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교실

전도폭발 예화들

열국의 어미 2010. 5. 22. 22:31

 

 

 

전도폭발 예화

 

 

믿음의 배와 행위의 배

“(선생님)이 지금 호수 한 가운데서 두 척의 노 젖는 배에 각각 한발씩 딛고 서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한 배는 구멍투성이라서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어요. (선생님)이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얼마 안가서 호수에 빠질 것이 분명해요. 구멍투성이인 배는 죄로 인해서 만신창이가 된 우리 자신이고 온전한 배는 그리스도를 가리켜요. 우리 ‘자신’의 배와 그리스도의 배에 각각 한발씩 딛고 서 있으면 우리 자신의 배에 두발을 다 딛고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에 빠지고 말 것이 분명해요. 오직 그리스도의 배에 두발을 든든히 딛고 서 있는 것만이 안전한 길이에요.”

 

 

밧줄인가? 실인가?

“아니면 이야기를 바꾸어서 (선생님)이 지금 100미터나 벌어져 있는 절벽과 절벽 사이를 이 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고자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천 길 낭떠러지 밑에는 바위 조각들이 널려있어요. (선생님)은 지금 수 톤의 무게라도 견뎌 튼튼한 밧줄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이 갖고 있는 밧줄의 길이가 50미터 정도 밖에는 안된다는데 있어요. 제가 만일 (선생님)에게 ‘염려마세요, 여기 50미터 정도의 실이 있어요. 제 실과 (선생님)의 밧줄 끝을 연결해서 그 양끝을 절벽이 편과 저 편에 있는 나무에 각각 매어 놓고 건너가시면 되요.’ 하고 제안했다고 해보세요. 물론 (선생님)은 저의 제안을 거절하실 거예요. 그런데 제가 ‘왜 그러시죠? 밧줄을 못 믿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선생님)은 ‘아뇨. 밧줄은 믿지만 실은 못 믿죠.’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바꾸어 밧줄이 90미터이고 실이 10미터라고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은 아직도 안심이 안 될 거예요. 그러면 또 다시 밧줄이 99미터이고 실이 단지 1미터라고 생각해 보세요. 실이 10센티미터라고 하면 어떻겠어요? 아니 실이 단지 1센티미터이고 나머지가 다 밧줄이라고 하더라도 100미터의 거리 전체를 실만 매어 놓고 건너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거예요. 여기서 분명히 밧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어 놓으신 일을 가리키고 실은 우리가 행한 일을 가리켜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해야 해요. 챨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이 말했듯이 ‘우리가 만일 우리의 구원의 옷에 우리의 행위의 실을 가지고 한 바늘이라도 꿰매는 날에는 그 옷 전체를 다 망가뜨리게 될 거예요.’ ”

 

 

하나님의 거룩하심 - 조율이 안 된 악기

어떤 음악회에서 관현악단이 연주를 하는데 악기 하나가 음정이 틀리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서 지휘자가 관현악단 전체를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율이 안 된 악기는 내보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인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마치 조율이 안 된 악기와도 같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나 우리는 불의하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나 우리는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나 우리는 죄로 가득 차 있다. 관현악단이 온전히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조율이 잘 안되어 음이 맞지 않는 악기를 내보내야 하듯이 자기 자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도 죄 때문에 그와 함께 거할 수 없는 인간을 내보내야만 한다. 하나님은 죄와 공존하실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죄인과 교제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는 절대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심 - 유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만삭이 거의 다 되어 유산을 한 어머니와 태아 사이의 관계와도 같다. 복중에서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머니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나서 함께 지낼 날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생리구조에 이상이 생겨서 어머니의 생리구조에 실제로 역행하는 현상이 일어나 유산되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 관계를 설명해 준다.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불화를 초래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의 피조물인 범죄 한 인간을 내어 쫓으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만일 범죄하여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계속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남아 있으면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성이 파괴되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 - 탱자나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본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내적인 능력이 없다. 어떤 사람의 집 마당에 탱자나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탱자나무는 고작해야 시디신 탱자를 맺는다. 그런데 만일 그 집주인이 귤을 키우고 싶은 나머지 마당가의 탱자나무에서 신 탱자를 다 따내고 그 자리에 달콤하고 즙이 많은 귤을 가져다가 매달아 두었다고 하자. 잠시 동안은 그 탱자나무에 동네에서 가장 맛이 좋은 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귤나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귤들을 매달아 놓은 탱자나무일 뿐이다. 우리가 나무의 본성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시디신 탱자와 같다. 우리는 자주 그 본성을 싫어하여 그것을 개선할 결심을 한다. 우리는 시디신 그 인간의 본성의 열매들을 따내버리려고 온갖 애를 쓴다. 어떤 사람은 술을 끊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말조심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족 관계와 사업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들은 탱자를 따내고 그 자리에 귤을 매달아 두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기른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원천을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선하게 바꾸어 놓을수 없는 것은 탱자나무를 귤나무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성품이 필요하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린도후서5:17)고 했다.

