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 수술과 영성 (김득중 박사: 전 감신대 총장 )
서울 시내 어느 교회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IMF를 맞아서 어느 장로님의 작은 사업 하나가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사를 살리려고 버둥버둥 대다가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사업을 살리려면 돈이 필요한데 목사님 개인 주택 담보로 돈 좀 빌려주실 수 없습니까? 그 돈으로 사업을 살리면 곧바로 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분은 믿음이 좋은 분이라 소문나 있고, 실제 교회 봉사에도 늘 앞장서는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집을 담보로 1억5천만원을 대출받아 장로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장로님의 사업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 장로님으로부터 돈 이야기가 없습니다. 어느 날 장로님이 목사님과 마주 앉는 일이 있어서 목사님이 힘들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이제 사업도 살아나고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은행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장로님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무슨 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모님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믿는 장로님이었기 때문에 문서작성 없이 돈을 넘겨준 것이 탈이었습니다. 돈 빌려준 것을 아는 사람은 목사님 내외분과 장로님 세 사람 뿐이기 때문에 목사님은 돈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거기까지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어느 시골 큰 강 옆에 마을이 있었고 장로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했는데 그 목사님이 보니까 교인들이 착하고 순진하고 헌금도 잘 합니다.
“내가 참 잘 왔다. 오래 이 교인들과 신앙생활을 해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부정한 생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큰 강은 상류의 밀림지대부터 하류의 목공소까지 나무를 띄워 운반하는 역할을 했는데, 교인들 상당수가 밤이면 몰래 떠내려가는 통나무를 훔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목사님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상당수 교인이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랜 기도와 고민 끝에 주일 설교 제목을 다음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목사님은 주일에 십계명을 읽으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도적질을 원치 않고 축복대신 심판을 하신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 후 교인들은 목사님과 나가며 악수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에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자기의 설교를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한 목사님은 주보에 제목을 좀더 정확히 밝히기로 했습니다. “떠내려 오는 남의 통나무를 도적질하지 말라” 설교를 다 끝내고 목사님이 나가서 악수를 하려고 하자 많은 교인들은 목사님이 서 계신 정문이 아닌 옆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요즘 성형수술 바람이 불면서 수많은 여자들이 외모를 고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면을 등한시하고 외모에만 치우치는 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예수님은 외모에만 치우친 바리새인들을 꾸짖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했습니다.
겉은 정말 경건하고 의로웠지만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잘 다니고 헌금을 잘 한다고 진정한 영성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내면의 진정한 영성을 갖추는 것이 복을 받는 진정한 길입니다.
나를 만든 어머님의 신앙 (김동길 : 전 연세대 부총장)
우리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사업도 실패했고 광산에 정신이 팔려서 거기만 다니시니 논도 밭도 없는데 어떻게 애들을 혼자서 키우며 삽니까?
애들을 데리고 평양에 나오셔서 처음 10년 동안은 이사를 14번 하셨다고 합니다. 저한테는 누님이 한 분 있었는데 큰 딸을 공장에라도 보내면 좋을 텐데 저희 어머니는 그 시대에 보통학교 요새 말하면 초등학교, 여학교에보내 다니다가 졸업을 하고 나왔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들도 아니고 딸을 왜 학교에 보내냐고 했지만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하시곤 했습니다. "뉘 집에서는 돈을 쌓아놓고 아이들을 가르칩니까?"
그 당시에는 너무 살기가 어려워 딸들을 기생으로 보낸 어머니들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해야 한다며 학교를 보내셨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딸을 기생학교에 보냈으면 나중에 그 딸이 이화여대 총장도 하고 교육부 장관도 했겠습니까.
이런 삼복더위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는데 삯바느질을 하시며 부르시던 찬송소리가 내 귀에 쟁쟁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이렇게 찬송을 들으며 우리는 자랐습니다. 누님을 이화여전 보내면서 저는 또 평양의 좋은 학교에 보내주시면서…….
등록금을 제대로 내 본 적이 없었지만, 어머니가 믿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먹고 사는 거 힘듭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보드랍게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쉬운 사람들은 협잡꾼들이예요. 그런 사람들 다 하나님이 언젠가 심판하실 겁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계시는 어미니들 모두 희망을 가지세요. 남편이 광산에 미쳐도, 가난해도 걱정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결혼에서 중요한 조건은 미모와 돈이다?
