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들의 심리
에릭슨은 인성발달 단계를 기초로 하여
영아의 심리 사회적 발달과 예배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단계: 기본적인 신뢰감 대 불신감-
인간관계가 좋아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아진다.
영아들은 출생 후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해 주는 분위기와
양육자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 형성된다.
2단계: 자율성 대 수치와 회의-
놀이와 탐색에 흥미를 느끼는 단계
이 시기에 영아는 '사회화'가 진정으로 시작된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태도와 행동과 지식과 기술 등을
서서히 배워 가기 시작한다.
핫필드 박사는 '아기는 출생 후 몇 주 안되어서
모방을 통한 행동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아기는 그가 보는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며
그것을 자신의 행동의 표준으로 여기게 된다'고 했다.
따라서 영아는 부모와 주변 성인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를 통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결정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적인 단계에 있어 보이는 아기들도
부모들이 하는 모든 것을 자연히 습득한다.
따라서 부모의 아기에 앞에서의 행동이 각별히 조심되어 져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보여줌으로
아기가 자라 하나님을 섬기는 데 어려움을 갖지 않게 한다.
<정수옥/ '아기도 예배드릴 수 있어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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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웠던 여자 '테레사 수녀'
20세기는 97년 9월 5일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잃었다.
'가난한 사람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가 이날 87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라"란 말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이 성녀의 사랑은 그가 남긴 24개국 5천 6백 4개의 자선센터를 통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인도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1백 50만명이 운집했다.
거지, 부랑아, 장애인, 나환자 등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이 뒤섞여 울음을 삼켰다.
여기에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종교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난의 도시' 캘커타 빈민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46년이었다.
"문둥병 환자를 씻어줄 때 나는 하나님을 간호하고 있다고 느낀다.
너무나 아름다운 경험이 아닌가?"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 이상을 돌려준다.
그들은 토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소감에서도 모든 공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렸다.
교황 바오로 2세는 그를 '평화의 천사'라고 불렀다.
그녀는 떠났다.
그러나 그녀가 뿌린 사랑의 씨앗은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싹을 키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 아름다움이 향기를 발하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던 테레사 수녀가
그의 모든 봉사의 원천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것은
우리의 아름다움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잘 두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21, 1998.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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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거울
자기밖에 모르던 인색한 부자가 유대인 교수인 랍비를 만났다.
부자는 랍비에게 인생의 교훈이 될만한 가르침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랍비는 그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무엇이 보입니까?"
부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대답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이번에는 그 부자를 커다란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가서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무엇이 보입니까?"
"제 얼굴이 보입니다."
부자의 대답이었다.
랍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부자에게 말하였다.
"창문과 거울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으나
거울 뒤에는 수은이 칠해져 있어 밖이 안보이고 자신만 보이게 되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내면이 탐욕으로 칠해진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불행한 존재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맑고 깨끗한 영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고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살아 갈 때에는
주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소유할 수 없다.
내 눈을 가리고 있는 욕심, 자만, 이기심 등을 버릴 때,
내 눈에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일보, 1998.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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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함을 버려라
사역을 위임받아 떠나기 몇 주일 전 나는 오랜 친구이며 목사인 맥퀸스톤을 방문하였다.
내가 생각하기로 그 분의 연세는 고령이었다.
그 만남은 그분이 작고하기 직전 글래스고우의 남부에 위치한 그분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부드럽고 자상하게 내게 말하였다.
"그래함씨, 일과표는 빽빽하게 채우고 마음은 텅 비워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많은 일을 하지만 정작 왕이신 그분을 잠잠히 기다리는데는
아주 적은 시간을 보내도록 끊임없이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분주함으로 영혼에 막힘을 초래할 수 있으니
복스러운 기회를 분주함으로 대신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십시오.
내가 사역하는 동안 그의 당부를 얼마나 자주 실감했는지 모른다.
다른 많은 일들, 때로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기도할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렸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이렇게 제시한다.
"가능하다면 당신의 잡다한 일들을 정리하라.
그러면 단지 경건한 행위뿐 아니라 은밀히 기도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일에 매일 두세 시간을 쉽게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며 많은 일들 속에 쌓여 있다.
그리고 이 일들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일로 인한 분주함보다 나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말씀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먼저 갖는 것이 중요하며
많은 일보다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보다 우선되는 일이리라. <생명의 삶, 199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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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죄인 살리신
캐롤 버리스라는 주부는 근육무력증에 걸린다.
