보게 되었다. 아버지에게는 착한 아들로,아들에게는 능력의 아버지로 대하면서 분노와 정죄만 쏟았던 자신의 죄를 깨달으니 아들의 해맑은 영혼이 보였다. 입대 전날 “아빠,엄마,미안해”하고 울먹였지만 반응하지 않았던 자신을 생각하며 S집사님은 아들의 영혼을 죽인 이 죄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고백했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면 영시에 부름 받은 자들은 열한시에 부름 받은 자들과 똑같은 품삯을 받는다고 불평을 한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영시에 온 자들이나 열한시에 온 자들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열한시에 부름 받은 자들은 똑같이 아침부터 장터에 나갔지만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열한시까지 서 있었다고 했다. 일찍 부름 받은 자들은 이미 인정받아서 이땅에서 상을 받았다. 열한시까지 써주지 않았던 자들은 마음이 가난해져 있기에 감사할 것밖에 없고 불평할 겨를이 없다. 공평하다.

일하고 싶어도,열심히 살고 싶어도 어떻게 할 줄 몰라 서성이는 ‘열한시’ 배우자,‘열한시’ 자녀가 우리에게 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네가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에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우리는 몰아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도 뜻을 품고 계신다. 영시에 부름 받았다고 박수 받을 것도 없고, 열한시에 부름 받았다고 무시할 것도 없다. 일을 더하든 덜하든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지 내가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 주님이 주시는 구원 자체가 가장 큰 상급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버리는 사랑

 

얼마 전 형부를 떠나보낸 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형부가 떠나기 전부터 약하게 증상을 보이더니 병세가 뚜렷해져서 당장 언니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조카들이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고 언니의 간호는 내 몫이 되었다. 억지로 떠맡은 것이 아니라 딸 넷의 막내로, 아들 없는 친정에서 아들 노릇을 하다보니 내 문제로 여겨지는 것은 항상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나 역시 24시간 언니를 돌볼 처지는 아니어서, 기도하며 방법을 구하던 중 기독교 요양원을 소개받고 언니를 입소시키게 되었다. 조카들 및 본인과 의논해 입소를 결정했지만 나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언니이고 오랫동안 형부 병 수발로 지친 언니를 보내자니 마음이 짠했었다.

어느 집에서는 혼자된 어머니의 즐거움이 오직 교회 가는 것이라서 교회 가까운 곳에 집을 따로 얻어드렸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늙은 어머니를 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목사인 내가 아픈 언니를 요양원에 보냈다고 형제를 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주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고 하신다. 우리가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주님의 이름을 위해 기도하지만 기도하면서 집,전토,부모,자식을 버리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리어 집과 전토와 내 가족을 얻게 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다. 그래서 ‘내 이름’을 위하여 자녀를 키우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도와준다면 그것이 무책임하게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버린다’는 것은 ‘맡긴다’는 뜻이다. 내가 책임지기 싫어서 가족을 버리고, 집과 재산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가족을 버리는 것은 내 욕심으로 했던 가족 사랑을 버리는 것이다. 나와 집안의 이름과 체면을 위해 정성 바치는 사랑이 아니라 영혼 구원을 위한 가족 사랑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버렸을 때 내가 얻는 최고의 보상은 버린 그들이 영생을 상속하는 것이다. 즉 구원이 되는 것이다. 언니는 요양원 생활이 너무 좋다고 한다. 증세가 약한 편이라 다른 노인들을 돕기도 하고 ,매일 기도하고 예배드리니 어느 때보다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찾아가서 만나도 얼마나 편한 얼굴로 맞아주는지 욕심 없이 살아온 언니의 삶이 그 표정에 담겨있다. 누구보다 언니를 사랑하는 동생이 도울 수가 있음에도 항상 도움을 거절하던 언니,20년 넘은 냉장고에 석유 곤로로 살림을 하던 언니의 소박한 천국이 최고의 유산으로 상속되고 있다.

