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문학

[스크랩] [2009국제신문 신춘문예동화 당선작]베개 속으로 스미는 아이들 / 장윤진

열국의 어미 2018. 1. 29. 00:11

[2009국제신문 신춘문예동화 당선작]

베개 속으로 스미는 아이들

장윤진

 



"아아악~~~."
은비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간밤 내내 악몽 속을 헤매다 간신히 깨어났지만, 아직도 꿈속인 듯 아찔했다. 온몸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숨까지 헐떡거릴 정도로 무서운 괴물이었다. 외눈박이 눈에 이빨은 날카롭게 번뜩여서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은비는 온 힘을 다해 달아났다. 그러나 곳곳에서 또 다른 녀석들이 달려들었다. 은비가 두 팔을 벌려 소리치는 순간 두 눈을 번쩍 뜬 것이다.
'도대체 어느 사이에 또 녀석들이 스며든 거지?'
은비는 매일 밤 잠 벌레 녀석들의 침투에 꼼짝 달싹 하지 못했다. 녀석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은비의 베갯속으로 들어와 큰소리쳤다.
"잠들면 무서운 꿈을 가져다주겠어. 이히히히."
녀석들의 협박에도 은비의 눈은 매번 스르르 감기고야 말았다.
그 틈을 타고 잠 벌레들은 베갯속에서 빠져 나와 은비에게로 스며들었다. 은비가 혼곤히 잠들려는 찰나에 말이다. 깨어있는 건지 잠들어 있는 건지 헷갈리는 혼몽한 순간이 바로 녀석들이 침투하기 딱 좋은 순간이다.
녀석들의 꿈 짓는 실력은 놀랄 만해서 온 밤이 무시무시 으시으시했다. 녀석들은 심술궂은 상상력을 뽐내며 꿈들을 정신없이 쏟아내었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벌벌 떨게도 만들었고, 입안에 거품을 가득 문 검둥개들이 달려들게도 만들었다. 밤새 꿈속을 헤집고 나오면,
"고은비, 또야 또. 얼른 가서 할머니한테 소금 얻어와."
엄마의 호통소리가 이어졌다. 그럴 때면 은비의 축축해진 이부자리 위로 어김없이 노란 오줌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은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은비의 머리에 쌀 고르는 키를 덮어씌워 내보내셨다. 그렇게 오늘도 은비는 수선화 가득 피어 있는 소금할머니의 집으로 갔다.
"할머니, 저 은비요."
두 말도 필요 없었다. 그 한마디면 할머니는 소금 한바가지를 가지고 나오셨다.
그러고는 은비가 뒤집어쓴 키를 향해 소금을 흩뿌리며 소리치셨다.
"소금 장군님 나가신다아~."
잠시 후, 할머닌 마당 가득 피어있는 수선화 화단 옆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곤 턱 마루에 놓여 있는 튀밥 간식을 한 움큼 담아 오시며 은비를 위로하셨다.
"미안하다. 하지만 소금 장군은 나쁜 꿈들을 모두 몰아내준단다."
할머니의 집을 나와 골목길을 빠져나올 때쯤, 또 다른 아이들 몇몇이 할머니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순서를 정하듯 소금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할머니의 소금 장군은 온 동네 꼬마들의 남은 잠을 깨워주었다.
은비는 억울했다. 이 모든 게 고약하게 생긴 그 잠 벌레 녀석들의 짓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났다. 녀석들은 생김새도 여간 고약한 게 아니다. 오동통한 구더기처럼 불록 튀어나온 외마디 몸에 두 개의 뿔, 세 쌍의 날개로 베개 속을 휘저어 다니며 온갖 꿈들을 흩뿌려놓았다. 그럴 때면 그야말로 떼지어 다니는 박쥐들 같았다. 동굴 속에 거꾸로 매달린 박쥐떼처럼 베개 속에 거꾸로 매달려 은비의 잠속에 침투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날 밤, 은비는 몰려오는 잠을 참아가며 잠 벌레 녀석들을 몰아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막으려 애써도 은비의 눈꺼풀은 어느새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렇게 얇은 눈꺼풀이 검은 장막처럼 은비의 눈 위로 스르르 내려앉을 즈음, 녀석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베개 밖으로 몰려 나와 은비의 머리 속으로, 귓속으로, 눈과 콧구멍 속으로 쏙쏙 스며들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무시무시한 악몽이가 제일 큰 소리로 은비의 잠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악몽이가 쏟아내는 왕눈이 괴물은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와락와락 달려들었다. 은비는 또다시 거대한 솜틀 베개 속에 갇혀 버린 채 허우적댔다. 빛이 스미는 저 끝으로 두 손을 뻗어도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았다. 오줌이 마려웠지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고은비, 너 또오…."
