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이의 여행
하 빈
방울이는 아주 작습니다. 아주 작고 가벼운 물방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둥둥 떠다닙니다. 높게 높게 떠다닙니다.
방울이가 감당하기엔 하늘은 너무 넓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은 하늘에 동그마니 혼자 떠다닙니다. 사방 둘러보아도 삭막하고 텅 빈 공간뿐입니다. 넓디넓은 하늘에 자기 혼자뿐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쓸쓸해집니다. 무서워도 집니다. 무섭고 쓸쓸해지니 옛날 행복했던 고향 생각이 절로 납니다.
"고향에 가고 싶어."
방울이의 고향은 땅입니다. 언젠가 따가운 햇볕과 땅의 열기가 자기를 하늘로 밀어 올렸습니다.
방울이가 처음 하늘로 올라 왔을 땐 참 신났습니다. 가없이 넓은 공간, 맑고 상쾌한 공기, 너무나 깨끗한 코발트색 하늘,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산과 강, 바다, 집들도 아득히 아래로 내려다보입니다.
"와-! 비행기도 내 밑으로 지나가네."
그때만 해도 마냥 신났습니다. 그러나 신나고 신기한 것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곧 모든 것이 시들하고 지루해져 버렸습니다. 처음 가슴이 확 트이던 넓은 하늘은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공간으로 변해 버렸고 상쾌하던 바람도 으스스하기만 합니다. 혼자라는 사실에 또다시 외로움이 싸- 하고 밀려옵니다. 특히 밤이 되면 더욱 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깜깜한 어디선가 불쑥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고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도 어렵습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높은 하늘에 총총한 별들입니다. 옛날 고향에서 보았던 그 별들입니다.
별똥별 하나가 황금빛 사선을 그리며 지나갑니다. 별나라 아기별이 마실 나왔다가 길을 잃었을까요. 아니면 부모님 말씀 안 듣다 쫓겨난 개구쟁이 별일까요. 내가 너무 외롭고 불쌍해 보여 친구 되어 주려고 오는지 몰라. 그런데 오다가 왜 자꾸 사라져 버리지. 그래도 가끔씩 지나가는 별똥별이 크나큰 위안이 됩니다.
"무섭긴 하지만 차라리 밤이 나을지 몰라, 밤엔 별이라도 있지. 외로운 건 무서운 것 보다 더 견디기 힘들어"
외롭고 무서우니 생각나는 건 고향밖에 없었습니다. 땅이 너무 그립습니다.
"그래, 고향으로 가는 거야. 다시 땅으로 내려가는 거야."
고향에 가고 싶은 방울이는 아래로 아래로 날아 내려옵니다. 그러나 얄미운 바람이 방해를 합니다. 방울이는 너무 작고 힘이 없어 바람을 뚫고 아래로 내려 갈 수가 없습니다. 몇 번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가자 방울이는 울상이 되어
"거기 누구 없어요? 있으면 저 좀 도와주세요. 친구들아 나 좀 도와줘, 제발 도와줘, 도와줘."
방울이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공에다 대고 몇 번이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텅 빈 공간에는 메아리조차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방울이는 눈감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 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방울이의 기도가 통했는지 어디선가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떠 보니 수많은 물방울들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삼오오 몸을 섞어 몸집을 키웁니다. 친구들도 방울이와 똑 같은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무섭고 외롭고...... 누군가 불러 주기만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 방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방울이도 여러 친구와 몸을 섞어 제법 큰 물방울이 되었습니다.
"그래, 이만하면 심술쟁이 바람도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거야."
방울이는 깨닫습니다. 여럿이 힘을 모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못할 일도 없을 거라는 것을.
방울이는 수많은 친구들과 무리 지어 땅으로 고향으로 내려옵니다. 이제는 바람도 몸집이 커진 방울들의 위풍당당한 기세에 눌려 감히 방해를 하지 못합니다. 땅이 가까워집니다. 그리운 고향이 가까워집니다. 방울이의 가슴은 설레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 홀로 외롭게 떠돌았는지...
이제 곧 그리운 고향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가까워지면서 방울이는 의아해 합니다.
"이상하네, 내가 옛날에 보았던 고향이 아닌 걸."
맑은 바람 속삭이던 푸른 숲과 산등성이는 깎이어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차지하고 종달새 넘나들던 넓은 들판엔 공장들이 줄지어 들어서 뿌연 매연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아니야, 여긴 내 고향이 아니야. 내가 그리워하든 그 땅이 아니야."
크게 실망하고 있는 사이 방울이는 회색도시 바로 위까지 내려 왔습니다. 바로 눈 아래로는 널따란 길 위로 끝도 없이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한 매연을 뿜어내며 달리고 있습니다. 집들과 집들 사이엔 어김없이 높은 담장들이 둘러 쳐져 있고 담장 위론 가시 달린 철조망이 쳐져 있기도 하고 날카로운 사금파리가 꽂혀 있기도 합니다.