 

 

인간의 능력 한계 - 민족의 혈통

우리가 만일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간다면 우선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배우고 또 그 나라 사람들의 관습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그 나라에 정착하여 불편 없이 살아가려면 그 나라 사람들의 말과 관습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과 생활방식까지도 철저히 익혀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하는 것, 얼굴표정, 몸짓, 손짓, 옷 입는 것이 모두 그 나라 사람들과 비슷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고방식과 언어와 생활방식이 제아무리 그 나라 사람들과 같아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혈통마저 같아질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가 그 나라 사람들과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는 우리의 혈통이 그들과 같아질 수는 없다. 우리가 무슨 수를 쓴다 해도 우리 자신이 지닌 민족의 형통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과 똑같은 말을 하고 크리스천과 똑같은 옷을 입을 수 있다. 그가 크리스천의 단체에 가입을 하고 크리스천이 부르는 찬송을 부르고, 모든 면에서 크리스천과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그를 크리스천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그는 죄에 빠진 인류의 형통을 이어받고 태어난 죄인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외적인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 사실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야 한국인이 되듯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민족의 혈통을 받고 또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거듭나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한다.

 

 

그리스도의 사역 - 인간이 처한 궁지의 해결책

성경에는 인간이 처한 궁지를 해결할 공식이 있다. 인간의 죄에 하나님의 공의를 더하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라는 답이 나온다. 우리는 마땅히 그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야 할 요소가 또 있다. 우리가 만일 인간의 좌와 하나님의 공의 위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답이 나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 값을 대신 갚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이 처한 궁지의 유일한 해결책인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 - 아레오바고 재판관

그리스(희랍) 아테네에 있는 아레오바고 재판관은 얼마나 공정한 재판을 베풀었던지 그의 불의한 처사를 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판결은 항상 공명정대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더 공명정대하겠는가!

 

 

하나님의 자비 - 토마스 후거의 임종

토마스 후거(Thomas Hooker, 1856~1647)은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 목사로서 1633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의 보스톤에 이민 온 후 1636년에 현재 예일대학교가 있는 커네티컷 주 뉴 헤이븐에 재정착해서 초기 미국의 교계와 정계 지도자로 큰 몫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임종시에 친구 하난가 “자네는 이제 수고의 대가를 받으러 가는구만.”하고 말했다. 후커목사는 겸손히 대답하기를 “아닐세. 하나님의 자비를 받으러 간다네.”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할 뿐이다. 자비를 얻지 못하면 잃어버린 자가 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안겨준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는 우리에게 천국을 안겨준다.

 

 

지식적인 동의 - 블론딘의 줄타기

1860년 어느 날 미국의 나이애가라 폭포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줄타기의 명수 블론딘(Blondin)이 폭포 위로 매어놓은 줄을 타고 이편에서 저 편으로 건너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블론딘은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위로 50미터정도의 높이에 300미터 길이의 밧줄을 매어 놓고 수도 없이 건너다닌 경력이 있었다. 이 날은 블론딘이 군중을 향해서 자기가 사람을 업고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사람들은 모두 블론딘의 말에 동의했다. 이에 그는 어떤 사람 앞에 다가가서 그를 등에 업고 폭포를 건너겠다고 제안했다. 그 사람은 즉시 거절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기식적인 동의나 말로만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거기에는 신뢰가 따라야 한다. 구원을 위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하는 신뢰가 따라야 한다.

