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교실

현대 선교의 선구자 윌리엄 케리

열국의 어미 2010. 5. 20. 00:07

윌리엄 케리 이후 현대선교운동

 

 

‘현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 영국에서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없지 않았다.

사도시대부터 선교의 3대 분야는 전도(preaching), 교육(teaching), 의료(healing)였다. 이세가지는 항상 선교사역의 중요한 3영역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3영역의 선교가 실행된 것은 19세기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주로 설교가 선교사역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선교는 주로 남성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고, 선교는 남성들의 독점인 활동영역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는 선교에 있어서 3가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는 목사선교사만이 아닌 평신도선교가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문인 선교가 강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의료 활동과 교육활동이 선교지에서 환영 받았다.

둘째는 그 동안 남성위주의 선교사역이 수행되었으나 여성도 선교의 동반자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평신도 사역의 증가와 함께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다. 이런 변화는 19세기부터는 여성의 헌신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위미한다. 이점은 개신교만의 경우가 아니었다. 로마 카톨릭도 동일했다.

셋째는 세계선교의 주도권이 종전의 구라파교회에서 미국교회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교정책, 선교사 안식년제 등 선교사역에서도 실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현대 선교의 선구자 윌리엄 케리

 

가정 배경, 초기생활, 선교에 대한 관심

윌리엄 케리(1761-1834)는 1761년 영국 노스햄톤(Northampton)에서 태어난다. 기본 교육을 마친 그는 16세가 되던 1777년 구두방 도제로 들어가 28세가 되기까지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 그러나 18세 때 회심의 경험을 하고 비국교도 침례교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학문에의 실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독학으로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고전어와 이태리어, 프랑스어, 화란어 등 현대 유럽언어와 후일에는 인도어, 벵갈어 등 동양 언어를 독학으로 습득하였다. 또 여러 가지 책을 통해 학식을 넓혀 갔다. 1785년에는 목사안수를 받고 작은 침례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후일 레이세스터(Leicester)라는 비교적 큰 교회로 부임해 갈 때까지 가족들을 부양하기위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큭(David Cook, 1728-1779)선장의 항해 기록인 [큭선장의 마지막 항해](Captain Cook`s Last Voyages), 가스리(Guthrie)의 [지리학 입문](Georgraphical Grammer), 요나단 에드워드가 편집한[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Life and Diary of David Beainerd)등을 읽고 세계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또 성경연구를 통해 교회의 선교 책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해외선교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결과 1792년에는 [이방인의 개종을 위하여 우리들이 사용해야 할 책임에 관한 연구](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라는 87페이지에 달하는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케리가 속해 있던 칼빈주의 침례교회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다. 첫째는 선교명령, 특히 지상명령은 오직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명령이라는 점, 두 번째로는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케리는 선교는 우리 개인과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위의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이 책이 선교에 끼친 영향은 흔히 루터의 95개조의 항의문이 교회개혁에 끼친 영향과 비교된다.

 

 

선교사로의 소명

1792년 5월 30일 노팅햄(Nottingham)에서 모인 침례교 교역자 회의에서 이사야 54장 2,3절을 본문으로 “당신의 장막터를 넓히소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으나 교회 지도자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 때 케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는 말로 설교를 끝냈는데 이것은 그의 선교활동의 정신이었다. 으로부터 4개월 뒤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침례교선교회(BMS, Baptist Missionary Society, 처음에는 Baptist Society for Propagating the Gospel among the Heathens로 불렸다.)가 조직되게 되었다. 케리의 후원자이자 이 선교회 설립 회원이었던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가 선교회의 초대 총무가 되었고, 위사인 존 토마스(John Thomas)가 첫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케리 자신도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였으나 교회와 가족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1793년 6월 13일 아내와 4자녀 그리고 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인도를 출발하였는데 이것이 현대선교의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선교지에서의 활동

1793년 11월 11일 인도 후굴러(Hooghly)에 도착한 케리는 이때부터 약 40년간 이곳에서 사역하였다. 이제 영어사용권 국민들의 해외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케리에게는 아내의 질병과 선교반대, 아들의 죽음 등 가정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았으나 말다(Malda), 벵갈 등지를 거쳐 칼컷타에서 16마일 떨어진 포루투갈령 식민지 세람포(Serampore)로 가서 정착하였는데, 이곳에서 34년간 사역하였다. 따라서 이곳이 영국침례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케리와 동역했던 인물로는 조슈아 마쉬맨(Joshua Marshman, 1768-1837), 윌리암 워드(William Ward, 1764-1823)였는데, 이들은 세람포의 세 사람(Serampore Trio)으로 불리곤 했다. 마쉬맨은 중국어를 공부하는데 15년이 소요되었고, 그후 중국어로 신약을 완역했던 인물이다. 워드는 인쇄업자로서 훌륭한 설교자였다. 세람포에 도작한 후 케리는 포드 위리엄 대학(Port William College)의 동양어과 교수로 초빙되었고 교수활동은 그의 선교비를 충당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인도의 방언을 익힌 그는 성경번역 사업을 중요한 과제로 여겨 케리는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디어로 성경을 완역하였고, (동역자들과 함께)23개 국어로 신약을 완역하였으며, 10개 국어로 성경 일부분을 번역하였다. 전도활동은 최선을 다했으나 그 결실은 미미했다. 그러나 점차 복음사역의 열매를 얻기 시작하여 사역을 시작한지 25년이 지난 1819년경에는 약 600명의 수제자와 수천 명의 입교인을 얻었다. 그가 한 또 한가지 중요한 사역은 1819년 인도학생 37명으로 세람포대학을 개교한 일이다. 1827년 이대학은 덴마크 왕에 의해 문학사와 신학사 학위를 줄 수 있는 대학으로 인정받았다.

 

케리의 아내 도로시는 선교를 반대하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했으나 1807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약 6개월 후인 1808년 케리는 샬로테 루머(Charlotte Rumohr)와 결혼했다. 샬로테는 덴마크 왕족 출신으로 세람포에 요양와 잇던 여성이었다. 샬로테와의 결혼 생활은 1821년 그녀가 죽기까지 그 후 13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때는 참으로 행복한 기간이었다. 첫 부인과는 충돌과 대립의 고된 날들을 보냈으나 샬로테는 영리하고 언어에도 조예가 깊어 케리의 진정한 조력자가 되었다. 샬로테가 죽은 후 2년이 지난 후 케리는 16년 연하의 그레이스 휴즈스(Grace Hughes)라는 과부와 결혼하였다. 이 때 케리의 나이는 62세였다. 3번째 부인은 샬로테처럼 지성적이지는 못했으나 케리의 건강을 보살펴 주는 착한 아내였다. 케리는 이곳에서 사역하다가 1834년 6월 9일 선교지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것

해외 선교에 대한 케리의 호소와 40년간의 선교활동, 그의 편지와 보고서 등 선교사역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여러 선교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케리의 활동은 세계선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선교단체조직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게 되었다.

 

케리는 선교지에서 언어를 연구하고, 학교를 세워 교육선교를 실시하였고, 사회개혁, 곧 과부의 화형, 유아살해 등과 같은 구습의 타파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윌리엄 케리의 선교정책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1)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파하며

2)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며

3) 가능한 신속한 장래에 교회를 세우며

4) 비기독교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며

5) 가능한 빨리 토착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선교에 대한 견해 때문에 그는 선교지의 언어와 문화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고, 언어학자로 그리고 식물학자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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