 

 

부자청년이었던 나

 

나이 서른에 주님을 만나고 거듭나기 전까지 나는 그저 ‘출석 교인’이었다. 4대째 모태신앙으로 어려서부터 교회 반주자를 하고,주일을 빠짐없이 지켰어도 신앙의 기쁨을 몰랐다. 그 당시 주로 공부 못하고 코 흘리는 아이들만 교회에 있는 것 같아서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고 예배 반주만 하고는 얼른 집으로 와버렸다. 그러면서 나는 모태신앙이고, 나는 교회를 섬겼고,나는 주일을 지켰다고 부르짖었다. 모든 계명을 다 지켰으니 나 같은 사람이 천국에 가리라고 생각한 부자 청년(마 19)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

이렇게 부자 청년 같은 내가 부자 청년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으니 주님이 사랑하사 그 결혼을 용광로 같은 훈련의 장으로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 역시 장로님 집안 아들로 성실하고, 의사이고, 돈을 버는 만큼 헌금도 하고, 부모님께는 효자요, 자기 식대로 부인 사랑과 자식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자기 성실함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명을 다루는 의사임에도 낙태수술을 했었다. 정기적으로 간기능검사를 했음에도 급성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무의식적인 죄의식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옆에 있던 나 또한 그 스트레스를 받아내기가 힘들어 나의 모든 의로움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하셨다. 착한 며느리, 착한 아내로 인정받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회개하며 남편의 구원을 위해 생명을 내놓고 기도했을 때 의사인 남편이 그토록 장담했던 건강을 치심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허락하셨다. 병원 일로 주일을 지키지 못한 남편이지만 숨을 거두기 전 목사님께서 “오늘 주님께서 부르신다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 이름으로요”하고 정확한 대답을 했다. 나와 가족 친지들 앞에서 그 동안의 낙태의 죄를 눈물로 어린아이처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며 천국의 평안을 보여주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던 부자 청년은 “네 소유를 팔아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다(마 19:22). 힘든 결혼생활과 갑작스러운 암 사건이 없었다면 남편도 나도 예수님을 떠났을지 모른다. 알맞은 재물로 알맞게 교양있게 살다가 영생을 놓쳤을지 모른다. 지금의 내가 있게 한 원동력은 능력과 성실함의 세상 부자였던 남편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곤고함으로 주님을 진실하게 영접한 남편의 모습이다. 나 또한 힘도 자랑도 없는 추하고 약한 내 모습 이대로, 날마다 아버지 품을 파고드는 천국의 어린아이가 되고 싶다.

 

 

 

하나님께서 짝 지워 주신 부부

 

세련된 외모에 성품도 밝은 자매가 건장하게 잘 생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런데 몇 달도 안 되어 남편에게 이미 결혼한 경력이 있고, 자신이 맡아야 할 딸까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젊은 나이에 이혼을 감행했고, 얼마 안 되어 부잣집 막내아들을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좋은 집에서 아들도 낳고 원하던 행복을 얻은 것 같았지만,두 번째 결혼은 피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부모의 도움으로 살면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남편은 가정은 돌보지 않은 채 밖으로 돌았다. 압력밥솥이 터져 온몸에 화상을 입고 수없이 피부 이식 수술을 받으면서 시아버지의 중풍을 10년 동안 대소변을 받아내며 수발했다. 그리고 어느 날 자매는 이미 치료가 늦었다는 간경화 판정을 받았다. 본인의 병 때문에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시아버지의 병간호를 했지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다. 더 이상 자매가 할 일도 없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매를 책임지기 싫었던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듯 그 자매는 담담하게 이혼을 해주었다. 이혼한 후에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자매는 얼마후 40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남편은 장례식에서도 병원비는 형제들에게 부담시키고 부조금만 챙겨갔다.

 

이렇게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겪고 병으로 죽어간 자매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까지 자매를 외면한 남편을 보며 아들의 엄마로,며느리로 시아버지를 그렇게 모셨는데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자매가 그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다른 가족도 믿음으로 인도했기에 그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일 년 후에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자매가 죽은 후 죄책감을 느낀 남편이 자매가 다니던 교회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양육을 받아 신학교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매가 하나님을 몰라서 악한 길로 가는 남편에게 끝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갔기에, 소망이 없어 보이던 그 남편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짝지워주신 부부란 이런 것이다. 육적인 배우자의 사랑을 못 받고 행복을 누리지 못해도,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자매의 남편이 변화된 것처럼 내가 죽은 후에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믿고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할 때 어떤 사람도 어떤 어려움도 ‘나눌 수 없는 부부’로 구원의 한 몸을 이룰 수 있다.