 

 

믿음 - 가치를 결정해 주는 대상

믿음의 가치를 결정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믿음은 믿음 그 자체가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믿음을 가져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 참 가치를 지니려면 그 믿음의 대상이 가치가 있어야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가치를 결정해 주는 것은 그 믿음의 대상이다. 따라서 단순히 믿음을 가지는 것보다는 무엇을 믿느냐가 더 중요하다. 잘못된 대상을 믿는 믿음은 가치가 없다. 그런 믿음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자기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전폭적으로 믿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브레이크 파이프가 파손되어 있으면 아무리 믿어도 차를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밤에 자다가 두통이 심해서 깨어난 사람이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약상자를 찾아 두통약으로 생각되는 알약을 믿음으로 먹었는데 잘못하여 극약을 먹었다면 사람들이 그의 비문에 “여기 아무개가 믿음으로 죽어 잠들다.”라고 새겨 줄 것이다. 그런 식의 믿음은 전혀 믿을 가치가 없는 대상을 믿은 헛된 믿음이다. 한 때 미국의 수많은 임산부들이 임신가간 중에 자기 몸을 좀더 편안하게 해 줄 것으로 믿고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라는 신비한 약을 복용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믿음은 기형아 출산을 막아주지 못했다. 믿음이 어떤 가치를 지니려면 가치 있는 대상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영원한 행복을 생각할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고 의지할 참 신뢰의 대상이 되신다. 구원에 관한 한 사람이든 물질이든 그 밖의 다른 대상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선행 - 고급가구

어느 유명한 가구 제조업자가 친구 하나를 아주 좋아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자기 친구에게 아주 값진 선물을 가지고 가서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친구 몰래 자기 돈을 다 굵어 모았다. 자기 자식에게 남들처럼 못해 주면서도 친구를 위해서는 그가 이제까지 은행에 저축해 두었던 돈을 찾아오고, 가진 재산을 다 팔고, 주식과 채권을 현금으로 바꾸고 온 세상에 다니며 돈으로 살 수 있는 목재로서는 최상품을 구입했다. 그리하여 그의 가구공장에는 말할 수 없이 값진 목재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이제까지 세상에 없던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최고급 탁자를 만들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했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잘 못자고, 몸도 돌보지 않으면서 일을 계속했다. 드디어 나무를 자르고, 대패질하고, 구멍을 파고, 풀칠을 해서 탁자를 맞춘 다음 사포(sand paper)로 문질어서 곱게 칠을 하고는 몇 시간을 거쳐서 광을 냈다.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천을 가지고 깨끗이 닦아서 손질을 끝냈다. 다음날 그는 자기가 정성을 들여 만든 탁자에 천을 덮어서 그의 조수들에게 들려 가지고 친구 집문 앞에 이르렀다. 친구는 반갑게 맞아들였다. 친구 집에 들어간 가구 제조업자는 덮었던 천을 벗기고 자기가 선물로 가져온 탁자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값으로 칠 수 없는 소중한 가구였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탁자를 본 친구는 냅다 달려가서 사포조작을 가져오더니 그 탁자를 향해서 덤벼드는 것이었다. 전문가인 가구 제조업자는 깜짝 놀라 막아서며 “그건 완제품이야, 이 사람아!” 하고 말했다.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값으로는 칠 수 없는 무한한 대가를 치르셨다.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그가 이루신 우리의 구원은 완제품이다. 우리는 거기에 아무 것도 덧붙일 수가 없다. 단 한 가지도 덧붙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격이 없으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선물에 우리가 어떤 손질을 하려고 하는 것은 곧 그것을 거절하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선행이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우리의 선행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그를 영화롭게 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 탁자를 눈에 뛰는 곳에 두어서 보는 사람마다 그것을 손수 만들어서 값없이 선물로 준 사람의 놀라운 기술과 정성과 후의에 대해 찬사를 돌리게 하듯이 구원의 선물을 받은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을 만민에게 전파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이것이 분명히 실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잊혀진 독생자

이것은 전도대상자가 복음의 내용을 다 듣고 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대해서 주저하는 빛을 보일 경우 하나의 강력한 예화로 사용할 수 있다.

