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모음

깨어진 거울의 비상 외

열국의 어미 2010. 5. 14. 00:09

 

 

 

 

샘솟는 열정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땅에서 부유한 정도는 사람이라는 소중한 재산으로 계량할 수 있다.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중에서 그분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존재다. 하나님께 사람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투자 포트폴리오(portfolio)를 돌보는 목자다. 우리가 그 일을 잘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느끼신다.

 

나는 예전에 목사로서, 지금은 무디 신학교 교장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동안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어떤 사람들로 인해 엄청난 좌절을 느낀 적도 있었고 그들의 비판과 요구로 마음이 무너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답할 줄 알든 모르든 간에 나의 삶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날, 나의 영혼을 수렁에서 끌어올리는 새로운 열정이 샘솟던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 소중한 존재라면 그들은 내게도 소중한 존재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예수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며 최고로 만들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내가 그분을 도와 그 일을 함께 수행하기를 바라신다. 만일 귀찮고 힘든 사람들을 상관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만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종종 사람들만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은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열정의 회복」/ 조셉 스토웰

 

전도자’라는 말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과 동의어임을 알고 있습니까? 전도자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은 전도자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전도자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전도자임을 알고 전도의 사명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전도자와 자신이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전도와 상관없이 살고 있는 전도자, 두 분류의 전도자로 나뉠 뿐입니다.                            -이동원/ 지구촌교회 담임목사

 

● 복음은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생명 그 자체임을 알고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데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보살펴야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지도력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한계를 정한 헌신

어느 교회에서 넓은 예배당이 필요해 땅을 구입했는데, 그 땅에 허름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 건물을 고쳐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허물어 버리고 새로 지을 것이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건물을 고치는 비용에 예산을 조금만 더 들이면 새로 지을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결국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사를 시작하고 보니, 비용이 예상보다 자꾸만 불어났습니다. 이렇게 되자 성도들 사이에 큰 분란이 일었습니다. 신축 계획에 동조한 사람들이 신축을 강력히 추진한 사람들과 의견 충돌을 빚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새로 짓기 전에는 예의 바르고 인격적이던 성도들이 서로 대적하며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정확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해 놓은 한계 안에서만 헌신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한계를 정해 놓고 그 안에서만 헌신한다면, 그 사람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의 한계를 정해 놓은 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 기꺼이 드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헌신을 통해 이뤄질 하나님 일들의 가치가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가치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진정으로 회심하고 헌신한 제자입니까?

●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 필요한 질병이 있습니까? 예수님도 그것을 치유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김남준

 

 

복음의 수여자

한 복음 전도자가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마 3:10)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당신의 설교는 마치 범죄자들에게 하는 설교 같습니다. 그런 설교는 감옥에서나 어울릴 것입니다”라고 대응했다. 그러자 설교자는 “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감옥에서 설교한다면 그 본문으로 하면 안 되지요. 그곳에선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라는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율법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의 교만을 꺾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그들에게 새 소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사죄는 죄를 범한 자에게, 자유는 속박된 자에게, 눈을 뜨게 하는 일은 장님에게 필요하다. 인간이 죄를 범해 저주 아래 놓였다는 가정도 없이 어떻게 구세주를 생각하며 사죄의 복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나의 친구여, 이 말씀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당신 자신을 가치도 없고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로 여기는가? 복음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선포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용납하시고 당신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라.

「구원의 은혜」/ 찰스 스펄전

 

 

삶에 역사하는 말씀

나는 프리셉트 국제 본부의 창설자인 케이 아더(Kay Arthur)와 아침 식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삶에 주님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데 감탄하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당당히 승리하면서 결승선까지 도달할 자신이 있죠, 그렇죠?” 아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물론이에요!”라고 대꾸했다. 나는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죠?”라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아더는 곧바로 성경을 인용해 대답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 14~15). 나는 죄악에 묻혀 살던 삶이 너무 싫었어요. 남은 인생조차 그렇게 살 수는 없었죠. 이 말씀을 붙들고 울며 기도했어요. 다시는 죄 된 삶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고요.” 그러고 나서 아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내가 드린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 기도는 이뤄진 것과 다름없죠.”