 

 

날마다 용서

 

우리 교회 M집사님에게는 똘똘한 둘째 딸이 ‘블루칩’이라고 한다. 둘째 딸만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기쁘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예쁜 딸 때문에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저녁 시간,친구와 함께 집에 돌아온 딸이 밖으로 놀러나가겠다고 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에 있으라고 하는데 딸은 집사님을 뿌리치면서까지 외출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딸의 친구가 자기 집에 전화를 하더니 ‘우리 엄마가 못 가게 하신다’면서 금세 순종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딸은 머쓱해져서 방으로 들어갔지만 집사님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딸의 친구는 엄마의 말 한 마디에 수그러드는데,그 친구가 보는 앞에서 팔까지 뿌리치며 자신을 거역한 딸이 용서가 안 됐다. 방으로 들어가서 불같이 화를 내고,때리고,반성문을 쓰게 하고,한 달간 컴퓨터 사용금지,친구 집 방문 금지로 벌을 주었다.

어느 남자 집사님은 집에서 부인이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해도 전혀 상처를 안 받는다고 했다. 부인이 자기보다 학벌도 지식도 부족하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느낌이 안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젊어서 대기업 직원으로 있을 때 어느 선배가 농담처럼 ‘아무개씨, 머리가 나쁜 거 아니야’ 그랬는데 그 때의 상처가 아직도 용서가 안 된다고 한다.

내 말을 무시하는 가족 ,사소한 농담 ,이런 것 때문에 우리는 서로 용서를 못하고 원수된다. 그런 일은 잊혀지지도 않아서 당시 상황과 표정과 말투를 되새겨가며 스스로 더 상처를 키운다. 그래서 생각하면 할수록 용서 못할 원수가 가정과 직장에, 심지어 교회에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횟수가 아닌 무한대의 개념이다. 내가 힘들게 용서했는데 상대가 변하지 않더라도 끝까지 인내하고 용서하라는 것이다. 용서의 과정이 중요한 것은 상대를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나 자신의 죄를 깨닫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 작은 일에,사소한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내 속의 열등감과 교만을 발견하게 된다. 딸을 무섭게 야단친 집사님도 ‘남편이 무시하는 것도 서러운데 너까지 날 무시해?’하는 쌓인 분노가 있음을 깨달았다.

일흔 번씩 일곱 번,상대를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나야말로 용서가 필요한 대상임을 알게 된다. 그런 나를 용서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누구도 용서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용서하고 용서받을 일이 있다는 것은 내가 성숙해지는 축복의 훈련이다.

 

 

살인미소 집사님

 

우리 교회의 ‘살인미소’ L집사님의 아들이 대학 수시모집에 합격했다. 10년 동안 가사 도우미를 하면서 어려움도 많았는데 얼마 전엔 새 아파트로 입주하더니 아들까지 턱하니 대학에 붙어줬다. 드디어 ‘고생 끝 행복 시작’인가 하고 모두가 부러워하지만 집사님의 감사는 새 집과 대학 합격에만 있지 않았다.

집사님이 10년 동안 가사 도우미 일을 한 것은 명문대를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온 대학 강사 남편의 수입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활비가 적게 드는 산동네로 이사를 하고 남편은 우유배달,집사님은 가사 도우미로 열심히 살았다. 어려워도 빚을 지지 않았고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 가자’는 우리들교회의 적용을 누구보다 열심히 실천했다. 또 큐티모임과 예배를 위해 일주일에 이틀은 일을 하지 않고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다. 어린 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고 항상 웃는 모습이 얼마나 푸근한지 ‘살인미소’라는 별명까지 얻은 것이다.

 

하지만 박사 학위까지 가진 엘리트 남편은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지식 때문인지 아무리 권고하고 전해도 듣지 않았다. 교회 목자로 바쁜 집사님과 딸을 핍박하면서 눈물을 쏟게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드디어 그 남편에게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새 집을 구경한다는 명목으로 목장식구들이 집에 찾아갔다가 남편에게 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 아내는 청초한 여자예요.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남편에 비해 학벌도 부족하고,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타박도 많이 들었는데 남편은 이미 집사님을 인정하고 있었다.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 성실함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얻어낸 것이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형제에게 가서 권고하고,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고 하신다(마18:17). 하지만 듣지 않는 형제가 내 남편,내 자녀일 때 어떻게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겠는가. 아무리 안 들어도 우리는 권고하고 또 권고할 수밖에 없다. 구원을 위한 사랑으로,끝까지 사랑할 자신감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한 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흔 아홉 번 기도하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때 당장은 아니어도 이방인 같은 내 식구들이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10년이 걸렸지만 L집사님의 남편도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우리의 기도제목인 식구들을 교회에서 만날 그 날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나도 마음이 설렌다.

 

 

겨자씨 순종이 산을 옮긴다.

