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9-13)
우리는 지난 시간에 잘못된 기도의 태도에 대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을 살펴 보았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가장 거룩한 신앙적 행위를 세속적인 자기 영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기도할때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다른 주님의 지적은 기도를 종교적인 주술행위로 만들어 버릴 것에 대해서입니다.
기도는 양이나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배경은 누가복음 11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쁜 일과들 속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빠뜨리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들을 제자들이 바라보다가 어느날 기도에 대한 열망들이 그들안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로 우리에게 기도의 모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내용, 물질적인 내용, 내적인 문제들 외적인 것들도 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위대하고 큰 주제로주터 한 개인의 문제까지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이름(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옵시며)과 2) 하나님의 나라(나라이 임하옵시며) 3) 하나님의 뜻(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그 다음의 세가지는 우리에 대한 것으로
1) 일용할 양식 2) 우리의 죄 3) 시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주기도를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우리 현실에 어떤 문제를 가지고 나가기 전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란 우리의 하나님께 나의관심을 집중시켜 하나님을 먼저 묵상하여 하나님의 성품들에 관해서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주기도의 첫번째 부분을 살펴 보겠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입니다.
대상이 누구인가 그것이 분명해야 하고 그 대상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장 먼저 그 기도의 대상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이 이름을 아무나 부를수 있는 이름이 아니고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지를 못합니다.
롬 8:14-15절에 보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느데 이것은 "아빠"하는것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하나님의 부요, 풍성함을 맛볼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안에는 라는 Family라는 개념이 들어 있는데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버지의 모든 소유하신 것을 같이 누리게 됨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소유를 물려받는 상속권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용납이 있으며 용서함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것이 관계안에서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앞에 어떤 단어가 있습니까? "하늘에 계신" 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땅의 아버지, 육신의 아버지와는 구별됨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완저한분이 아닙니다.
때로는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고 감정적으로 나를 대할 때가 많고 가끔 이기적이기도 하고 실망을 주기도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이 호칭에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과 위대하심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무능하고 나약한 아버지가 아니라 전능의 하나님이시며 엘샤다이,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이 세상과 비교할 자가 없으며 창조자 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주기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끝이 납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이 납니다.
내 인생에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생길수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있어서 자주 실패하고 또 오해하는 것이 기도란 "구하고 받는 것"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성숙 미신앙인일수록 찬양이 부족하고 그대신 간구가 너무도 많으며 당연히 그 간구에는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들이 얽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기도에는 참 평안과 안식이 없으며 그래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처참하고 불안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찬양을 회복하면 그 찬양가운에는 이기심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도에는 참 평안과 안식이 없으며 그래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처참하고 불안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찬양을 회복하면 그 찬양가운데는 이기심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이런 기도인 것입니다.
엄격히 구분하면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묵상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함께 섞여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찬양의 기도를 드립시다. 그 기도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찬양의 기도를 드립시다. 그 기도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높으심을 높여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내안에 계시는 그 임재하심을 마음껏 경험하며 "아바, 아버지!" 그 이름으로 기도하다가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며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보잘 것 없는 기도제목들이었음을 깨닫고 하나님안에 빠져 들어가는 기도가 여러분의 매일의 삶속에서 이루어 지시길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찬양은 기도의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며 이 기도야말로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께 온전히 촛점을 맞춘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운데 찬양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지혜와 권능과 영광과 권세를 높여드리며 점점 더 깊어져가는 기도들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주기도문(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9-13)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매우 짧지만 놀라운 내용들을 다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크게 6가지의 주제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번 째는 하나님에 대한 것 3가지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며, 두번 째는 우리에게 대한 것 3가지로 일용할 양식, 우리의 죄문제, 시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과 우리 인간에게 대한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우리가 하는 기도의 대부분들이 균형을 잃어버린 기도일 경우가 참 많은데, 그것은 개인의 어떤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서 촛점을 맞추어 주셨는 데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의 가지고 계시는 관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촛점을 맞추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교회에서 가르칠 때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 는 공식을 너무 강조한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자신의 필요와 어떤 요구 사항만 하나님께 늘어놓는 기도를 하고 있다면 이미 그 기도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기도생활은 기도의 풍성함과 넘치는 감격을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생활 속에서 불안감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관계안에 있음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째 그 하나님께 깊이 나아가는 기도의 실패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가장 먼저 우리의 관심을 "나"라는 존재에서 하나님께서 방향을 돌려 놓고자 하셨습니다.
결국 방향전환하는 작업에서부터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나를 열심히 바라보던 삶에서 이제 그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란 한마디로 방향전환입니다.그 방향전환은 곧 기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있어서 촛점을 가장 먼저 맞추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가 9절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 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승리의 깃발이신 하나님), 여호와 샬롬(평강의 하나님), 여호와 라아(길을 잃은 양떼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신 하나님), 여호와 삼마(우리의 현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대하는 이름은 "여호와"로 약 7,040번이 나옵니다.
이 이름은 처음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광야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 그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 알려주신 이름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I am that I am"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나는 설명되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이 기도에 있어서 십계명의 제 3계명과의 연관성이 있는데, 그 위대하고 높으신 이름에 대하여 경외심 없이 그냥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행실과도 연관이 있는 데,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와 관계가 있습니다.