 

나도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과거에 나는 방탕한 삶을 살았고 그 수렁에 다시 빠지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수렁에 빠지게 하시려면 차라리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수없이 생떼를 썼다. 그러나 아더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한 번 그렇게 기도한 후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없는 믿음」/ 베스 모어

 

 

C. S. 루이스의 초라한 죽음

내가 좋아하는 기독교 작가 중 한 명인 C. S. 루이스는 35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된 그날에 죽었다. 전 세계가 텍사스 달라스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런 이유로 1963년 11월 26일 잉글랜드 헤딩턴 쿼리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열린 루이스의 장례식에는 몇몇 사람만 참석했다. 30년 동안 루이스의 막역한 친구였던 조지 세이어에 의하면, 장례식에 왔던 조문객들은 대부분 루이스의 개인적인 친구들이었다.

루이스의 재산은 3만 7,772파운드(현재 원화로 약 7,600만 원)였다. 루이스는 작품의 수입금을 대부분 기부했고 집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 결과 루이스는 오랫동안 함께했던 집사 팩스포드에게 100파운드의 유산만 남겼다. 팩스포드는 얼마 되지 않는 유산 증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뭐, 재산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선생님은 돈에 대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분의 생각은 늘 높은 데 있었거든요.”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그렇게 초라하고 조용하게 팡파르도 없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루이스가 표현한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또 그의 생각이 ‘늘 높은 데 있었다’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타당한 면도 있다. 루이스는 이 세상만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이 온전한 상을 받게 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상 주시는 믿음」/ 게리 토마스

 

 

눈먼 딸과 눈먼 어머니

헤어진 사람들을 찾아 주는 에드워즈 세이더는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어린 시절에 고아원에 맡긴 클로디어라는 딸을 찾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수소문 끝에 시각 장애인 클로디어를 찾았고, 만남을 완강히 거부하는 클로디어를 어렵게 설득해 모녀 상봉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날 방문을 열자 파란 눈을 가진 여인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클로디어가 기어 나오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여인은 “네 목소리는 옛날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구나”라고 말했다. 그 말에 딸은 신경질적으로 “그만두세요”라고 소리쳤다. 여인은 일어나 “너를 찬찬히 보고 싶구나”라며 두 팔을 벌렸다. 세이더는 여인이 포옹하려는 줄 알고 딸을 그 앞으로 밀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파란 눈의 여인은 더듬더듬 딸의 얼굴을 만지기 시작했다. 딸이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그럼, 엄마도?” 어머니는 나지막한 소리로 “그래, 나도 너처럼 앞을 못 본단다.” 그 말을 듣자 딸은 울음을 터트리며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모든 원한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나와 똑같이 눈이 먼 엄마를 만나는 감격! 시각 장애가 없는 어머니를 만났다면, 그 딸의 마음에는 결코 따뜻한 봄이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가 그분께 거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셨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도 ‘아, 주님은 어쩌면 나와 똑같이 닮았을까?’ 하고 감격한다.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옥한흠

 

 

하나님을 고대하는 사람

새벽 3시, 카메라 장비를 들고 부랴부랴 소록도 중앙교회로 향했다. 섬 전체가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에 젖어 들고 있었다.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맨 앞줄에 앉아 계신 한 할아버지의 팔과 다리가 모두 없었기 때문이다. 바깥에 겨울비가 내리고 있어 스산하고 추운데, 게다가 새벽이라 깜깜하기까지 한데 어떻게 이곳까지 나오셨을까. 너무나 의아했다. ‘아마 누군가가 업어서 모셔 왔겠지.’ 나는 예배가 끝난 후 그분의 뒤를 따라가 봤다. 그분은 혼자서 예배당 문까지 천천히 기어가셨다. 그뿐 아니었다. 문턱을 넘어 빗물이 흥건한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배로 밀며 나아가고 계셨다. 나와 그분과의 거리가 한두 걸음 정도로 좁혀졌을 때 나는 더욱 놀랐다. 그분이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비가 오는데 교회에 오시는 게 힘들지 않으셨어요?” “힘들긴요.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서 매우 행복하지요.” 할아버지는 웃으며 가던 길을 재촉하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분의 모습, 그 와중에도 찬송을 부르고 계셨다. ‘지금 내가 환청을 듣고 있나? 저런 불편한 몸을 하고서 도대체 무엇이 감사하단 말이지?’