 

컴퓨터 수리와 부품 판매업을 하는 S집사가 차를 바꿨다고 한다. 사업이 잘 돼 새 차를 장만한 줄 알았는데 주일에 보니 새 것도 아닌 중고 경차를 몰고 왔다. 사연인즉 그동안 형편이 어려워 세금을 못 내다 타고 다니던 차를 공매로 넘겨 밀린 세금을 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세무서에서 독촉이 오면 ‘돈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야. 사업 면허를 취소할 테면 하라지.’ 이런 마음이었다. 떼어 먹으려는 게 아니라 없어서 못 내는 것이니 아무 죄책감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서 ‘돈이 없는 게 자랑은 아니지 않은가. 사업을 하는데 돈이 없는 것도 내 삶의 결론인데 책임을 져야 되지 않을까’하는 부담이 생겼다.

당장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고민이 됐다. 세무서 직원이 차를 공매로 넘겨보라고 했지만 컴퓨터 기기나 부품을 싣고 다니려면 차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중에 로마서 묵상을 하다가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롬13:6)는 말씀에 찔림을 받고 차를 공매에 넘기고 중고 경차로 바꾼 것이다.

사회의 일원으로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금이나 공과금, 과태료 내는 것을 아까워하고 어떻게든 안 내려고 애를 쓴다.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세금을 투명하고 정확하게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공과금, 세금 문제에서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큰 일도 믿고 맡길 수 있다.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말씀하신다. 태산 같은 빚, 태산 같은 질병, 태산 같은 자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산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40일 금식하고 작정 기도를 하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외치면 옮겨질까.

산을 옮기는 것은 산만큼의 믿음이 아니라 겨자씨만큼의 믿음이다. 먼저 겨자씨만큼의 사소한 일부터 순종할 때 태산 같은 문제들이 해결된다. 겨자씨가 산보다 대단한 이유는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죽어지고 썩어져서 싹이 나고 나무가 되면 산이 옮겨지는 것이다. 즉 실천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세금과 공과금 잘 내고 말 한 마디도 친절하게 하는 것, 건강 음식을 챙기지 않아도 세 끼 식사에서 절제하는 것, 그 일들이 사소한 것 같아도 그 사소한 일에 순종하는 본을 보일 때 산처럼 끄떡도 안 하던 식구들이 변화되고 전도가 되는 것이다.

 

 

이혼의 선택

 

지난 주말,쉽지 않은 결혼식 주례를 섰다. 마흔을 넘긴 신랑과 신부는 각자 이혼의 상처를 가진 재혼 커플이다. 서로 데리고 온 아이들도 있으니 쉬운 만남은 아니었을 텐데 우리들교회에 와서 온 식구가 양육을 받고 공동체의 축복 속에 정식 부부가 되었다.

평신도 시절부터 20여년 사역하는 동안 내가 목숨 걸고(?) 외친 것이 있다면 ‘이혼 불가,불신결혼 반대’였다. 하나님께서는 외도와 경제 문제 등으로 이혼을 결심했던 사람들이 큐티 모임에 와서 말씀을 들으며 다시 합쳐지는 것을 수없이 보여주셨다. 그래서 어떤 것보다 가정을 회복시키는 것을 절체절명의 사명으로 알고 걸어왔다. 그러나 ‘이혼 불가’라는 것을 흑백논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혼을 안 해야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이고,이혼하면 죄인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어느 집사님의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상처 많은 남편을 만나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는데,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까지 두고 남편은 나가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요구를 하다 못해 ‘이혼 안 해주면 죽어버리겠다’고 날마다 자살 25일전,20일전,2일전이라고 위협하며 마지막으로 죽겠다고 아이들 보러 왔다. 그날 집사님은 남편에게 “석 달만 교회에 와 달라. 그 후에도 이혼을 원한다면 해주겠다”고 했고 남편은 약속대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었다.

문제는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전해도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을 결코 돌이키지 않는 대제사장 서기관처럼,석 달이 다 되었는데 이혼 결심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임 당하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처럼, 남편이 석달이나 복음을 들은 것을 감사하며 이혼을 당하기로 작정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드물지만 오직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 이혼을 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것이 남편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일 수도 있다.

절대 안 해야 하는 이혼이지만 이혼을 안 하는 것 자체가 우상이 되고 내 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말씀대로 인도받으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변화된 나를 보고 상대방이 마음을 돌이킬 수도 있고 여전히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혼을 하건 안 하건 그 목적이 영혼 구원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구원을 위한 선택을 할 때 이혼한 사람도, 재혼한 사람도 성공한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아무쪼록 그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도한다.