엄마의 호통 소리에 은비는 눈을 떴다. 그러고는 또다시 소금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은비는 눈이 큰 아이를 만났다. 순간 꿈속에서 본 왕눈이 괴물이 생각났다.
그 아이도 은비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은비가 보기에 그 아이도 간밤의 꿈속에서 아직껏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보였다.
그날 밤, 은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베개를 노려보았다.
"나올 테면 나와 봐. 다시는 당하지 않을 거야."
잠시 후, 노란 잠 벌레 한 마리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보나마나 마음 약한 길몽이 녀석이었다. 길몽이는 은비를 위로하려고 나왔다가 태몽이 녀석에게 야단을 듣고 얼른 머리를 베갯속으로 집어넣었다. 단단히 벼르던 그 밤은 고약한 흉몽이 녀석이 은비의 잠속으로 스며들어 은비를 흉측한 세상 속으로 떠밀어 버렸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도 또 먼저 잠이 든 것이다.
"아악…." 은비가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잠들고야 말았다. 깨어나는가 싶으면 또다시 잠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도 녀석들의 재주였다. 사람의 정신을 반쯤 흐리멍덩하게 만들어 놓고, 꿈인 듯 아닌 듯, 잠인 듯 아닌 듯, 골려먹기 일쑤였다. 덕분에 밤새 징그러운 뱀들 사이에 휩싸여도 그곳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거대한 아나콘다에게 잡혀 먹힐 뻔해서 뒤척뒤척 몸을 돌리면 이번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흑까마귀 녀석들이 달려들었지만 쉽게 깨어날 수 없었다.
'오늘은 반드시 몰아내고 말거야.'
은비는 또다시 마음을 다지며 베개 속을 슬슬 풀어헤쳤다. 그러고는 손에 든 모기약통을 두어 번 흔들어 베개 속에 뿌려대기 시작했다.
'고약한 녀석들, 단번에 몰아버리겠어. 이제는 진짜 안 당해.'
그날 밤, 은비는 끔찍한 악몽이와 고약한 흉몽이 녀석들의 합세로 더 높고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서서 벌벌 떨어야 했다. 또 무시무시한 모기떼들까지 몰려들어 달리고 달려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베개를 내던졌지만, 이미 스며버린 녀석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결국, 은비의 이불 위에는 또다시 넓은 오줌 지도가 펼쳐지게 되었다.
'윽…엄마 아시면 또 혼나겠다.'
은비는 얼굴을 찡그리며 베개를 내려다봤다. 오리깃털을 감싸 봉곳하게 솟아오른 베갯잇의 오리 문양 가족이 아무 일 없었던 듯 뒤뚱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우씨, 오늘은 어떤 고약한 놈이 온밤 내내 무서운 괴물들을 불러낸 거야?" 은비는 베개를 흔들어댔다. 벌떡 일어나서 베개를 발로 밟고, 무거운 의자로도 내리눌렀다. 하지만 베개는 납작해졌다 솟아오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대체 왜 나를 매일매일 괴롭히는 거야? 좀 나와 봐."
다음 날, 은비는 큰맘 먹고 녀석들을 불러내었다. 제일 먼저 고개를 내민 것은 역시 마음 착한 길몽이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내 흉몽이 녀석이 길몽이 녀석을 꾹 내리누르며 말했다.
"이게 우리들 할 일이거든. 우리는 하루 종일 베개 속에서 아이들의 꿈을 만들어 내고 있어. 무시무시하고 흥미진진한 꿈들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멋지게 선사하는 거지. 낄낄낄!"
개구쟁이 흉몽이가 낄낄대며 말했다. 녀석은 징글징글하고 흉측한 꿈 전문이었다. 악어 떼가 득시글대는 정글 늪에 빠뜨려 거대한 독거미들에 휩싸이게 만든 것도 흉몽이 녀석들이었다. 얼굴 전체로 구더기들이 우글우글 솟아오르게 만든 것도 녀석들이었다.
은비는 그런 흉측한 꿈속을 헤매다 깨어나면 온 몸에 소름이 덕지덕지 돋아나 있었다. 얼굴 위로 고개만 쏙 내민 우글우글 구더기 벌레들처럼 말이다.
"꿈 창작학기를 다 마치게 되면 우린 비로소 어른들의 꿈을 지배할 수 있게 되지. 너희같이 조무래기들 꿈이야 식은 죽 먹기지만 어른들의 꿈은 좀 더 높은 단계라고나 할까."
제법 의젓한 척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노란 진액으로 온갖 흉악하고 무시무시한 꿈들을 만들어 내는 악몽이 녀석이었다. 녀석이 은비의 꿈속을 헤집는 날에는 은비의 이부자리가 더욱 흥건해져 있었다.
