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창작론 ⑧
감동, 체험의 일치에서 오는 감동
유 경 환
1 창작론에서 아직까지(7회에 걸쳐) 다루어 온 것은 외적인 틀(하드웨어)에 관한 것이었고, 이제부터는 알맹이에 해당하는(소프트웨어) 내적인 질(質)에 관하여 다루겠다.
2 시의 알맹이는 감동(感動)이다. 시에는 감동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줄여서 말하면, 시는 곧 감동이다. 감동을 줄 수 없는 시는, 쓴 사람이 혼자 즐기는 시다. 그러므로 시라고 일반화하기 어렵다. 흔히 시의 생명은 감동이라고 말한다. 읽는이에게 감동을 전해주므로, 시는 널리 읽힌다. 이렇게 감동이 시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그러나 대부분 감동적 요소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기 때문에,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경우엔,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시에 감동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모르게 된다. 시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 비롯된다. 동시도 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고 1950년대 말에 외친 사람은 필자다.) 동시도 시이므로 또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를 여기서 왜 다시 해야 하는가. 시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동시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부정적으로 쓰는 부사다) 많다. 더구나 아동문학인 가운데, 동시를 잘못 알고 있는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동시」작품이라고 발표되는 글의 질적 수준이 매우 유치하다. 동시라는 명사의 첫 글자 아이동(童) 한 자로 말미암아, 어린이의 입재롱감으로 동시를 인식하는 현실이 확대된다. 「동시」라는 일컬음이, 문학으로서의 동시의 본질을 왜곡시켰고, 그 원인은 1920∼1960년까지 우리 나라 문학에 대해 제대로 눈을 뜰 겨를이 없었다는 공백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잘못된 인식이 그 동안 화석(化石)처럼 굳어 대물림되었다. 잘못된 인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첫째, '동시이므로 시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여도 된다.' 둘째, '동시이므로 시의 차원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왜 자꾸 대물림되는 것인가. 서울의 신춘문예나 또는 권위 있는 문학 전문지에 여러 번 응모하였어도 등단에 실패하는 경우, '시는 어려우니까 이제부터 동시나 해봐야지…'라는 말을 서슴없이 지껄이는 인사들(?)에 의해서 퍼진다. 왜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에서 번번이 실패하는가? 그것은 시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해가 오류에 기반하는 것이기에 시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시는 서두에 말했듯이 감동을 내포하고 있는 운문이다. 감동, 그렇다. 이것이 들어 있어야 시의 기능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3 동시도 시이므로 당연히 시적(詩的) 요건(要件)을 갖추어야 한다. (이 한마디는 좀 번거로우므로, 이하 시적 요건을 그냥 시라고 말하겠다.) 동시와 그리고 일반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이해를 돕게 하자면, 지름의 길이가 다른 동심원(同心圓)을 그려서 설명할 수 있다. 일반 성인시는 지름이 길다. 그러나 동시는 성인시에 비해 지름의 길이가 짧은 편이다. 이해와 감상의 폭이 같지 않다는 뜻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포함하는, 또는 어린이를 주된 독자라고 여기는, 이러한 대상을 의식하면서 쓴 시다. 지난 날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하여 쓴 시라고 하였으나 이는 편협된 견해이다. 이런 견해가 한동안 지배적이었던 것이 바로 1920∼1960년까지의 공백 상황인 것이다. 오늘날 동시의 독자는 어린이에 한하지 않는다. 어린이에 한정한다는 생각은 폐쇄적 사고의 소산이다. '아동문학은 3대(代)에 걸쳐 효용을 발휘하는 문학'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영국의 이름난 시인들의 '어린이를 위한 시' 작품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등을 읽고 그 효과를 수용하는 계층은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른다. 우리 나라의 문단이 1920∼1960년까지 지극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우물 속에 들어가 앉아 하늘의 넓이를 재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에게 읽히는 문학 작품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포함하는 (또는 어린이를 더 많은 독자로 여기는) 대상을 위하여 문인이 써내는 시 작품이다. 그러므로 아동이 써내는「아동시」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아동시」와「동시」의 질적인 차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인사(?)들로 말미암아 혼동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 기가 찰 일은, 적잖은 아동문학인들까지 어린이가 써내는 아동시 수준의 것을 자신의 문학 작품으로 읽어달라며 발표하고 있는 현상이다. 아동시와 동시의 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짧게 이야기하자면, 아동시에는 (위에 여러 번 강조한 그대로)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하다. 시가 들어가 있지 아니하다는 말의 뜻은, 체험의 일치를 유발할 내용(또는 철학)이 들어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경륜이 짧으면 체험의 깊이도 얕을 수밖에 없다. 체험의 깊이가 얕으면, 감동시킬 핵(核)이 엷거나 약하거나 또는 없을 수밖에 없다. (이 핵은 바로 시적 요건이다.)