소록도는 정말 특별한 세상이다. 성경에서 봤던 믿음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다.

「기도하는 섬, 소록도」/ 김동신

 

 

 

성령 충만은 영적 목마름이다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내게 타는 목마름이 있다. 기업가가 돈을 향해 목말라 하듯이, 스포츠맨에게 파워를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나에게도 영적 목마름이 있다. 펌프의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처음에 쏟아 붓는 마중물 한 바가지를 기다리는 펌프의 목마름을 생각하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피와 물을 쏟아 버려 목이 타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일곱 마디로 남기신 유언을 되새겨 본다. 아침 묵상 시간을 마중물로 여기고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작은 물질이지만 마음을 담아 바치며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예배를 드리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나의 존재란 기껏 모아 봐야 한 바가지 물에 불과하지만, 주님의 펌프에 부으면 내 삶에서 영원히 넘쳐나는 생수를 마시게 된다. 명절 끝 날까지도 나의 목마름이 주님 안에서 솟아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이길 바라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이처럼 마음속에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영적 만족감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목마름을 갖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목마른 영혼을 채우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성령 충만의 마음이다.

「영혼의 혁명을 일으키시는 성령」/ 김지철

 

 

 

변화의 시작

하나님은 놀라운 영생의 계획을 갖고 계시며 중보자와 기도를 통해 그 계획을 실현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신다.

“나에게 계획이 있단다. 그 계획이 실현되도록 기도할 사람이 있니?”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주님, 기도할게요. 그런데 그 계획이 무엇인지 먼저 알려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글쎄, 그것 참 심각한 문제로구나. 나는 네가 살고 있는 도시만 움직이게 하지 않고 한 나라, 한 대륙을 모두 챙기고 있단다. 또한 우주를 전부 챙겨야 한단다. 모든 피조물을 움직이게 해야 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네가 알아야겠다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이해하지 않고 기도할 사람은 없니?”

누군가 작은 손을 살며시 들면서 말한다.

“주님, 제가 할게요.”

그리고 기도를 시작하면 성령이 우리의 영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그럴 때 변화는 시작된다.

「족한 사랑」/ 샌디 밀러

 

 

깨어진 거울의 비상

이란에 있는 테헤란 왕궁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을 볼 수 있다. 그 작품은 벽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반사한다. 건축가는 이 왕궁을 처음 디자인할 때 벽에 큰 거울을 붙이려고 계획했다고 한다. 그래서 파리에 가서 큰 거울을 주문해 들여왔다. 그런데 상자를 열어 보니 거울이 온통 산산조각 나 있었다. 파리에서 테헤란까지 수송을 담당한 책임자는 왕궁의 건축가에게 사과했다. 그런데 화를 낼 줄 알았던 건축가는 뜻밖에도 깨어진 거울 조각을 모두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거울 조각을 아주 작게 부수어 일일이 벽에 붙였다. 그러자 거울 조각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자이크로 되살아났다. 그렇게 해서 깨진 거울 조각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최고의 예술가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깨진 조각들을 모아 반짝이는 별들로 만드시는 분이다. 당신은 가망이 없는 상태라고 말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산산조각 난 삶의 파편들을 사용해 놀랍도록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보다 훨씬 크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결점보다 훨씬 크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좌절이나 절망보다 훨씬 크신 분이다.

