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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간증 막노동에서 '진흥문화사' 회장으로

열국의 어미 2010. 5. 11. 19:55

막노동에서 '진흥문화사' 회장으로

 

힘들 때마다 기도 되새기며 매주일 감사헌금

 

맨주먹 신화’. 진흥문화사 박경진 장로를 말할 때 붙는 수식어 가운데 하나로 이제껏 그를 인터뷰한 여러 매체에서 흔히 사용했던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 매출액 100억이 넘는 진흥문화사의 시작은 맨주먹 뿐 이었다.

 

1969년 네 식구가 서산에서 무작정 상경한 뒤 막노동을 시작으로 쌀집 배달원, 노점상 등 닥치는 대로 일했던 박 장로가 인쇄업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달력 영업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76년 그가 남의 사무실 한구석을 빌어 진흥문화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림이 귀해 어쩌다 외국을 다녀온 사람이 성화가 담긴 액자를 가져오면 많은 사람이 그 액자를 자신의 집에 걸어두고 싶어했다. 그 또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예수님의 모습을 집집마다 걸어둘 수 있다면 이를 보며 기도하고 가정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며 만든 것이 성화달력이었다. 이렇게 첫걸음을 땐 진흥은 지금껏 달력과 기독교 관련서적, 용품 등을 만들며 이제 이 분야에서만큼은 경쟁상대를 찾기 힘들다. 진흥의 자라온 과정이 순탄해 보이지만 돌아보면 어려움이 많았다. 불혹의 나이가 되기까지 박 장로는 ‘다음 끼니를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걱정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그 은혜의 시작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였다. 박 장로의 어머니가 그를 태 중에 갖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출근길에 나섰던 아버지가 전깃줄에 걸려 땅에 떨어진 꿩을 주워 그의 어머니에게 ‘몸보신 하라’며 던져주고 갔다. 어머니가 집 안마당에 떨어진 꿩을 들어보니 꿩은 하늘로 날아오르다 전깃줄에 부딪힌 충격으로 한 쪽 눈은 뜬 채로, 나머지 한 눈은 감긴 채로 죽어있었다. 그것이 경진의 모습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몇 달 후 경진이 태어나자 어머니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진은 임신 중 먹었던 꿩과 똑같은 모습으로 한 쪽 눈을 뜰 수 없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남과 다르다’는 것. 그것이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장점이라면 모를까, 그것 때문에 놀림받으며 마음 아파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다. 특별히 마음속에 악의를 품고 던진 말이 아닐지라도 ‘장난으로 던진 돌에 맞아 개구리는 생명을 잃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처지가 그랬다. 어린 시절 형제들과 친구들이 한 번씩 던진 놀림은 그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서로 사이가 좋을 때라면 잊은 듯 하다가도 다투기나 싸움이라도 할 때면 ‘눈짜그랭이’라며 그의 신체적 약점을 여지없이 물고 늘어졌다. 이런 일로 마음 깊이 상처를 안고 있던 어느 날, 그의 눈에 공산군을 피해 내려 온 피난민들의 예배드리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가 큰 의미로 다가왔고 그렇게 그들을 따라 예배에 참석하던 것이 예수님을 믿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했고 어머니를 통해 집안 모두가 기독교 가정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숱한 어려움과 핍박, 고통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기기 위해 금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식사를 금식하는 등 일주일에 두끼씩을 금식하며 그것으로 봉헌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가난, 여기에 한 쪽 눈까지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지내야 하는 장애까지 있으니 제 인생에 좋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만일 제게 장애가 없었다면 또 가난한 삶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이렇게 믿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독한 역설이다. 은혜 받지 않은 사람도 흉내는 낼 수 있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일 것이다.

말뿐만이 아니다. 현재 진흥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그의 아들 형호 씨에 관한 일화 한 도막은 박 장로와 그의 부인의 삶이 하나님 앞에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된 형호 씨의 도벽은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아이를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도무지 말이 먹히지 않았고 말하는 그때뿐이었다. 그의 부인은 아이를 위해 밤마다 담요를 싸들고 교회를 찾아 기도했다. 기도하다 교회에서 잠들기를 아이의 도벽이 끝나던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계속했고 매주일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드렸다.

 

이때부터 드린 감사헌금이 신앙의 습관으로 자리잡았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매주일 감사헌금 드리는 게 놀랄 일인가요? 어떻게 한 주일을 살면서 감사한 일이 하나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감사헌금 드리지 않는 게 더 신기하고 놀랄만한 일이죠” 매주일 감사헌금 봉투에 예물을 담고 기도제목을 적어 넣었다. 그가 체험한 감사헌금의 위력은 컸다. 감사헌금을 통해 감사할 일이 끊이지 않고 있음은 물론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을 바꾸는 원동력이 됐다. 비단 감사할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지독한 가난을 헤쳐온 그가 지금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헌금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단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진흥이 100억대 매출을 기록하며 성장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진흥의 성장은 양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박 장로는 진흥을 ‘크리스천 하우스’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진흥을 그렇게 불러주기 바란다. 이런 그이의 바람은 진흥의 사훈에 깊이 배어있다. “책임은 내가 지고, 명예는 상사에게, 공은 부하에게” 28년을 오직 하나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며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곳, 또한 기독교 문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박 장로가 꿈꾸는 진흥이다.

 

최근 대표이사직을 아들 형호 씨에게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난 그이지만 바쁘기는 진흥에서 사업을 키우던 때보다 지금이 더 하다. “한국교회가 짧은 시간 안에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 양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기독교 정착 당시에 희생당한 순교자들의 공이 컸기 때문이죠” 이런 그의 말을 통해 엿볼 수 있듯 현재 박 장로는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봉사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쁜 시간을 지내며 인생의 황혼기를 불사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