결혼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첫눈에 반해서 사랑하고,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는 결혼생활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얼굴이 잘났다고 해서 꼭 인격이 훌륭하고 사랑의 대상으로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혜롭게 잘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몇 해 전 결혼식 주례를 선 적이 있습니다. 신랑은 미국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자, 신랑 부모는 며느리만은 한국에서 얻어야 한다며, 한국에 있는 젊은 아가씨를 미국으로 초대하여 아들과 선을 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랑은 그 여자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고,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부모에게 소개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신랑 부모는 이 여자를 보고, 가족의 내력을 보니, 너무도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한심하다는 것은 여자측 가정이 돈이 없다거나 사회적 지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아들을 맡기고 며느리로 데려올 만한 집안이 못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는 조금 더 두고 보자며 당장의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억지논리를 펴자, 부모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당시 저는 주례를 하면서 신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신부는 아담하고 예쁜 미모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신부측에 앉아 있는 그의 부모, 특히 엄마를 보니, 교양이 없는 듯 시끄럽게 얘기하고 있었으며, 더욱 가관인 것은 얼굴이 너무도 못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의 생김새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부모를 보고 있으니, 주례를 보면서도 ‘저렇게 교양이 없고 못생긴 엄마에게서 어떻게 이런 어여쁜 딸이 나올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결혼식은 성대하게 마쳤습니다. 한국에서의 결혼식을 마치고, 신랑은 신부를 초청하겠다고 하면서 먼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신부를 초대하려면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일입니까? 갑자기 그 여자 집안을 잘 안다는 사람이 와서 신부는 예전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온통 성형수술 한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이야기를 듣던 신랑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원래대로 흉측하게 나오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결국 신부는 결혼식만 올렸지, 미국의 신랑에게서 초청을 받지 못해, 깨어진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 성형으로 미인 비슷하게 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얼굴은 자연미, 곧 부모가 낳은 그대로가 최고라는 사실입니다.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한번 손을 대면 계속 수술해야 합니다. 그만하면 괜찮아 보이는데도 자꾸 “코를 올려주세요” “턱을 깎아 주세요” 합니다.
성형수술 잘못하면 나이 들면서 얼굴이 이상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이 아닙니다. 돈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실된 사랑이야말로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약함은 은총의 통로입니다.(고용수 교수)
아무리 뛰어난 토기장이도 단단한 흙으로 토기를 만들 수 없습니다. 대장장이가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단단한 쇠붙이로 기술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불 속에 쇳덩어리를 넣어서 물렁물렁해질 때 그것을 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도구들을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단단한 마음, 닫혀있는 교만한 마음속에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의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아라는 벽이 두꺼우면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주의 능력이 아무리 커도 우리 마음속에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자리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약한 상태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 수도 있고 능력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시면 기독교세력이 참으로 강한 때는 바티칸이 아닌 카타콤에 있었다고 합니다.
외형적으로 화려한 중세 때보다는 핍박 받을 그 때에 오히려 그때 기독교의 세력은 참으로 강한 때였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혹시 마음에 억울함이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질병이 있습니까? 가난으로 고통을 당하십니까? 아니면 사업의 실패로 세상의 낙오자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앉아 계십니까?
그런 분들께 여러분의 약함이 주님의 은총의 통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커다란 능력과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열린 순간입니다.
성결대학교의 설립에 숨겨진 권사님의 헌신 (정상운목사 성결대 총장)
제가 총장으로 있는 성결대학교의 역사가 벌써 44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큰 대학에 종합대가 되었지만 처음 김응조목사가 설립할 때에는 그 분 집에서 시작했습니다. 40명을 뽑아서 2층집에서 가르쳤는데 1년 후 80명이 되니 도저히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김응조 목사는 안되겠다 싶어 미국에 들어가 미국교회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기도하는 중에 어떤 응답을 받았는가 하면
"너는 왜 미국사람만 보느냐? 하나님은 한국에도 계시지 않느냐?"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와 한국에서 모금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홍대실 권사님이란 분을 찾아갔었습니다.
목사님이 인사를 하자 권사님이 반갑게 맞으며 밥상을 먼저 차려주시더랍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권사님이 내가 온 이유를 알고 밥만 먹여 보내려나보다."
말을 못하고 밥만 먹었는데 식사 후에 권사님이 묻더랍니다.
"목사님 어떻게 저희 집에 오셨어요?"
목사님이 얼른 신학교를 지어야 한다고 했더니 권사님이 의외로 이렇게 대답하시더랍니다.