「 하나님께 이끌림」/ 김원태

 

 

겸손

겸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거짓된 겸손과 참된 겸손입니다. 거짓된 겸손은 존경과 명예를 멀리함으로써 겸손한 사람이라고 여김을 받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악한가를 스스로 열심히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잘 알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이것은 위장된 겸손 곧 은밀하게 감춰진 교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겸손은 겸손을 겸손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인내를 가지고 행동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고 또 죽습니다. 그들은 자신이나 피조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조롱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하며, 멸시를 받으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애쓰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합니다. 참된 겸손은 내면에 속한 것으로서 외적 행동과 상관이 없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는 일, 검소한 옷차림, 고분고분한 말투, 이런 당신을 보고 하나님이 겸손하다고 인정하실 까요? 이런 것은 지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참된 겸손을 위해 반드시 두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당신의 영혼에 스며든 타락의 엄청남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만이 완전한 선하심으로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깊은 영성 체험하기」/ 진 에드워즈 편

 

 

성도는 제자를 남긴다

몇 년 전에 텔레비전 드라마 <상도>를 인상 깊게 시청한 적이 있다. 그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이 상도다.” 그 순간 ‘상도가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면, 성도는 무엇을 남기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도는 제자를 남기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우리 교회는 평일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성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순예배나 일대일제자양육을 하면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도록 한다.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을 찾고 보람을 찾는 성도들을 길러 내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욱 시간을 쪼개서 쓰고 있다. 자투리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규모 있게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교회에서 많은 일꾼이 발굴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불평하지 않으며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성숙한 성도들이 세워지고 있다.

 

교회는 적어도 30년을 바라보며 사람을 키워야 한다. 내가 가르친 세대가 30년 후에 지금 나의 자리에서 하고 있는 일을 더욱 훌륭하게 해낼 수 있도록 제자를 키우는 성도야말로 성공한 ‘성도’가 아니겠는가? 지금 세대의 부흥에 만족하지 말고 그 부흥이 다음 세대에도 전달되도록 끊임없이 애쓰는 교회, 따라서 30년 후에 우리 교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

「우리 교회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 권 준

 

 

평강의 왕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해의 성탄절 전날, 부드러운 눈이 내리고 젊은 병사들의 마음은 고향과 가족에게로 가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조용히 콧노래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참호 안에 성탄절 노래가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그들이 노래를 마쳤을 때, 최전선을 사이에 두고 무인 지대를 지나 건너편 참호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편 병사들이 그들의 언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에 그들은 함께 평강의 왕이신 성탄절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계시면 천국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가까이 계실 때 이 땅에 횡행하는 불일치는 평화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실 때 한밤의 어둠은 대낮의 밝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평화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찾아올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께 헌신함으로써 그분의 평화를 누릴 수 있고, 또 세상에 그분의 평화를 알리는 메신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희망」/ 빌리 그래함

 

● 예수님을 믿기 전 나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내 어둔 마음에 빛으로 다가오신 때는 언제였으며, 그때 어떤 감동이 있었습니까?

● 열심히 계획을 세웠지만 작심삼일로 끝난 일이 있습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열정을 본받아 다시금 시작할 일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구원을 이뤄 가라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께 신실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나쁜 습관을 후회하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허비합니다. 그들은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에 대해 말하지만, 실제로 자신들의 구원을 이뤄 가는 일에 결코 착수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는 순간마다 당신의 구원 속으로 더욱 충만히 들어갈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순간마다 허락해 주실 때,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분의 임재 안에 사십시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을 피하십시오. 당신 안에 있는 그분을 발견하고, 당신의 마음을 그분께 쏟아 내십시오.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뜻에 당신의 계획을 드리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위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속히 그 일을 행하십시오.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 그 작은 것은 큰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셨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사랑으로 당신에게 요구하신 것을 행하고 그분께 순종하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당신의 처한 상황이 얼마나 어려워지고 불편해지든 간에, 당신은 그것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가장 위대한 일은 낙담하지 않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 찾기」/ 프랑소와 페늘롱

 

● 최근에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 불러일으키신 소망은 무엇입니까?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강제로 요구하시지 않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까?