이 무서운 병은 온 몸에서 점점 근육이 무력해져서 죽게 되는 것이다.
그는 40대 초반에 6명의 자녀를 두고
변호사 사무실의 비서로 일하면서 무용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충만하고 풍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모습은 끔찍하게 변했다.
머리카락은 모두 빠지고 스테로이드 과다투여로 얼굴과 몸 전체가 부어 있었다.
마치 낡은 담요 같은 느낌이었다.
자존심을 버린지도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들 기도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오래 살지 못할텐데"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읽으면서 그녀는 더욱 자기 연민에 빠진다.
심장이나 호흡 장애가 일어날 때마다 그대로 죽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짐이 된 느낌은 무서운 것이었다.
부활절에 성가대원들이 그녀의 집에 몰려 왔다.
그들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간절히 통성으로 기도하였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을 느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참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병을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간 다음, 다시 그녀는 원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다시 무력해지면서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음속에 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나도 그렇게 기도했는데 그것은 다 무엇인가?
그냥 헛것인가?' 내가 신자로 그렇게 믿어야 하겠는가?
"너는 왜 백부장처럼 움직이지 않느냐?
기도를 하고 말씀을 받았으면 행동을 해야지"
백부장은 예수에게 기도하였다.
백부장은 증세의 호전을 원하지 않았다.
말씀을 원했다.
그리고 그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였다.
우선 자리에 누워있지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한다.
일어나서 움직이기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꾸만 마음속에 들어오는 자멸감의 어두운 그림자를 물리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생각했다.
남편, 자식, 친구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사람들의 기도와 자신의 기도를 믿으면 그만큼 마음이 밝아졌다.
몸이 불편하고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라고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담을 쌓은 것은 자신일 뿐이었다.
이제 차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녀는 병 때문에 어둠에 빠진 다른 이들을 방문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집이나 요양원이나 병원의 환자를 찾아 용기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전에 모르던 새로운 영역이 열린다.
"내 생명이 꺼질 때까지 사랑하고 생명을 나누리라"
이상한 일이었다.
차츰 몸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다시 글을 쓰고 연단에서 강의를 하고 50중반의 몸으로 교회 사무직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용강습도 다시 시작했다.
병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오히려 비전 속에 전보다 더욱 건강한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알았다.
기도를 사용하련다.
마치 은행에 맡긴 돈을 찾아 쓰듯,
하나님께 드린 그 수많은 기도의 말을 나는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인가 다시 오더라도 나는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내 생명의 마지막 촛불을 사를 것이다."
신앙으로 기도를 사용하고 다시 기도에서 더 깊은 신앙을 얻은 것이다.
-캐롤 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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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을 본 받으라
어느 목사님이 새로운 교회에 부임하여 첫 설교를 하려고 강대상에 올라갔을 때였습니다.
강대상 위에 종이 쪽지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급한 광고인 줄로 알고 재빨리 읽어보았습니다.
'우리는 목사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합니다.'라는 쪽지였습니다.
목사님은 당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쪽지는 목사님에게는 당시 충격이었고
그후에도 두고두고 목회의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인들은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교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의 최고 목표를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이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말할 때에
에베소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금방 알아 차렸습니다.
당시 그곳 수사학 선생들은 수사학을 가르칠 때에
세 가지 요건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론과 모방과 실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모방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선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이 큰 지혜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참으로 지혜로운 크리스챤은
하나님 닮기를 실습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①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② 사랑입니다.
③ 용서입니다.
④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가장 놀랍고 큰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4가지 성품을 본 받아야 하나님을 본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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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힘
신비한 힘은 영으로부터 나옵니다.
영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가이드포스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감옥에서 흉악범이 탈출했습니다.
이미 그는 어느 여대생을 강간했고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았습니다.
TV 뉴스를 보던 한 주부는 이상한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그 탈주범이 내 집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대단히 무서웠지만 마음이 동요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대학생인 딸이 들어오고 남편도 돌아왔습니다.
온 가족이 총 든 탈주범에게 48시간 동안 잡혀 있게 되었습니다.
주부는 딸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딸도 역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식사를 주는 자신에게 협박과 더러운 말을 하는 탈주범에게 딸은 차분히 말합니다.
"나는 아저씨를 위해서 지금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딸을 보고 주부는 마음을 놓습니다.
탈주범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게 아닙니다.
이 시간이 물론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힘이 계속 그들을 돕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의 공갈과 못된 짓을 보고 들으면서 해 달라는 대로 해주지만 공포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탈주범이 조용히 이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이 기간동안 영적인 큰 확신을 맛보았습니다.