마 5:16을 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평소의 세상속에서 바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집 앞의 교회 명패는 붙여놓고 자동차 뒤에 물고기는 붙여놓고, 운영하는 가게안에 나무 십자가는 걸어놓았는 데,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왜 전도를 해도 되지 않는가? 그 전도문을 불신자들이 막았는가? 전도의 걸림돌이 누구인가? 예수 믿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동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사람들에 의해 조롱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속에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배가 일어나오고 있읍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 거룩하신 이름이 온 땅위에 높여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하지 않고 높여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존재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오직 모든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광대하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기도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3가지 개념이 있는 데 1)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2)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3)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전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는 세상을 통치하시기 시작하셨고, 어두움의 왕국을 몰아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지금 현재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영접하면 그 때부터 천국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은 천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왜 내 마음속에 평화가 없고, 참된 안식이 없습니까?
이 때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셋째,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적절한 아쉬움과 모자람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그것은 이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며, 미래에 다가올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결국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는 기도입니다.
여려분 우리는 이 땅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너무 악을 써서 사는 사람들 보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이 아니라 그 땅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로 결론 맺는 인생이 아니라 내일로 결론이 날 인생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기도는 매일의 삶 속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바라는 기도이며, 동시에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재림을 가다리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이기심입니다.
많은 기도가 "나"하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곧 응답이라는 공식보다 기도는 곧 포기라는 공식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내 뜻, 내 욕망, 내 중심의 생각, 나의 성취의 포기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앞에서 포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릇된 자기의 욕심과 자기 성취와 성공을 하나님 뜻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뜻에 대한 오해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뜻에 대한 불안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항상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나의 지혜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기도의 시간에 우리의 문제를 들고나가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고 묵상하며 그 앞에 순종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우리의 생애 속에 이루어지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토록 거룩히 여김을 받는 곳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토록 거룩히 여김을 받는 곳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이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집중되어짐으로 신앙의 세계가 더 깊어지고 풍성해 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9-13)
주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세가지 주제는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주제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속에서 빠뜨리지 않고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내용들입니다.
이제 오늘은 주기도문의 두 번째 part인 우리들에 대해서 기도하도록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일용할 양식, 용서,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세가지 중에서 첫 번째인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육체도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육체가 건강하지 않으면 영혼도 함께 흔들거립니다.
현실적으로 육체적인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그 상태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일용할 양식에서 이 일용할 양식은 어디까지인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양식의 개념은 먹고 입고 생활하기 위한 모든 시설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의 삶 속에서 필요한 것, 즉 사람답게 사는데 필요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용할 양식"에서 "일용"이란 어떤 뜻이 있는가? 매일 먹을 양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보다 "10년, 20년 먹을 양식, 혹은 평생, 자자손손 먹을 양식을 주옵소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이유는 첫 번째는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하나님 앞에서 아쉬운 소리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힘과 재주와 지혜를 동원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이 말씀은 저축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저축을 하되 그러나 은행잔고를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느냐, 물질을 더욱 신뢰하느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불안해서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든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믿음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으로 어제를 먹이신 주님이시라면 오늘도 틀림없이 나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이고 오늘을 먹이신 주님이시라면 내일도 틀림없을 것임을 믿는 믿음이 필요한 기도입니다.
두 번째로 이 기도는 욕망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양식을 달라는 것은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을 위한 것이지 그 이상의 욕심을 가지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4:3-4절을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이렇게 말씀한 후 이어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하고 나오는 데 앞의 잘못된 기도와 간음한 여인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간음한 여인이란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로 그것은 세상과 벗된 것, 곧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을 말합니다.
간음한 여인이 좇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입니다.
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좇고 세상의 욕망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며 마치 간음하는 여인과 같이 이 세상을 부지런히 좇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에는 "감사와 자족"하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오늘 먹을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순간도 살 수 없으며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오늘 내가 먹고 입고 생활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주셔야 내가 받을 수 있습니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한 조각의 떡이 있기까지 농부의 수고가 있었고 방앗간 일하는 일군의 수고가 있었으며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빛을 비추셔서 추수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떡 한조각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서구교회나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웬만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오히려 부족감 속에서 불평을 하는 일들이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에서 느끼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영적인 기갈, 영적인 굶주림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욱 더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채움이 있을 때 오늘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참된 감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다음 생각해 볼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여기 "우리에게"란 공동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주옵시고"만 강조할 수 있으며 "주시옵소서"를 너무 세게하면 자기 중심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우리를" 이것은 이기주의적인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를 생각하는 기도이며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나누어주기 위한 기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살펴보면서 이 기도를 가르쳐주신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일상사, 먹고 사는 문제,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부분의 일 까지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자기의 생애가운데 이천명의 고아를 돌보면서 오만번이상의 수많은 기도응답을 받았으며 필요를 하나님께 구함으로 수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읍니다.
이것은 죠지 뮬러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손길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무엇을 알기를 원하시는가?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자상한 성품을 소개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 오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며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가장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며 오늘도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분이심을 믿고 간구하시는 여려분 되시길 바랍니다.