"목사님 걱정 마세요. 제가 신학교를 다 지어드리겠습니다."
권사님은 서울 행촌동에 있던 땅을 아무 조건도 없이 헌납해주셨습니다.
3층 건물로 지었는데 목사님보다 권사님이 더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목사님 한층 더 올립시다."
그래서 4층 건물이 되었습니다.
이 권사님이 성결대의 4대 이사장이 되었는데 학생들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그곳이 비좁아지자 권사님은 다시 안양 땅을 내놓았습니다.
행촌동 건물을 교단건물로 사용하고 저희 대학이 안양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대학은 오늘날 6천명이 되는 종합대학이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신학교만 지은 게 아닙니다. 단독으로 8개의 교회를 지었었습니다.
그런걸 보면 그 권사님 참 부자인거 같지요? 맞습니다. 부자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가난했습니다. 그분 자신은 매우 검소했습니다. 자기 막내딸이 이대를 들어갔는데도 큰시누이가 입던 것을 재단해서 다시 입힐 정도였답니다.
봄이면 새끼 병아리를 구입하여 수백 마리 키워 판 후에는 몽땅 교회와 복음 전하는데 바치면서 70평생을 산분이십니다.
저는 그분 일대기를 정리해서 책으로 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제 2의 홍대실 같은 분이 나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철저히 헌신을 하는 믿음의 부자가 되면 모든 것이 형통해집니다.
직업은 고통인가? (주명수 목사)
세 명의 석공들이 돌을 깎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 한 사람이 세 석공중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돌을 깎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나그네는 옆에서 돌을 깎고 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돈을 벌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나그네는 마지막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나는 지금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어떤 마음과 어떤 믿음을 가지고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노동이라는 것이 단지 생계의 수단이고 하나의 고통으로 여겨질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전을 짓는 것과 같은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동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비롯된 하나님의 저주라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노동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고 인간에게 부여된 고통의 한 요소인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종신토록 수고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이다.” 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들은 노동 속에서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노동과 안식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노동하지 않고 놀고 먹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 합니다. 노동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 것을 법으로 정해 놓은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안식일에는 전혀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하면 죄인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는 자주 논쟁이 되었던 것도 바로 이 안식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안식을 위하여 열심히 종교행위를 하였지만 그들은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한다고 하지만 안식을 얻지 못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안식은 노동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동하는 가운데서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하는 노동은 큰 의미를 찾습니다.
노동 명령 또는 문화 명령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반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명령은 곧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복으로 주신 노동 명령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이 신성한 노동이 고통으로 여겨졌고, 생계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노동할 때에야 비로소 노동의 원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제부터 참 안식은 노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노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 땅에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가 하는 노동까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통하여 그 노동 가운데서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이제 그에게 노동은 고통이 아닙니다.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중요한 사역이 됩니다. 그에게는 노동이 거룩한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지난 6일 동안 세속 가운데서 잘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 다시 세상으로 갑니다. 신앙과 생활을 이렇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소극적이고 패잔병 같습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사회에서까지 사역의 멍에를 메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신도를 해방시켜라」라는 책을 쓴 폴 스티븐슨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참된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을 위하여 망치질하는 것이며, 정확하게 톱질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는 목회를 하다 갑자기 목수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 죄를 고백할 뿐만 아니라 노동하도록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노동하도록 일터를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일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것을 감사합시다. 이럴때 우리는 일터에서 긍정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로 일할 수 있고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노동은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고 가르칩니다. 교회 안에서의 일뿐 아니라 세속 가운데에서의 노동에서도 주를 대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부족했을 때는 믿지 않는 상관을 대하면서 ‘당신이 이 땅에서는 나의 상관이지만 하나님 나라만 가 봐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당신은 마귀의 자녀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이상 겉으로는 순종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난 후에는 그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믿지 않는 상관이더라도 마음으로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부터는 그분을 모셔들인 사람은 누구든지 왕 같은 제사장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만인이 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만인이, 제사장으로서 자기의 직장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혹시 직장에서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은 교회의 사역자가 아니니까 자신이 하는 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직장에서의 일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지고 빨리 예수님이나 재림했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직장 일이 고통으로만 생각되고 피하고 싶은 생각만 드십니까?
노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노동의 신성함이 새롭게 회복되는 경험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노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노동하면서 참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료: 강남금식 기도원 '명사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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