"다 너를 위해서야. 우리가 알려주는 꿈은 너의 미래를 말해주는 거니까."
미래를 내다본다는 예몽이었다.
이때 태몽이 녀석이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점지해준 꿈으로 네가 태어났잖니. 그건 7년 전의 내 꿈이 너를 불러낸 거라구."
은비는 엄마에게서 태몽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뱃속에 은비를 갖기 전에 꿈속에서 샛노란 복숭아를 온 몸에 받아들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예쁜 은비를 낳으신 거라고 했다.
"그럼 내가 태어나도록 너희들이 꿈을 만들어 주었던 거야?"
"물론이지. 네 엄마도, 네 엄마의 엄마도, 그리고 네 엄마의 엄마의 엄마도 모두 내 꿈을 받아 안고 얼마나 행복해 했다고."
이때, 길몽이 녀석이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
"내 꿈은 좋은 손님을 부르잖아. 내가 건네주는 까치 얘기에 사람들은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고, 또 내가 들려주는 돼지 얘기에 사람들은 너도 나도 좋은 행운이 오길 기다리니까."
"하지만 밤마다 그 꿈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이 드는데…."
은비는 밤새 고생한 생각에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넌 우리 덕분에 매일 무사할 수 있는 거라구."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억지가 어딨어?"
"우린 네가 놀이터 철봉에서 떨어지던 날도 분명히 조심하라고 알려줬어."
은비는 몇 주 전 놀이터 철봉에서 떨어져 발목을 다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꿈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슨 꿈이었지? 왜 난 기억이 나질 않지?"
은비가 물었다. 이에 익살꾼 흉몽이 녀석이 고개를 쑥 내밀며 말했다.
"당연하지. 이미 한 번 꾼 꿈은 서서히 희미해지게 되어 있거든. 조금만 변화를 줘도 새로운 꿈처럼 느껴지도록 꿈은 반투명 잉크로 기록하게 되어 있으니까."
잠 벌레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책장을 한 장 한 장 펼치며 꿈 얘기를 보여주었다.
책장은 얇은 미농지처럼 희미하고 투명했다. 그 위에 깨알같이 박힌 글자들이 애벌레 모양으로 꿈틀꿈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미농지 같은 종이들이 머릿속으로 스며들면 바로 그날 그날의 꿈들이 기록된다는 것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흥미진진하고 신비스런 꿈의 세계가 펼쳐졌다. 깊은 낭떠러지를 날고 있는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아슬아슬 땅위를 피해갔다. 바다 속을 헤엄치는 아이들은 엄청난 상어들 곁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갔고, 하늘을 나는 아이들은 양 팔에 날개를 달고 먼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한 곁에는 푸르게 펼쳐진 하늘 위로 무지개가 떠올랐고, 또 다른 페이지에는 검은 먹구름이 가득 차서 우룽우룽 진동하고 있었다.
"이거 봐. 지지난 주에 네가 꾼 꿈이야. 넌 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한참을 고생했잖아. 다행히도 다람쥐 녀석들이 파놓은 나무 구멍 속에 네 발을 넣어서 위험을 피했구."
잠 벌레는 자신들이 펼쳐준 꿈들이 얼마나 이로운 것들이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밤도 두둑한 책들을 펼치며 새로운 꿈들을 찾고 있다고 했다.
"기본적인 시작과 공간만 주면 나머지는 너희들이 만들고 상상해낸 꿈들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꿈의 시작일 뿐이라구."
길몽이 녀석이 말했다. 하지만 은비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 그 모든 게 다 내 상상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라고? 말도 안 돼."