 

 

동성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동성애를 남의 나라 이야기로 생각하거나 연예신문의 가십거리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들교회만 해도 동성애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다.

고등부의 한 남학생은 직접적인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동성인 남자 아이들을 좋아하고 끌린다고 했다. 여자 선교사님 한 분은 중학교 때 여자 담임선생님에게서 성폭행을 당하고 그것이 지속적인 관계로 이어져 무력감과 방황에 시달렸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힘들어하면서도 그 여자 선생님에게 배신까지 당하고 가출과 자살 시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 동성애 고백이 이어지니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식구들의 동성애사연이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직 동성애를 끊지 못한 채 교회에 나오고 있는 지체들도 있다. 죄 인줄 알면서도 끊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하고,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래도 교회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소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들 교회에만 있겠는가. 다른 곳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문제를 우리는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뿐이다. 인간의 죄를 언급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 사함도 전할 수 없다. 먼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죄를 고백하고 드러내야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로마서 1장에 등장하는 21가지 죄의 목록에서 사도 바울은 제일 먼저 성 범죄를 언급하고 그 중에서도 동성애에 대해서 두 절이나 기록하고 있다. 그 때 뿐 아니라 지금 세상에서도 동성애가 가장 심각한 죄로 여겨지는 것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죄가 아닌 개인적인 기호(嗜好)의 문제로 합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에 걸려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치료할 기회를 놓치고 죽어가는 것처럼 동성애를 죄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우리의 자녀, 배우자, 형제들이 쉽게 동성애에 노출되고 있다.

남의 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도 동성애로 병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을 고치고 돌이키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교회가 그들을 품어야 한다. 죄를 죄로 인정하고 고백할 때 죄의 세력은 힘을 잃는다. 지금 동성애에 빠져있다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들고 나아가자. 나에게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고백하자. 그래서 개인의 선택에 의한 멸망 받을 자유가 아닌,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참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린다.

 

 

결혼의 벽

 

음부의 권세는 죄,슬픔,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결혼생활 20년을 맞는 엘리트 P집사는 하나님을 몰랐던 처음 11년 동안 이 모든 것을 겪으며 결혼생활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열심히 뚫었다고 한다. 첫아이를 낳은 후,남편은 걸핏하면 술에 취해 들어왔고,그 때마다 와이셔츠에 화장품 자국이 번져 있었다. 배신감을 견딜 수 없었던 집사는 그때부터 이혼의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날마다 “이혼하자”는 말로 남편을 괴롭히다가 드디어 법정에서 합의 이혼 판결까지 받고 왔는데 남편은 위자료를 못 주겠다고 했다.

능력없는 P집사는 “이혼해서 돈 없이 사느니 그냥 살자”고 주저앉았고 다른 방법으로 자살의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려고도 해보고,약도 먹어보고,술에 취해 운전도 했지만 결과는 죽음 대신 면허취소였고,죽기도 어렵지만 사실은 자신이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만 없으면…” 하는 생각으로 1년 동안 남편 죽이기 구멍을 뚫었다. 음주운전으로 두 번의 큰 교통사고도 났지만 차만 죽어서 오고 남편은 멀쩡히 살아왔다.“남편은 내 남자가 아니다. 생활비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보자.” 그렇게 자포자기의 구멍을 뚫고 나니 거기엔 사랑도 없고,싸움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사의 포기를 살아날 구멍으로 바꿔주셨다. 증권회사 직원이던 남편이 3일 만에 수십억 원의 돈을 잃고 사글세로 간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일생의 축복이 되어서 남편과 함께 말씀을 들으며 서로를 용서하고 지금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교회의 일꾼으로 부부가 함께 섬기고 있다.

왕하 25장,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을 때 기근을 견디지 못한 시드기야 왕은 성벽에 구멍을 뚫는다.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구멍을 뚫고 나왔지만 시드기야의 결말은 아들들이 목전에서 죽고,두 눈을 뽑히는 처참한 죽음이었다. 우리의 결혼생활도 숨조차 쉴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로 둘러싸여 있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어서 이혼으로,가출로,쾌락으로 구멍을 뚫어보지만 거기에는 가정의 파괴라는 슬픈 결말만이 있을 뿐이다. 돈이 우상이고,배우자와 자녀가 우상이고,출세가 우상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고난이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으로 구멍뚫기 그만하고 예배와 큐티와 기도로 음부의 권세를 뚫고 나가자. 나 혼자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살아날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다.