“만일 지금 이 자리에 총을 빼어 든 경찰이 뛰어 들어와서 제 손에 수갑을 채워 경찰서 유치장으로 채포해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론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겠죠. 또 제가 여러 건의 살인과 은행 강도 혐의 심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유죄로 확정되고 결국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놀라시겠죠. 그러나 (선생님)은 저를 잘 알고 있고 또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저를 돕기 위해서 뭔가 조처를 취하실 거예요.”

 

“(선생님)이 판사에게 가서 ‘제가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요.’ 판사는 대답하기를 ‘이 범인은 여러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당신의 목숨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오. 하지만 당신의 외아들 목숨이라면 우리가 받아들이겠소. 당신의 독생자라면 충분히 희생이 될 것이오.’ 라고 했어요.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집에 돌아와서 고민에 빠졌어요. (선생님)에게는 철부지 어린 아들 하나 밖에는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은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말할 수 없이 번민하실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저를 (선생님) 몸처럼 사랑한다면 결국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실 거예요. 드디어 (선생님)은 사랑스런 외아들을 데리고 사형장에 갔어요. 사형집행관은 (선생님)에게 ‘당신이 직접 형을 집행하시오. 당신이 직접 아이의 손발을 묶어 교수대 위에 세우고 얼굴을 가리운 다음 밧줄의 고리를 아이의 목에 걸고 손잡이를 잡아당기시오.’ 하고 말했어요. (선생님)은 아들의 손발을 묶기 시작했어요. 아들은 애절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쳐다보며 ‘아빠, 왜 나를 버리시나요?’ 하고 묻는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메어지는 가슴을 안고 아들의 얼굴을 가리우고 밧줄을 목에 건 다음 손잡이를 잡아당겼어요. 그처럼 사랑스럽던 외아들이 죄 없이 교수대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죽어갔어요. 사형집행관은 (선생님)이 저를 위해서 한 일을 저에게 알려주었어요. 저는 (선생님)이 제 목숨을 대신해서 죄 없는 외아들을 희생시켰기 때문에 풀려나 자유로운 몸이 되어 집에 돌아왔어요.”

 

“며칠 뒤에 (선생님)이 어떤 음식점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마침 저도 음식점에 들어가서 다른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어요. 저는 (선생님)이 와 계신 것을 보지 못한 채 (선생님) 바로 뒤에 있는 칸막이 방에 들어갔어요. (선생님)은 식사 도중에 제 친구가 저에게 하는 말을 어깨 너머로 듣게 되었어요. ‘신문에 보니까 자네 사형언도를 받아 교수형을 당하게 되어있던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어떻게 해서 풀려나게 되었나?’ 이때 (선생님)은 제 대답을 듣고 깜짝 놀라셨어요. ‘아, 그건 사람들의 큰 실수였어. 그 사람들이 내 과거 기록을 들춰보더니만 그래도 내가 정말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나봐. 뭐, 은행에다 내가 저금까지 해 뒀는 걸! 또 수년 전에는 길 건너는 할머니를 여러 번이나 도와드린 적도 있단 말이야. 그래서 풀려나게 된 거야.’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으실 때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교수대에 매달려 몸부림치다 숨져간 외아들의 모습이 선히 떠오를 거예요. 제가 이렇게 살아서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오직 저를 대신해서 죄 없이 죽어 무덤에 묻힌 (선생님)의 외아들 때문이죠. 그런데 제가 그처럼 엉뚱한 말을 한다면 (선생님)은 저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시겠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이 만일 하나님 앞에 가서 섰을 때 (선생님)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동아가신 하나님의 독생자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고 오직 (선생님) 자신의 선행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신다면 하나님께서도 똑같이 느끼실 거예요. 주일 학교 1학년 학생 하나가 요한복음 3:16을 암송하는데 약간 혼동을 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잊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는 것이었어요. 그 학생은 우리 중 많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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