은비는 어떻게 자기가 그런 상상들을 해낼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꿈을 꾸면서 살아가. 어른들도 꿈이 없인 하루도 살수 없을걸? 너흰 미래를 꿈꾸면서 매일 매일 꿈속에서 헤매는 거야. 꿈속의 꿈과, 너희들이 꾸는 꿈은 다른 것 같지만, 마음속에서는 같애. 꿈은 바로 너희들의 상상이고 바람이거든. 둘 다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제일 나이 많은 예몽이의 말이었다. 예몽이는 아이들이 모두 꿈속에서 꿈을 꾸며 자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비는 놀라웠다. 녀석들이 하는 말들이 모두 꿈같았다. 가만 보니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녀석들의 말소리가 웅웅거렸다. 순간 은비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오늘은 무슨 꿈이 좋을까. 그래. 바다가 어때?"
무시무시한 악몽이 녀석이 말했다. 녀석이 책장을 펼치기 시작했으니 밤사이 찾아온 바다 속으로 거대한 물 폭풍이 밀려올 게 뻔했다.
역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비는 험난한 파도 한가운데 서있었다. 갈라지는 물결 사이에서 은비의 온몸이 휘청거렸다. 거대한 바다가 거친 숨소리를 내질렀다. 순간 우르릉쾅 소리와 함께 세상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비는 너무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눈을 떠도 또 떠도 바다 위였다.
뭐지? 뭐가 흔들려. 엄마. 아빠는 어디 갔지? 모두들 어떻게 된 게 아닐까?'
그 생각에 미치자 은비는 더럭 겁이 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은비 자신이 '자신의 세상'을 상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바다는 무서 운곳이고, 땅은 흔들리고, 엄마 아빠는 잘못될 거야'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은비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져왔다.
"얼른 생각을 멈춰야 해. 그래, 내 상상을 멈춰야 해. 상상하는 대로 모두 이루어진댔어."
은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또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 곳은 거친 바다가 아니야. 난 지금 부드러운 땅위에 내려앉아 있어. 하늘은 고요하고 푸른 잔디 위에선 새들이 지저귀고 있어."
은비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난 눈부신 바다를 꿈꿀 거야. 펼쳐질 세상이 아무리 무서워도 절대 겁먹지 않을 거야."
순간, 바다의 일렁임도, 거대한 세상의 흔들림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은비는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너른 초원 위엔 새하얀 수선화가 가득 피어있고, 새들이 날아들었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고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때 뚱뚱한 소금장군이 바다위에 우뚝 서서 은비를 향해 손짓했다. 소금장군은 파도를 헤쳐 은비의 손을 꼭 잡고 고요한 꿈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 아침, 은비의 이불은 뽀송뽀송했다. 밤이 되도 베개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 벌레들이 스미던 베개 속의 깨알 같은 구멍들도 보이지 않았다. 은비는 베개를 툭툭 털어보았다. 앞뒤로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베갯잇 사이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튀밥 알갱이 하나가 툭 떨어져 나왔다.
베갯잇의 지퍼를 열어보니 사이사이에서 소금 할머니가 주신 튀밥 알갱이들이 투루루룩 떨어져 내렸다. 은비는 튀밥 하나를 주워들어 귓가에 대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베개 속에 귀를 기울였다. 베개 속에선 이제 그 어떤 속삭임도 들려오지 않았다.
은비는 베개를 베고 누워 가만히 생각했다.
'이제 내게 어떤 꿈들이 스미게 될까?'
그날 밤 은비의 키는 부쩍 자라 있었다. 매일 밤 무서운 꿈을 이겨내던 용기 있는 상상만큼이나 부쩍 커져가고 있었다. 소금 장군 덕분에 매일 아침 이불 속을 적시던 오줌지도도 말끔히 사라졌다.
"소금장군님, 고마워요." 은비는 속삭였다.
그때, 어디선가 쉑쉑거리는 얕은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은비가 조심스레 베개를 열어보니 베개 속엔 아직 스미지 못한 잠 벌레 녀석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또 어디에서 스며들어왔지?'
은비는 가만히 베개를 내려놓았다.

출처 : 부산 문예창작 아카데미
글쓴이 : 먼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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