4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글을 동시라고 하면서 발표하는 것을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귀여움을 나타내고자, 예쁜 생각을 꾸려서, 어린이들이 늘 쓰는 낱말을 동원하여, 줄을 끊어서 몇 줄로 써내는 형식.'
이런 형식에 그친 것이 대부분이다. 시는 글자로 형상화된다. 글자로 형상화되므로, 글자가 수단이자 재료이다. 이런 기능을 지닌 글자를 배열하는 데엔, 눈에 잘 안 띄는 기술이 요구된다. 글자를 배열하는 주체(사람 = 어른 = 문인)는 글자들이 이루는 줄 사이 어딘가에 자기 체험을 깔아서 직접 나타나지 않는 어떤 생각(체험의 연장)을 불러 일으키는 기술을 숨겨 넣어야 한다. (이런 기술 숨겨넣기가 쉬운 것이 아니므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동시에도 이런 기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푸념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벽돌 쌓기처럼 고운 말을 쌓아 연결시키면, 재미있다고 어린이가 손뼉을 친다. 그러면 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 아닌 항의에 맞서서 대답을 하면, 곧이어 나오는 한마디가 '그건 어린이에게 난해하다'이다. 이런 사람에겐 당분간 대답을 안 하는 것이 상책이다. 받아들일 수준이 못 되기에 그렇다. 좀더 문학을 알게 되고 좋은 동시 작품을 읽게 되고, 그래서 혼자서라도 좋은 동시에서 오는 잔잔한 감동을 느껴보게 된다면, 그 때 비로소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하게 되리라. 교직자로 일생을 보내다 퇴직한 교감, 교장 출신 아동문학인이 발표하는 작품을 보면 대부분 대칭 기법을 쓰고 있다. 대칭 기법이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 연에서 '맑은 하늘'을 쓰면 두 번째 연에선 '푸른 바다'를 쓴다. 첫 연에서 '푸른 산'을 쓰면 다음 연에선 '깊은 강'을 쓴다. 이런 식이다. 이런 식은 동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동시를 뜯어맞추는 것이다. 1920년대 창가(唱歌)라는 것이 있었다. 창이니 타령이니 하는 악보 없는 노랫가락만 전수하다가 악보가 있는 노래가 처음 보급되던 그 시기에 불리던 노래다. 오늘날 70대 할아버지 세대가 부르는 학도가(學徒歌)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학교의 교가도 그 즈음에 제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노래의 가사(歌辭)에는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하다. 전형적인 틀에 맞추어 찍어내는 붕어빵식이니 시가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 영향을 아직 못 벗어난 교직자 출신 아동문학인들, 그들은 어린이의 글짓기 경험만 가지고 동시를 쓴다고 나선다. 시를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으므로「자신」을 모를 수밖에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짜맞추기씩「동시」의 본보기를, 그래서 써내게 되는 것이다.