● 내가 속한 곳에서 빛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며 사회의 어떤 면에 관심을 갖고 중보기도 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 72편 17절

우리는 복을 너무 좋아합니다. 마치 복에 굶주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복은 갖는 순간부터 싫증이 나고 욕망만 불러일으킬 뿐,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참된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의 복과 하나님의 복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용조/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예수님의 구원과 산타의 구제

구제는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다. 하나님은 구제를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빌 4:18)이라고 칭찬하셨다. 그러나 구제는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봉사다. 구제에는 하나님의 상급이 따르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또한 구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산타클로스로 알고 있는 성 니콜라스는 AD 270년경에 소아시아에서 살았던 실존 인물이다.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그의 마음은 오늘날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 인간에게 필요한 물질의 결핍을 채운 그의 선행을 기억하려는 태도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구제를 기리는 정신이 성탄절의 주체로 확산되면서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희석시킨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구제는 결코 니콜라스의 선행과 비교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필요는 육체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사형에 해당하는 자들’(롬 1:32)로 정죄받은 존재다. 따라서 물질로 결코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은 절대 결핍 상태에 처해 있다. 이 영혼의 결핍은 니콜라스의 물질적 구제를 통해 채워질 수 없다. 그의 선행은 어디까지나 그가 행한 대로 인간 삶의 한 부분으로만 기억돼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전인격적 구원을 이루셨다. 그렇다.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줄 수 있는 사랑의 구제야말로 구제의 완성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사랑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며 그분의 삶을 본받기 위해 행하던 성탄절의 구제는 오늘날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축적인 선물 나눔의 구제로 변질되고 있다. 즉 주님을 섬기는 것에서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에서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그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를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혹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도 상술이 부추기는 분위기에 휩쓸려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산타 카드, 산타 학용품, 산타 인형 등으로 성탄을 장식하며 무분별하게 보내려 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또한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목도한 시므온과 안나처럼 주님의 사랑과 임재 안에 거하는 귀한 성탄절을 보내도록 하자.

김은숙/The Third Base 선교회 대표

 

 

공의의 재판관

1990년, 미식축구 선수이자 영화배우이며 국민 영웅이었던 O. J. 심슨이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죄목은 ‘전처와 그 애인 살해.’ 그에 대한 결정적 증거는 현장에서 채취한 DNA로서 심슨의 것과 일치했다. DNA가 일치할 확률은 1만분의 1. 검사는 심슨이 99.99퍼센트 살인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반면에 변호사는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인구 300만 명 중에 300명이 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심슨이 살인자라는 결론은 99.7퍼센트 오판이라고 했다. 진실은 하나다. 심슨이든지, 검사든지 누구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세상 법정은 아직도 그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때로 법정은 권력과 돈에 의해 ‘가진 자의 전당’이 되기도 한다. 정의는 땅에 밟히고, 악은 공중에 사무친다. 억울하게 죽은 순교자들의 피는 제단 밑에 흐르고, 그 영혼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갚아 달라고 부르짖는다. 절대적으로 공평하고 지혜로운 심판자가 계셔야 한다. 뒤틀린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심판자가 오셔야 한다. 역사의 오심(誤審)을 밝히기 위해 정의의 재판이 열려야 한다. 간음자, 불신앙자, 고아와 과부를 학대한 자가 내세에서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세상에 희망이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하나님은 공평한 재판관이 되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심판의 날에 정확한 응보가 이뤄질 것이며, 세상의 부당함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내 영혼의 정원사」/ 황병철

 

 

고통은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

어느 날 밤, 세 살짜리 막내아들이 고통을 호소하면서 나를 깨웠다. 아들은 배가 아프다고 뒹굴며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나와 아내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곧바로 아들을 응급실로 데려가 검사를 받았다. 아이의 방광이나 장이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통증을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의사는 당장 관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들은 치료를 받는 동안 발버둥을 쳤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아들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그러자 아들은 소리를 쳤다. “아빠, 이 사람들 좀 못하게 해. 아빠, 나 좀 도와줘.” 아들은 치료를 받고 나서 눈물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왜 그 사람들을 막지 않았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세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어떻게 그 과정을 일일이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아들을 안고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빠를 믿으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야만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님께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제발, 이 일을 빨리 끝내 주세요.’ 고통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분명해지면, 고통의 원인을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된다. 만약 당신이 지금 고통 중에 있다면, 그런 깨어짐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문임을 기억하라.