주기도문(4)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9-13)
지난 주일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가르침에 이어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의 문제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우리의 필요를 위해 특별히 기도해야 할 부분에 있어서 일용할 양식 다음으로 용서를 다룬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용서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일용할 양식만큼이나 중요하고 시급하며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 구절들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조건부로 우리의 죄를 이제 용서해 주십시요"라고 하는 의미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미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의 여부에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첫 부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도록 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지만 또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더이상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곧 신자가 어떤 죄도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전히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존재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잘못들에 대해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예외없이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이 기도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용서함받은 사람들로서 그 용서함을 받은 증거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함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이는 만약 다른 사람에게 용서의 삶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속에 있어도 그 깃털은 전혀 물에 묻지 않는 오리의 깃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용서의 바다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삶은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불행하게 만듭니다.
만약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우선 자신이 괴롭고 불행해집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 결국 그사람의 노예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나 혼자 잘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부딪히면서 하는 것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는데 기도생활이나 말씀의 은혜가 넘친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며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용서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는 이해함입니다.
용서의 출발은 이해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해란 남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남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에는 쉽게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그 외적인 증상, 행동만 보고 그를 평가해 버리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이해는 그 사람의 외적 행동 이전에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이란 이해의 폭이 넓어짐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신앙 안에서 은혜를 체험할수록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짐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용서란 어떤 의미에서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하다"라는 말은 쉽지만 이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미운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내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하되 내 마음에 사랑의 마음을 주실 때까지 하여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서 기도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용서가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조롱과 멸시, 천대의 십자가상에서도 "용서"를 베푸셨던 주님을 내가 만날 때 내안에 있던 강하고 독한 성품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때에야 비로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계산하면서 용서하지 말고 무한정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우리들이 할 일은 용서뿐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의 횟수는 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를 세어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더라면 우리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용서는 나를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이 기도를 거리낌없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의 사랑은 풍성함을 누리며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우리 공동체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주기도문(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9-13)
오늘 본문은 주기도문 가운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부분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시험"은 늘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험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고 시험을 잘 치루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잘못 치루고 실패함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올 여러 가지 고통을 생각해 볼 때 오늘 우리가 다루어야 할 이 문제는 주기도문의 앞 부분에 기록되어져 있는 어떤 기도의 내용에 못지 않게 중요한 주제임이 틀림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시험에는 크게 두 가지의 시험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이 주는 시험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차이는 너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우리를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케 하시려는 것이고, 사탄은 우리의 인생을 실패자로 만들기 위하여 시험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은 Test 또는 Training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신앙을 시험해 보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혹은 내가 어느 부분이 약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보통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시험을 쳐 봄으로써 드러나게 됩니다.
시험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인간됨과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시험을 통과해 봄으로써 내 안에 있는 문제가 무엇이며 나의 연약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은 결국 우리를 유익하게 하며 온전하게 만듭니다.(약1: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험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시험을 대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온 사람은 시험을 기다리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면서 치룹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사탄이 주는 시험은 아주 파괴적이고 우리를 실패케 하며 범죄하도록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험"은 바로 사탄의 시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에서 알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시험에 들게 되는 것은 시험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악에 빠지는 것도 악에 빠지게 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넘어뜨리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면서 달려드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주는 유혹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사탄은 우리안에서부터 일어나는 "욕심"을 이용하여 유혹합니다.
사단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마음 안에 유혹의 음성을 들려 줍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냥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 아니면 사탄이 들려주는 일방적인 음성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사탄은 항상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립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그 약점을 이용하여 유혹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돈, 명예, 이성문제, 성품, 인간관계 등의 내가 넘어질 수 있는 부분 자주 실패했던 부분이 무엇인가를 한 번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있는 약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평생 그 문제 때문에 실패의 인생이 되고 맙니다.
셋째, 사탄의 시험은 대단한 것이 아닌 아주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하여 의심하지도 않고 아주 쉽게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주 별것 아닌 것 같아 쉽게 생각해서 시작된 유혹이 나중에는 내 인생을 망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수없이 많은 사탄의 유혹의 손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 하던 사람도 이 시험을 잘 분별하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능력은 "시험"을 잘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탄의 시험을 잘 알고 그 시험에 넘어가지 않는 신앙이 능력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무엇보다도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시험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마귀는 너무도 간교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함을 알려 주셨습니다.(마26:41)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실패도 결국 "기도하지 않은 것 " 때문이었습니다.
힘들고 시간이 없어서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기도하지 못해서 시험에 들어 실패하면 그것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는 교만이고 불신앙이며 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곧 잠든 신앙입니다.
그리고 잠든 신앙은 마귀의 밥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둘째,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소극적인 자세로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소극적인 방법만으로는 안 됩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극적으로 나의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우리에게 지금도 시험을 걸어옵니다.
우리를 실패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내가 약할 때나 강할 때나 언제든지 마귀는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 내 안에 있는 욕심들을 이용해서 실패하게 만들고 죄를 범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이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함으로 승리하시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호주 시드니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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