5 조선 시대의 시조 틀에서 최남선에 의해 자유로워진 것이 1920년대 1차 시의 해체이다. 그리고 신체시라는 이름으로 자유시가 씌어지고 퍼지고 한 것이 지난 30년간이다. 이 30년 동안에 윤석중이 정형율(3,4조, 4,4조, 7,5조 등)에 맞게 동요와 동시를 개발하고 보급시켰다. 정형율에 맞도록 써냈기 때문에, 작곡가들이 곡을 붙이기에 아주 수월하였다. 그래서 동요는 부르는 노래와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 혼용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윤석중은 우리 나라 최초의 동시집을 내면서 동시의 문학사적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요즘 신현득이 새로 쓰는 '한국 동시사' 연재에서 밝혔듯이, 우리 나라 자유 동시는 1950년대 말에 2차 시의 해체가 시도된다. 신현득은 '유경환. 조유로, 박경용, 신현득'에 의해서 주창되었다고 썼다. 가장 정확한 기술이다. 어떤 아동문학사(史)의 기술에는 이와 다르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저자가 ○○지방 아동문학사의 기본 자료를 가지고 ○○대신 한국을 붙여 개작하였기 때문에 생긴 오류인 듯하다. 유경환이 1950년대 말에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기치를 들었을 적에, 지면을 내준 곳은 배영사와 그리고 교육자료사였다. 이 기치에 때맞춰 이론으로 걸맞게 옹호하고 나선이가 박경용이고, 조유로는 그 때까지 중앙에는 낯선 이름이었으며 2년 뒤에 신현득이 작품으로 동참하였다. 필자가 1950년대 말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고 외쳤을 적에, 당시 아동문학계는 건방지다는 투의 시선을 보냈다. 다만 이원수만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데 그런 말을 하려면 우선 작품으로 보여줘야지… 나는 유군이 동화를 쓸 줄 알았는데….' 라고 하였다. 이원수는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내게 제1회「소년세계문학상」을 준 분이다. (당선작은 동화 '오누이 가게', 상으로 받은 금 5돈·메달 형식을 팔아서 1953년 고등학교 입학 등록금으로 요긴하게 쓴 것을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 있다.) 1957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작 없는 가작, '아이와 우체통')를 선고(選考)한 윤석중, 어효선(그 뒤 50년간 줄곧 가까이 찾아뵙곤 하였지만)은 필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번 더 응모하여 당선작을 내놓으라'는 충고를 따르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다. (1957년 11월호 <현대문학>지에 박두진에 의해 초회시 추천이 이루어졌고, 1958년 4월호로 추천 완료 등단하였기에) 그러나 신현득은 2년 뒤에 가작 그리고 당선의 절차를 밟아 마친다. 이런 상황과 분위기에서 '동시도 먼저 시이어야 한다'는 외침은, 저항이나 거역으로 비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다행이도 박경용이, 필자와 사전 의논이라도 한 듯, 같은 주장을 펴준 덕택에 기진할 일이었으나 문단에서의 외로움을 참고 견뎌낼 수 있었다. 필자는 이원수의 '작품으로 해야지…'하는 말에 걸려서 서둘러 첫 동시집 <꽃사슴>을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책방 겸 출판사인 숭문사에서 낸다.(1966) 이 때 숭문사에서 함께 나온 황영애의 동화집, 최효섭의 동화집을 기억한다.
6 동시도 시이므로, 시적 수준에 이른 것만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에 맞대고 나온 것이 동시의 난해성이라고 앞서 말했다. 난해성을 들고 나오면서 방어 태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강 다음과 같은 보충 설명을 붙인다.
'동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글이기 때문에 쉬워야 하며 또 재미있어야 한다. 동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우선적 조건이다.'
이 말은 반만 맞고 반은 맞지 않는다. 우선적 조건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우선적 조건은 '우선 시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가 안 되어 있는데 쉽고 재미있으면 시인가? 그런데 적잖은 아동문학인들이 '쉽고 재미있는 운문이면 되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운문에서 시는 왜 찾아?' 라고 아전인수격의 주장을 편다. '쉽고 재미있으면 된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갖추어야 할 시적 요건은 슬며시 흘려버리는 태도다. 색깔 있는 나무토막이나 장난감 레고같이, 낱말을 짜맞추어 읽기 쉽고 보기 좋게 틀을 짜놓고서, 이를 동시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겐 동시의 감동이 중요할 수가 없다. 동시를 어린이의 입재롱 놀이감쯤으로 여기는 태도이기에 그렇다. 시의 감동, 이는 시를 살리는 요체다. 동시에서도 똑같다. 동시를 읽고난 뒤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더 이상 읽겠는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될 경우 한 번 더 읽을 수 있겠다. 그래도 감상이 안 되면 체험의 일치를 위한 바탕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겉만 동시 형식이지 속이 없는 박제된 새, 곧 표본실의 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2004년 겨울『한국동시문학』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