「은혜의 영성」/ 스티브 맥베이

 

시편 71편 18절

어느 날 늙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면 하나님을 탓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당신에게 누누이 예고하셨고 충분히 충고하셨습니다. 인생의 황혼은 오히려 절정기가 될 수 있습니다. 평생의 모든 삶은 그 장엄한 ‘떠남’을 위한 준비였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멋진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최고령 노인들이 항상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는 늙어 갈수록 이 땅을 보는 시력이 아닌 천국을 보는 시력이 더 좋아져야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 오크 힐스 교회 담임목사

 

기도는 삶의 중심축

나의 조국 네덜란드에 가면 아직도 커다란 마차 바퀴들을 장식품으로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마차 바퀴들을 볼 때마다 깊은 매력을 느낀다. 그 바퀴는 중심에서 사는 삶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바퀴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이면 바퀴살을 하나씩 차례로 만나게 되지만, 중심축에 있으면 모든 바퀴살을 한꺼번에 만질 수 있다.

기도한다는 것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삶의 중심으로 옮겨 간다는 뜻이다. 삶의 중심축에 가까이 갈수록 중심축으로부터 힘과 에너지를 받는 모든 것과 가까워진다. 나는 온갖 바퀴살로 인해 삶이 산만해지는 경향이 있다. 바쁘지만 진정한 생명을 주지 못하고, 사방으로 뛰어다니지만 초점이 없다. 그러나 관심을 삶의 중심으로 돌리면 그 중심을 지키면서도 풍부한 다양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중심축이란 무엇일까? 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세상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기도할 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거기서 내게 사랑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난다. 또 거기서 모든 형제자매가 연합하는 곳도 발견한다.

이처럼 마차 바퀴는 중심축이 모든 에너지와 운동의 중심임을 보여 준다. 종종 정지한 듯 보일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행동과 휴식은 하나다. 기도도 다를 바 없다!

「꼭 필요한 것 한 가지 기도의 삶」/ 헨리 나우웬

 

● 나는 다급할 때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기도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바꾼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매달립니까?

●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해 본 적 있습니까? 분노의 감정이 복받쳐 오를 때 하나님께 마음을 토로하고 좀더 인내할 수 있습니까?

 

키잡이의 미소

「보물섬」을 쓴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venson)이 폭풍우에 대해 쓴 이야기에는 배가 암벽 해안에 좌초돼 승객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 장면이 나온다. 배가 옴짝달싹 못하자, 공포에 질린 승객 한 명이 배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갑판 맨 위에 있는 조타실로 가 보았다. 키잡이가 두 손으로 조타기(배의 키를 조종하는 장치)를 꽉 붙잡고 선체를 돌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 뱃머리는 조금씩 바다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키잡이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어깨 너머로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 승객은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 “제가 키잡이의 얼굴을 봤는데요,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모든 것이 잘되어 가나 봐요”라고 소리쳤다. 키잡이가 보여 준 그 미소는 배에 탄 승객들의 마음에서 공포의 먹구름을 일시에 거둬 갔다. 그리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 놓았다.

키잡이의 미소가 승객의 두려움을 잠재운 것처럼, 우리는 삶의 폭풍우 속에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봐야 한다. 고통 중에 주님을 바라보려면 무엇보다 주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 오직 그분의 임재 안에서만 치유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 중에 하나는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다. 찬양과 예배라는 약을 꾸준히 복용하면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더치 쉬츠의 소망」/ 더치 쉬츠

 

● 나는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마음임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 환난 때마다 붙드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까? 나는 좋을 때에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기쁘게 찬양합니까?

● 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하심을 믿고 기도합니까, 아니면 인간적 방법이나 물질을 의지합니까?