"안 돼, 안 돼. 저기 떨어지면 안 돼. 너무 아플 거야."
방울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립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방울이는 정신을 잃고 맙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시끄러운 소리에 방울이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불행 중 다행으로 사금파리 담장을 피해 바로 옆 공사장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나 봅니다. 아마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었다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부들의 비설거지 소리에 깨어났나 봅니다.
방울이는 친구들과 함께 공사장 폐못과 벽돌조각에 찔리고 부딪히며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씹다 버린 껌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뒤엉켜 심한 악취를 뿜어내는 주택가 골목을 지나 큰길로 가는 길목까지 왔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한 아저씨가 길목 어귀 포장마차에서 나와 무엇이 못 마땅한지 가래침을 '칵'하고 돋우어 우리정수리에다 뱉으며 투덜댑니다.
"도대체 누굴 위한 개발이란 말인가? 에이 더러운 세상, 그래 너덜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제길."
가래침에서는 시큼벌쭉한 쉬어터진 홍시 감 냄새와 담배 냄새, 술 냄새가 범벅이 된 역겨운 냄새가 났습니다.
분주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엔 수심 어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아마도 칙칙한 도회의 풍경을 닮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옛날 고향에서 보았던 맑고 온화한 미소를 띤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군요.
노란 자동차 한 대가 멈추고 색색의 아주 큰 장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장미는 아이들이 쓴 우산이었습니다. 우산 속에는 장미보다 더 맑고 예쁜 작은 꽃들이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일순간 거리 한 귀퉁이가 환해졌습니다. 아이들만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환합니다.
아이들을 뒤로 하고 자동차가 열나게 달리는 큰길로 나오자 엄청 많은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도 우리 못지않게 험한 행로를 거쳐 왔는지 누런 얼굴에 행색은 남루하기 그지없습니다. 무지막지한 바퀴들이 우리를 짓밟고 지나갑니다. 우리는 쫓기듯 흘러 흘러 개천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코를 찌르는 악취에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공장에서 흘러 온 기름 냄새, 가정에서 흘려보낸 세제 및 음식쓰레기 냄새. 심지어는 누구네 정화조가 넘쳤는지 구린내까지 납니다. 거품, 스치로폼, 페트병 등 온갖 쓰레기들이 둥둥 떠다닙니다. 방울이는 코도 막고 눈도 감아 버렸습니다.
감은 눈 저 너머로 그 옛날 고향이 보입니다. 푸른 잔디와 씩씩한 나무들, 온갖 새들이 노래하는 향기로운 숲. 산토끼와 다람쥐가 사이좋게 사는 동산, 옹기종기 지붕아래 오순도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그 시절엔 철조망이나 사금파리의 공포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폭신한 황토 마당에 떨어지면 텃밭에서는 오이 냄새가 났습니다. 초가지붕에 떨어지면 상큼한 짚 향기가 우릴 반기는 듯 했습니다. 꽃잎 위에 떨어지면 또 어떻구요. 비로드처럼 부드러운 꽃잎 속에 몸을 누이면 은은한 꽃향기가 꿈결 같았죠. 커다란 파초 잎에 떨어지면 또르르 미끄럼 타기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참새 깃털 위에 떨어지면 참새가 푸드득 몸을 털어 우리는 찬란한 햇빛 속으로 유리알 같이 흩어지며 작은 무지개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친구들을 만나 실개천을 만들면 이름 모를 들꽃들이 방긋방긋 미소 짓는 오솔길을 지나 쉬리 버들치 동사리들이 수초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시냇물과 만납니다. 동구 밖 방앗간 물레방아에서 빙글 떨어져 정신이 아득해 지기도 하지만 곧 푸른 들판을 지나 더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맑은 냇물이 되어 졸졸졸 노래하며 흘렀습니다. 돌이켜 보면 너무너무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졸졸졸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방울이는 어떤 기대감에 눈을 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하수관에서 또 다른 탁류가 개천으로 흘러들어 오는 소리였습니다.
“여기는 너무너무 싫어. 이런 곳이 고향이라면 차라리 외롭고 무서워도 하늘을 떠도는 게 났겠어.”
속상한 마음에 자신을 원망해 보기도 합니다. 절망스러운 가운데서도 방울이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옛날 고향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야 사라진 게 아니고 내가 잘못 찾아온 걸 거야,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방울이는 악취를 참으면서 부지런히 바다로 흘러갑니다. 햇볕이 내려 쬐고 바다가 뜨거워지면 다시 하늘로 올라 갈 겁니다. 그때는 틀림없이 옛 고향을 꼭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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