두어 시간 뒤에 탈주범은 경찰에 잡힙니다. 그때 그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혔습니다.
그는 기자들에게 말했습니다.
"포기상태에서 최악의 행동이 나오려는데
그 믿음의 가족들이 준 처음 경험하는 이상한 감동으로 인해서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순수한 모습은 알 수 없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진정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알 수 없는 영적인 힘이 속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 때에 육신의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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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끈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강아지는 너무도 더러웠고 못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강아지는 굶주림에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아지 목에 달린 이름표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개를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름표를 보았습니다.
그 개의 이름은 "밥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글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왕의 강아지였던 것입니다.
곧 경찰에 보고되었고 잘 보호되어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왕의 부처가 에딘버러 성에 휴가를 왔다가 그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강아지는 왕궁으로 돌아갔고 무서운 숲 속에서의 경험은 그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백 킬로나 멀리 떨어진 왕과 강아지를 연결시켜 준 것은 바로 이 이름표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자들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어디를 헤매던지 우리에게 이름표만 분명하다고 한다면
즉각적인 보호가 주어지게 되며 확실하게 주인에게로 인도된다는 사실입니다.
온 우주의 왕인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이름표만 확실하다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강아지를 받아들이게 했을까요?
강아지가 훌륭하게 숲 속에서 여러 날을 생존했기 때문입니까?
강아지가 왕에게 어떤 좋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강아지가 경호를 잘하기 때문입니까?
강아지가 보호를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왕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신자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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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잘 모를 때
운전을 하다보면 때론 전혀 모르는 낯선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길을 갈 때 대개의 사람들은 팻말이나 사람에게 물어 보고 가기보다
그냥 무턱대고 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십중팔구는 낯선 길로 완전히 빠지거나 막다른 골목길에 부딪히게 됩니다.
인생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선배들의 말을 잘 안 듣게 됩니다.
물론 옳은 선배가 많이 없는 탓도 있지만
사람의 속성상 자신이 항상 자신의 주인으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유혹했던 마귀의
가장 확실한 인간 파괴 계략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항해하는 배는 항상 등대를 기준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모셔 그분을 인생의 등대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해서
축복과 평화 그리고 사랑과 성공의 항구에 안착시켰습니다.
지혜의 근본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하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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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승부정신
미국 허리우드에 영화제작회사 사장의 이야깁니다.
한때는 몇 편의 영화로 돈도 많이 벌었지만,
계속된 실패로 파산하기 일보직전에 놓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재산을 다 긁어모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합니다.
그러나 이 사장이 고용한 감독은 불행히도 다큐멘터리, 즉 기록영화 전문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아프리카의 로맨스를 그리려던 당초의 기대는 빗나갔고
영화는 엄청난 실패 속에 끝났습니다.
제작자는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영화가에서 완전히 매장될 형편에 놓였습니다.
바로 그때, 자신의 실패가 도저히 믿겨지지 않던 그 제작자는
싸구려 호텔에 틀어 박혀 자신이 왜 실패했나를 다시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번쩍이는 영감을 얻어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는 자기가 아프리카에서 갖은 고생 끝에 찍어온 필름 속에
엄청난 재산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의 동물과, 사막, 원주민들을 찍은 필름을
다른 제작자들에게 쪼게 팔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 생각은 적중해서 막대한 비용으로 아프리카로 가려던 다른 영화제작자들이
그 필름들을 사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재기에 성공했고 멋진 한편의 인생역전을 실현시켰습니다.
한 두 번의 실패에 등돌리지 마십시요.
오히려 그 실패 속에 감춰진 엄청난 재산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심에 있어 실수가 없습니다.
요셉을 종으로 팔려가게 하고 또 옥에 들어가게 하신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을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도 결코 실수가 없고 우연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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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소욕을 결단하는가
4세기에 들어와 수백 명의 고행자들은 세상의 유혹을 피하여 은둔 생활로
육체적 고통을 주는가 하면 좀 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실례로 성(聖) 아셉시마스는 자학의 사슬을 몸에다가 매고
걸어 다닐 수 없어서 무릎으로 기어 다녔습니다.
마카리우스는 6개월 동안 벌거벗은 채 늪에 들어가
모기에게 온 몸이 물어 뜯기기도 했습니다.
성(聖) 마론은 11년 동안 나무통 속에서 끼니만 때우고 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을 다스리기 위해 동굴이나 무덤 속에서 살았습니다.