●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고난 중에도 결코 넘어지지 않음을 확신합니까? 나의 믿음이 심히 훼방받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인간을 개조하시는 하나님

“기계는 뜯어고칠 수 있어도 인간은 그리 안 된다. 그래서 사람은 근본이 중요한 기라.” 구순을 바라보시는 권사님인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다 가신 아버님에 대해 가슴 아프게 회고하시는 부분입니다. “인간은 고칠 수 없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형이라고 부르는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기 전 젊은 날의 술친구였습니다. 일면 풍류가였던 그는 “신이 위대한 것은 술과 담배라는 위대한 형이상학적 물질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야”라면서 술자리를 즐겁게 만들곤 했습니다. 한때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소설가였습니다. 유명한 평론가가 촌평하기를 ‘김동인의 대를 이을 문학 천재’라고 극찬했습니다. 그가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학상을 휩쓸다시피 했고, 동시에 대중적 인기도 많아서 그가 쓴 소설들마다 예외 없이 영화 제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해질 녘에 그가 가는 명동의 술집엔 으레 문화부 기자들과 평론가들이 줄줄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명동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녁마다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던 주변 사람들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술과 담배를 거짓말처럼 딱 끊고 은자처럼 산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시쳇말로 그는 멋쟁이 소설가라는 신분과 친구 사회에 배신을 때린 것입니다. 그 후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그를 만났습니다. 찻집에 들어가 마주 앉자마자 뜻밖의 열변을 토하는 그에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이 중년 남자답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해맑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술과 담배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한없는 온유와 감사가 있으며, 알 수 없는 광채로 은근히 빛나는 얼굴이었습니다.

 

평생 보장된 즐거운 술자리를 홀연히 내던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간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1990년 4월의 부활 주일, 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한 후의 일입니다. 그는 지금 필자에게 ‘술친구 형’이 아닌 ‘마음의 형’이자 신앙의 선배입니다. 이루고자 하시면 못 이루실 것이 없는 분, 특히 사람을 ‘근본’부터 바꿔 놓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손수 만드신 생명과 영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빠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선교사 가족이 휴가차 본국으로 와서 친구의 호숫가 집에 머물고 있었다. 문제의 그날에 아버지는 보트 창고에 있었고 어머니는 부엌에 있었다. 네 살, 일곱 살, 열두 살 된 세 자녀들만 잔디밭에서 놀고 있었다. 네 살 된 빌리가 누나의 감시를 벗어나 목조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아이의 눈에 반짝이는 알루미늄 배가 들어왔고 걸음이 고르지 못한 빌리는 2.5미터 깊이의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을 목격한 누나의 비명을 듣고 아버지가 뛰어나왔다.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아들을 찾았으나 숨이 차서 두 번이나 물 밖으로 나와야 했다. 다시 한 번 숨을 잔뜩 들이쉬고 내려가 드디어 아이를 찾아냈다. 빌리는 물속에서 나무 교각을 꼭 붙잡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의 손가락을 나무 교각에서 떼어 내 품에 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안전한 곳에서 물었다. “빌리, 저 밑에서 뭐하고 있었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린아이였지만 아버지와의 사이에 역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전, 보호, 수용, 사랑을 느껴 온 역사였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기뻐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았고, 아버지의 신실함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갖고 있었다. 전폭적인 의존! 인생 여정에서 예수님의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그분께 주목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신뢰」/ 브레넌 매닝

 

 

왕과 그분의 나라

자녀들을 좌석에 앉히고, 자신이 자동차를 운전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주장에 대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운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만 아이는 모른다. 어머니가 초등학생 자녀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는다고 해서 권력 중독자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주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것은 그분만이 우주를 운영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태초부터 절대적 주권 즉 다스릴 권리를 갖고 계셨다. 그분은 창조자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분의 백성에게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주권적 왕의 개념은 평등을 외치는 서구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할 말이 많다. 우리는 투표로 지도자를 뽑는다. 우리는 군주 앞에 엎드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 자신이 군주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최소한 대의제(代議制) 형태의 정부를 갖는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결정적이고 구속력이 있으며 타협할 수 없는 진리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다. 20세기 성경 주석가 캠벨 몰간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주 되심에 저항하는 자들은 다른 주인들의 압제를 자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의지 - 내어맡김」/ 낸시 레이 드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