 

 

소망으로 포장된 야망

 

어려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가난한 환경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섬긴 사모님이 있다. 학교에서 무시당하고 엄마에게서조차 예쁘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교회에 가니 예뻐해 주었다. 새벽·철야기도를 빠지지 않고 하교길에도 교회에 들러 기도했다. 믿음이 좋다는 소리를 듣게 되니 교회에서 가장 인정받는다고 생각한 사모가 되고 싶었다.

그 후 구원의 확신이 있어 보이는 남편을 만났는데 남편은 꿈대로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는데 말씀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교회도 안 가고 사역도 안 하고,돈도 안 벌고 365일 집에 있으면서 사모님을 정죄하고 비판했다. 나가서 돈을 버는 사모에게 냉장고 검사, 청소 검사, 복장 검사를 하며 “여자가 이게 뭐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도 남편에게는 “당신이 말씀 보고 기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써주실 것이다. 모세도 40년 훈련받고 쓰임받았는데 당신도 지금 훈련받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모님은 남편이 미웠다고 한다. 겉으로는 남자가 아닌 목사가 되기를 강요하면서, 속으로는 사역도 안 하고 돈도 안 벌면서 잔소리만 하는 남편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미움과 무시로 지옥을 살다가 큐티모임을 찾은 사모님은, 말씀을 들으며 남편과 자신의 실체를 깨달았다고 한다. 마태복음 20장22절, 자기 아들들을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혀달라고 구한 세베대 아들의 어미의 기도가 ‘소망이 아니라 야망’이라는 메시지가 사모님을 찔렀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목사와 사모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는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남편에게 가장 역할,남자 역할에 대한 면죄부를 주었다고,모든 것이 남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은 야망 때문임을 인정하게 됐다.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목사가 아닌 가장과 남편과 아버지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사모가 아닌 아내의 자리부터 찾겠다고 한 사모님의 결단처럼 각자의 우선순위의 역할에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사역이다.

주님은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다(마16장). 외적인 포장과 합리주의로 다가오는 누룩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날마다 말씀으로 내 속의 것을 분별해야 한다. 신학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며 환경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야망을 넘어선 소망으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

 

 

77세 할머니의 소원

 

지난주에 77세 폐암 말기의 할아버지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에어컨도 없는 우리들교회 예배를 드리러 오셨다. 집사님은 52세에 아들의 전도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본인의 표현으로 ‘희미한’ 믿음이었지만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읽고,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구역 모임도 인도했다. 신약성경을 옮겨 쓰자는 권면이 있을 때는 고혈압과 디스크로 몸이 불편한 데도 붓글씨로 성경 구절을 정성을 다해 옮겨 썼다. 그 과정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디스크 증상이 사라지는 응답을 받고,필사 경진대회에서 2등을 하고 기독교 방송에서 간증도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기도응답도 받고,간증도 하셨지만 막상 집사님이 폐암 선고를 받고 죽음이 가까워지니 천국이 믿어지지 않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은 확실한 믿음으로 천국에 입성하는 것을 보았는데 스스로를 돌아볼 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서지 않았다. 그런 중에 딸이 권해준 필자의 책을 읽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침실에서 부엌까지 가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대전에서 서울까지 찾아오셨다. 아들이 반대를 하니 혼자 기차를 타고 오면서 ‘대낮에 기차를 타고 가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구급차가 달려오지 않겠는가’하고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오신 것이다.

주일 예배 후 방으로 찾아온 집사님께 저를 따라서 기도하자고 하며 손을 붙잡고 기도 드렸다. ‘주님,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고 하셨사오니 이 시간 입술로 주님을 시인할 때에 천국의 확신을 주시옵소서.’ 한마디 한마디 따라하는 동안 성령이 역사하셨다. 이토록 가까이 있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였는가 하며,집사님은 이제 천국에 갈 확신이 섰노라고 기쁨과 감격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는 예정에도 없던 가족캠프에 참석하고 마지막 날에는 강단에 올라 그 동안의 간증을 들려주셨다. 집안에서도 움직이기 힘들었다던 집사님이 얼마나 가뿐한 모습으로 꼿꼿하게 서서 간증을 하시는지 암 환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77세,암 투병 중인 집사님의 간증은 죽음을 앞두고 우리의 소원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했다. 병이 낫고 오래 사는 소원이 아니라 천국의 확신이 없으면 자식,물질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생각하셨다는 집사님의 간절함이 우리의 소원이 되기를 기도 드린다. 나이도 질병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소원을 나의 소원으로 품고,그 응답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