벌레나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철사로 만든 셔츠를 입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마모로 만든 셔츠를 입어 온 몸이 찔리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물론 이런 방법이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는 결단력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과 반대되는 이 육체의 소욕만은 따르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기도하며,
애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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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시간
몇 해 전 한 수련회에 강사로 간 적이 있는데 상담하러 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직장에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생각하는데 보내십니까?"
"생각한다구요? 나는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느라고 멈춘다면 나는 뒤쳐지고 말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4세기에 살았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의 모든 흔적을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는 열이 강할수록 더욱 팽창한다는 영적인 열역학법칙을 발견하고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기독교를 박해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더욱 번창했다.
마침내 그는 그의 남아있는 추종자들을 꼭대기 방에 불러놓고 소리쳤다.
"젠장! 기독교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단 말이야.
노예들조차 생각을 하니 말이야!"
로마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안되었다.
그러나 노예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 아래서 생각하는 생활을 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큰 차이가 나타난다.
나의 삶이 주님을 향하기를 바라는가?
우리의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내 자신을 그분께 드려야 할 것이다.
<생명의 삶, 199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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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라
어느 의과대학에서 교수가 학생에게 질문을 했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매독에 걸려있고, 아내는 심한 폐결핵에 걸려있다.
이 가정에는 아이들이 넷 있는데, 하나는 며칠 전에 병으로 죽었고,
남은 아이들도 결핵으로 누워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이 부인은 현재 임신중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러자 한 학생이 대뜸 소리쳤다.
"낙태수술을 해야 합니다."
교수가 말했다.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이 불행한 상황에서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베토벤이었다.
아버지는 매독에 걸려있고, 4남매 가운데 하나는 이미 죽었고,
셋은 결핵에 걸려 살 희망이 없는데, 폐결핵의 중증인 어머니는 임신을 했다.
오늘의 의료적 판단으로는 낙태해야 한다고 결정 내릴지도 모를 그 아이가
악성(음악의 성자) 베토벤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신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인간 지식을 너무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너무 쉽게 포기하기도 하고, 너무 쉽게 사람들을 정죄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인간의 이성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까지도 함부로 비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은 그렇게 함으로 판단할 만큼 간단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인생사는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욱 오묘하며,
온갖 지적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영혼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모든 크리스챤은 이 일에 부름 받았다.
<목회와 신학, 199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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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예배를 필요로 하는가?
최근 미국 기독교 언론보도에 의하면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성인의 비율은
선진국 중에서 미국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시간 대학이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주 드려지는 예배나 종교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미국인의 비율은 전체성인 미국인 인구의 44%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는 전 인구의 38%인 캐나다와, 27%인 영국 그리고 21%인 프랑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며,
이밖에 독일은 14% 일본은 3%, 러시아는 25%인 것을 각각 조사되었다.
이 조사를 실시한 로널드 잉글하트 연구원은 미국이 이처럼 다른 선진국들보다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은 노령인구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곳으로 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잉글하트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는 종교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가난한 나라
특히 경제적인 불안정이 만연한 곳일수록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다고 발표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가진 것이나 이루어 좋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부족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기독공보, 1998. 4. 4.>
잘못된 사상과 풍조
1664년, 독일의 아타나시우스 키르헬이라는 수도자는 처음으로 환등기를 제작했고
그것을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당시의 환등기를 만들었던 사람은 모두 성직자들이었고
이 기막힌 기계는 포교와 설교의 장비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의도로 시작된 것이 영화로 만들어 발전되면서
점차 사람들을 현혹하는 메시지를 담아 사람들의 생각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가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해
가상으로 꾸민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한 거짓말들을 7개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아직 확인되지 않은 UFO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2) 죽은 사람의 영혼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
(3)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
(4) 강한 것이 선한 것이다.
(5) 비범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 세상을 구원한다.
(6) 로봇(컴퓨터)이 인간보다 낫다.
(7) 자연이 인간보다 우선한다.
이처럼 영화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위에서 언급한 것을 담고 있어 시청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텔레비젼을 통해 모방 범죄, 폭력, 동성애로 구속되는 사건을 종종 본다.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주고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아직 가치관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아 그것이 멋있는 영웅들의 행동으로 착각하고
똑같이 모방해서 잘못을 저질러 결국 감옥에 가고 인생을 망치다.
이제 신앙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할 줄 아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낮은 울타리, 1998. 1.>
출처: 예화 500 .1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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