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미워해도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7~18).
내가 태어날 때의 이야기이다. 신의주 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계시던 어머니께서 첫 아이로 딸을 낳은 뒤라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둘째는 아들 낳기를 소원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들. 딸 구별이 심하지 않지만,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아들 선호 사상이 매우 뚜렷했기에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외할머니는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똑똑하시고 깐깐하신 분이셨다. 외할머니께서 외동딸인 최자실 목사님이 아들 낳는 것을 보고 싶으셔서 맏딸인 언니의 젖을 일찍 떼게 해서 본인이 키우셨다. 그래서 두 번째 임신했을 때는 아들 낳기를 상당히 바라셨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들은커녕 딸 쌍둥이를 낳아버리신 것이었다. 그 때 태어난 쌍둥이 중 한 명이 바로 나다.
아들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딸 쌍둥이가 나왔으니 그것을 기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우리 외할머니는 너무 실망이 크셔서 태어난 쌍둥이들을 제대로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하셨다고 한다. 심지어 산모를 앞에 놓고 외할머니가 아버지에게 “누구의 혈통으로 쌍둥이가 태어났느냐?”라고 따지시기까지 했다. 그러자 아버지도 김 씨 혈통에는 쌍둥이가 없다고 하셨는데, 후에 아버지 쪽의 친척이 딸 쌍둥이를 낳는 바람에 그 다툼은 아버지께서 지신 셈이 되었다.
입에 은수저를 물로 태어났다고 하여 유복한 집안에서 환대 받으며 태어나는 아이도 있지만 우리 쌍둥이 자매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태어났고, 그나마 딸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은 몸이 너무 약해서 일찍 세상을 떠나 나만 남았다. 그리고 외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원을 푸셨다. 내 아래로 그토록 원하시던 아들을 둘 낳으신 것이다.
안 그래도 나를 예뻐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시던 외할머니는 내 밑으로 남동생들이 태어나자 안심하셨다. 딸이 시집가서 아들을 둘 낳았으니까. 원래 할머니들은 첫 손녀나 손자를 끔찍하게 위하는 경우가 많다. 특별이 본인이 직접 키우셔서 그러신지 외할머니께서는 첫 손녀인 언니에게 맛있는 음식도 부지런히 챙겨 먹이시곤 하여 언니는 체격도 좋았으나 나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주신 기억이 별로 없다. 체격이 좋은 언니나 동생들에게도 일을 시키긴 했지만 그들은 외할머니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일 때 폐병이 걸린 친척 한 분이 우리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제일 몸이 약했던 나는 폐병이 걸려서 초등학교를 1년 휴학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독 몸이 약했다. 외할머니께서는 식사시간에 입맛이 없어 잘 먹지 못하는 나에게 “너는 밥알을 세면서 먹느냐?”며 꾸중을 하시곤 했다. 그렇게 나에게 정을 주지 않으시고 일만 시키셨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주어진 일이 힘겨워도 순종할 따름이었다.
집 안 아이들 중에서 유독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 애가 제일 일을 많이 하게 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였다. 집안아이들 중에서 부모의 말을 제일 잘 듣고 효도하는 아이가 이다음에 커서도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다고 한다. 나는 외할머니께 귀여움을 받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토끼와 돼지 등을 키웠는데, 외할머니께서 나에게 해군부대에 가서 먹다 남은 짬밥을 가져오는 일을 시키셨다. 나는 커다란 깡통을 들고 부지런히 달려가서 낑낑대며 그것을 들고왔다. 또한 토끼풀 뜯어 오늘 일도 내 몫이었다.
아침에 들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 토끼풀을 뜯고 나면 손가락에 풀 옴이 옮아 가려워서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일을 하기 싫다고 꾀를 내거나 외할머니께 반항을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께서 시키시는 일은 열심히 했고, 용돈이 생기면 모았다가 외할머니께서 좋아하시는 홍시 등을 사다 드리기도 했다.
어머니께서도 남동생들을 더 예뻐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라 내가 음악을 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나를 데리고 나가 냉면을 사 주시기도 하고 위로도 해 주셨다. 나는 주위에서 “엄마가 좋으니? 아빠가 좋으니?”하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아빠가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는 사람들은 “어, 참 이상하다. 애들은 거의 다 엄마가 좋다고 하는데 너는 아빠가 더 좋다고?”하며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어릴 때 순한 성격이어서 친구들과 놀다가 다툼이 일어나도 제대로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이 “너는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한 마디도 화를 내지 못하고 참고 있니?”하며 내게 답답하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 어느 날 외할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성혜야, 미안하다. 내가 너를 그동안 미워한 것을 용서해다오. 너는 내 말을 제일 잘 들었는데, 네 언니에게만 잘해주고 너에게 잘 못해줬다.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외할머니께 드린 내 정성에 감동하셨던 것 같다. 나는 섭섭했던 마음을 다 풀었다. 그동안 외할머니의 미움을 받으며 궂은일을 하고 마음고생을 했지만 그 말씀을 들은 후로는 마음이 기쁘고 편안했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외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외할머니와 화해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외할머니께서는 또 유언을 하셨다. “내가 사랑하는 복자를 데려가겠다.” 소천하신 뒤 보름 정도가 지났을 때 정말 언니도 세상을 뜨게 되었다.
당시 언니는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친척을 따라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그 후 언니는 몸이 아파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어머니는 사업에 더 열중해 있었다. 언니는 병실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자주 찬송가 269장을 불렀다고 한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건 불 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
나의 어머니 최자실 목사님은 한 달 사이에 사랑하는 엄마와 큰 딸을 잃었지만, 병원에서 딸이 어머니를 위해서 찬송과 기도를 했다는 얘기를 들으신 뒤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 신학교에 입학하셨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지만, 가족이 함께 살고 형제자매가 많다보면 그중에 더 미움을 받고 더 사랑을 받는 아이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바로 미움 받는 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제일 많은 축복을 주셨고, 건강을 주셨고, 많은 귀한 사역들을 맡겨 주셨다.
어린 시절에 미움받으며 태어나고 미움 받으며 자랐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신다. 외할머니께서 나를 아무리 미워해도 나는 외할머니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어찌해서든 화목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함께 미워하고 속상해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선한 마음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것이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7~18).
인생은 파도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이 계신다”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이끌고 있는 조용기 목사의 내조자는 자신의 인생을 험난한 바다 가운데 내던져진 배에 비유한다. 어려운 천막교회 개척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크고 작은 거센 파도는 덮쳐 왔고, 절박한 상황 가운데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을 체험해 왔다.
김성혜 사모가 최근 펴낸 자서전 ‘파도 위에 계신 주’는 그녀의 힘겨웠던 어린 시절과 어머니 최자실 목사를 따라 천막교회에서 봉사할 때부터, 조용기 목사의 사모이자 한세대학교 총장으로 활동하는 현재까지 인생의 모든 과정이 파도와 같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저자는 아들을 원했던 외할머니로부터 미움을 받는 등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겨울 코트 하나 없어 얇은 옷으로 겨울을 지내던 시절 어린 김성혜 사모는 당시부터 무조건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저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신이 된 천막교회 시절을 ‘앞날을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로 기억했다. 최자실 목사가 구입했던 불량 천막에는 빼빼 마른 청년 조용기 전도사가 설교하고 있었고, 저자와 두 동생만이 있는 천막 안으로 비를 피해 들어 온 할머니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당시 천막 안에 받쳐놓은 양동이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맞춰 찬양했던 기억을 저자는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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