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
152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있을 때, 온 도시에 전염병이 돌았다. 당시 선제후는 루터에게 대학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나로 피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루터는 거절했다. 그렇다고 그가 무모한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실제적인 조처를 제안했으며, “비텐베르크에 머물러 있어야 할 종교적, 시민적 의무가 없다면 떠나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아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목회자로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는 “설교자와 목회자처럼 영적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확고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요 10:11)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신자는 세상의 고통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자신감과 사랑을 가지고 세상의 고통을 감싸 안아야 한다.
<월드 비전>의 설립자인 봅 피어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나도 아프게 여기게 하소서!”라고 간구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그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예수님이 이끄시는 사역」/ 아지스 페르난도
●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은 좁으며 장애물이 가득합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을 따르는 모든 성도가
십자가로 향하는 가시밭길 외에는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당신을 극진히 사랑하시기에 당신이 돌려 드리는 충성과
헌신과 용기를 기뻐하십니다.
로렌스 스쿠폴리/ 기독저술가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여우
꽃이 피는 포도원은 사랑의 동산입니다. 사랑의 가정입니다.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허무는 작은 여우가 있습니다.
여우는 야행성 동물입니다. 간교한 작은 여우는 숨기를 잘합니다. 그래서 세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작은 여우입니까? 헌신을 막는 이기심이 작은 여우입니다. 사랑을 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희생일 것입니다. 얼마나 희생했는가를 보면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랑의 관계는 소속감이 분명할 때
안정감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했다는 확고한 사랑이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합니다. 분명한 소속감은 헌신과 충성과
진실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상대로 나의 사랑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마침표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선택의 여지를 갖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이런 헌신과 충성과 진실을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것이 연합하는 사랑, 소속된 사랑, 친밀한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혹시 사랑의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가서를 통해 배우는 주님의 사랑으로 전화위복할 수 있습니다.
-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강준민
● 사랑하는 것은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마음은 고통스럽게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이기심이라는 관 속에 안전하게
넣고 뚜껑을 닫아 보십시오. 안전하고 어둡고 움직임과 공기가 없는 그 관 속에서 사랑은 변질될 것입니다. 깨지진 않겠지만,
깨질 수도 되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천국 외에 사랑의 위험과 혼란에서 완전히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지옥뿐입니다.
C. S. 루이스/ 기독교 변증가
● 우리는 눈과 코를 밝게 해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젖가슴은 말씀의 젖으로 차고 넘쳐서 많은 사람을 먹이고 양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사람들을 전도해 와서 그들을 말씀과 기도로 먹이고 양육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령한 젖을 나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친밀한 사랑은 이렇게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러냄으로 깊어집니다.
강준민/LA 동양선교교회 담임목사
열심과 순종의 차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열심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복음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우리의 능력과 의지를 앞세우려 한다.
요즘 교회들은 ‘성장’을 목표로 5년, 10년 계획을 수립하고, 온갖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운용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주님이 이런 것들에
감동하실까? 열심을 내는 교인들은 바쁜 일정으로 빠듯하게 들어찬 생활 계획표에 따라 분주히 뛰어다닌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의
표상일까? 또한 주님이 속공(速攻)을 원하시는지 아니면 전면 강압 수비를 원하시는지 질문하지도 않은 채, 스포츠의 작전 기법과 사업계의
경영 기교들을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도입해서 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스럽게 말한다 해도, 우리가 지금 주님이 보여 주신 귀감으로부터
많이 빗나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려, 예수님이 일하셨던 방식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노심초사하지 말라. 그 대신, 평강의 왕께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라. 예수님의 행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놀랄 만큼의 고요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으로, 하나님께 항복함으로 그분의 권능을 명백하게 나타내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면, 예수님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고 따라야 할 것이다.
- 「낮아짐」/ 더글라스 웹스터
●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시는 구세주를 본다면 내 영혼도 경건한 여인들과 합류해 함께 울 것입니다. 내 죄가 채찍이 되어
주님의 거룩하신 어깨에 상처를 내었고 주님의 이마에 가시면류관을 씌워 피가 흐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살해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눈물샘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큰 슬픔입니다.
찰스 H. 스펄전/ 청교도 설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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